김우연의 좋은 시조 읽기(현대시조) 130

봄하늘-조동화

봄 하늘 조동화 먼 산 능선들을 둑으로 둘러막아 빈 못에 물 채우듯 찰랑찰랑 가둔 푸름 때마침 큰고니 같은 구름 한 점 떠간다. -24호( 2020) 동시조이다. 봄하늘이 너무 파랗다. 그것이 마치 호수의 물과 같다. 그런데 저 먼 산의 능선들이 호수의 둑이 되고 봄하늘은 그 호수의 물이 된다. 그리고 '큰고니 같은' 흰 구름은 마치 호수에서 헤엄치는 큰고니과 같다는 것이다. 한 폭의 수채화이다. 시인의 마음도 저 호수의 청정무구한 물을 닮고 싶은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봄하늘이 호수의 물과 같다는 동심의 착상이 평범한 소재를 비범하게 만들었다. 봄이 오면 꽃이 온 산이 연초록으로 물든다. 우리나라의 동쪽은 특히 산악지방으로 산에 올라서 보면 연이어 있는 능선들이 마치 물결처럼 보인다. 시인은 이런 모습..

민병도-선운사에서

선운사에서 민병도 때늦은 꽃맞이에 대웅전이 헛간이네 부처 보기 민망한 시자侍子마저 꽃구경 가고 절 마당 홀로 뒹구는 오금저린 풍경소리 무시로 생목 꺾어 투신하는 동백꽃 앞에 너도 나도 돌아앉아 왁자하던 말을 버리네 짓다 만 바람집 한 채 그마저도 버리네 비루한 과거 따윈 더 이상 묻지도 않네 저마다 집을 떠나 그리움에 닿을 동안 오던 길 돌려보내고 나도 잠시 헛간이네 -《가람시학》11호(202)) 이 작품의 핵심어는 ‘헛간’이다. 첫 수 초장에서 ‘헛간이네’가 마지막 수 종장에서 다시 반복되어 끝난다. 첫 수에서는 상춘객과 함께 시자도 동백꽃을 보러 나가고 대웅전은 ‘헛간’이 되었다. 텅 빈 ‘헛간’은 바로 가장 고요한 상태, 바로 부처만이 존재하는 ‘적멸’의 상태가 된다. 둘째 수에서는 뚝뚝 떨어지는 ..

우체국을 지나며/ 문무학

우체국을 지나며 문무학 살아가며 꼭 한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날 수 있다면 가을날 우체국 근처 그쯤이면 좋겠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엔 우체국 앞만 한 곳 없다 우체통이 보이면 그냥 소식 궁금하고 써 놓은 편지 없어도 우표를 사고 싶다 그대가 그립다고, 그립다고 그립다고 우체통 앞에 서서 부르고 또 부르면 그 사람 사는 곳까지 전해질 것만 같고 길 건너 빌당 앞 플라타너스 이파리는 언젠가 내게로 왔던 해묵은 엽서 한 장 그 사연 먼 길 돌아와 발끝에 버석거린다 물 다든 가로수 이파리처럼 나 세상에 붙어 잔바람에 간당대며 매달려 있지만 그래도 그리움 없이야 어이 살 수 있으랴. 문무학 시인은 1949년 대가야읍(낫질) 출생으로 1982년 신인상으로 데뷔한 이래 ,외 여덟 권과 두 권의 선..

처진 소나무(임성화) 외

에서 운문산 발등에 앉아 참선에 든 노승 있다 쇠북소리 시침질로 기워놓은 하늘 한 폭 달과 별 묵주로 꿰어 바람경經을 읊는다 -임성화,「처진 소나무」전문 반구대 암각화에 힘 좋은 사내 산다 허리에 돌칼 차고 딩각을 불어가며 한 무리 떠나는 사냥 무사귀환 기원하는 보름달 떠오르면 땅 쿵쿵 북을 치고 모닥불 원을 돌며 우샤우샤 춤사위에 뭍으로 올라온 고래 선하품을 하고 있다 불콰한 저녁노을 취기 오른 벼랑마다 수묵화로 새겨놓은 그 사내의 일기장에 대곡천 돌아든 물길 소리소리 흐른다. -임성화,「딩각부는 사내」전문 천 년 전 어느 소가 저렇게 늙어있나 뼈와 살 발라내어 하늘 강에 바치고 거죽은 북이 되어서 둥둥 울다 잠들었나 임란에서 삼일까지 그 격랑 맞서 싸운 십만 넘는 의병은 푸른 솔로 쭉쭉 크고 반야차 ..

좋은 시조 읽기 14. 우포늪 외(문수영)

좋은 시조 읽기 14. 문수영, 『뭍으로 굽은 길』(2021) 잃어버린 몇 날은 길가 풀섶에서 졸고 또 몇 날은 갈대되어 이리저리 흔들리고 여기선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구름이 된 이야기 늪 속에 가득 담고 떠나지 못하는 철새 울음소리 듣는다 단 한번 입맞춤으로 들국화 피어난다 -문수영, 「우포늪」전문 드넓은 서해 갯벌 꿈들이 익어간다 바다가 길을 열어 우리를 부르는 곳 저녁 해 할 말 많은 듯 수평선에 걸려있다 손톱 적신 봉숭아만큼 오래 머물진 못해도 한없이 빛을 발한다, 다시 올 수 없기에 너와 나, 뒷모습 저리 아름다울 수 있다면… -문수영, 「무창포 노을」전문 문수영 시인은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자유시로 등단하였으며, 2005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시조로 당선하였다..

13. 서벌, 「대숲 환상곡」 (사설시조)

못 이룬 꿈들, 알 수 없는 애틋한 꿈들, 땅속 꿈들이 얼기설기 뿌리 얽어 터널 내고는 직진하는 열차들을 대량 생산하여 바깥으로 내보낸 것이었구나. 저들 열차들은 하늘 가는 열차들, 가지들을 바퀴로 달고, 그리움의 바퀴로 달고 새파랗게 달리는 죽림선(竹林線) 열차들. 중간역 없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들. 달리고 달리는 동안 사계(四季)는 잎으로 모여들어 다도해(多島海) 이루고는 끌리고 있구나. 햇살들은 물론이고, 달빛 별빛들도 내리는 쪽쪽 몸들을 씻고, 바람은 오는 대로 수영선수 되는구나. 검은 배낭 지고 가던 구름이 빗줄기 좌악 쏟으며 묻는다. 이룰 꿈이 무어냐고 달리는 열차들에게 묻는다. 열차들은 그저 달리고, 열차들에게 끌리는 다도해 새파란 목소리로 귀띔해 준다. 깜깜한 땅속에도 하늘 수..

좋은시조 읽기 12. 봄날의 기억(양점숙)

좋은시조 읽기 12. 봄날의 기억(양점숙) 어머니가 눌러쓴 축축한 수건 사이로 돌밭에 들꽃도 잔인한 눈물이던 자식들 배곯는 소리로 온 산이 꺼지더니 배부른 날 있으려나 좋은 날은 오려나 좋은 날 배부른 자식들 모여 앉아도 목메던 어머니의 선소리 들꽃 속에 나 앉고 흰밥이 지천인데 자운영 꽃 그립고 호미 끝에 돌멩이도 그리움이 되었을 때 털버덕 주저앉아서 들꽃이나 꺾어든다. -양점숙, 「들꽃의 기억」 전문, 《나래시조》131호(2019년 겨울) 인간의 기억은 편집된다고 한다. 그 편집된 기억이 개인의 것은 추억이며 집단의 것은 역사이다. 그래서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인식이 다르고 세대에 따라 큰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눈으로 해석하기 때문일..

좋은시조 읽기 11. 풍경을 공유하다(김석이)

좋은시조 읽기 11. 풍경을 공유하다(김석이) 쾌속선을 타고 간다 창밖에 있는 바다 안에 있고 밖에 있는 시간과의 동행이다 펼쳐진 풍경을 보니 마음이 물결이다 자판이 흩어졌다 조합하는 말의 수위 뒤돌아 볼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는 섬 다 뱉지 못한 말들이 앞으로만 가고 있다 -김석이, 「풍경을 공유하다」 전문 여행이란 자신을 돌아보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된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물이 물로 보이는 법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물과 같아서 물속에서는 물을 보기가 어렵다. 무비(無比) 큰스님께서는 여행을 공간여행과 시간여행으로 나누고 계신다. 공간여행이란 우리들이 일상에서 떠나서 체험하는 일반적인 여행을 말하며 새로운 경험은 자신을 돌아보는데 큰 자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여행은 우리의 육신이 ..

좋은시조 읽기 10. 기억의 방(정온유)

좋은시조 읽기 10. 기억의 방(정온유) 기억이 기억을 끌고 시간을 넘어올 때 사라진 줄 알았던 것이 하얀 얼굴을 하고 온다. 작아진 세포 하나가 부풀어 오른 기억의 방. 문 하나가 열리고 저, 건너편에 있던 낯익은 기억들이 시간을 감고 오면 환하게 켜지는 기억, 후두둑 쏟아지는. -정온유, 「기억의 방」 전문 정온유 시조시인은 2004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무릎』(2014)이 있다. 계간 《나래시조》 특집에 를 통하여 훌륭한 시인들을 소개하여 시조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있다. 「기억의 방」은 우리들이 잊고 있던 일들이 어떤 계기를 만날 때 문뜩 기억나는 과정을 시적 형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내용을 ‘하얀 얼굴’,‘작아진 세포’ , ‘문..

좋은시조 읽기 9. 강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백점례

좋은시조 읽기 9. 강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백점례 노쇠한 아버지를 진료실 앞에 두고 딸 혼자 들어오라는 의사 말을 듣는다 한순간 앞 강물이 넘쳐 집을 집어 삼킨다 열댓 살 때 나무배에 노를 매고 삿대 젓다 한 생애 전장 속의 급류를 굽이쳐 와 다 삭은 삭신을 뉘인 오두막의 내 아버지 아이 같은 그 눈동자 물끄러미 날 보신다 암울한 입 속의 말 못 꺼내고 막혔는데 아버지, 끌고 온 강물 천 길 아래 쏟아진다 -백점례, 「강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전문 백점례 시조시인은 201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위의 작품 「강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2019년 제1회 나래시조젊은시인상 수상작이다. 시인의 소감문에서 “평생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신 아버지를 바라보면 쓴 작품으로 상을 받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