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연의 시조 평론(해설, 논문)

시조의 형식-음보, 장, 구를 살펴보다 (김우연)|

가산바위 2013. 11. 12. 17:10

시조 형식

-음보와 장과 구를 살펴보다

김우연

 

1. 음보

가.‘유배지/ 같은 곳으로/ 승진 발령이/ 나자/ ’(‘다시 잎을 생각하다-철쭉 분재를 보며’의 첫째 수 초장을 이봉수(시조시인, 문학평론가)님은 위와 같이 3552로 분석했다.『 현대시조』103호(2009년 겨울호)

그러나 ‘유배지 같은 /곳으로/ 승진 발령이/ 나자/ ’로 5352로 분석해야 옳다.

이유1. 전자와 같이 분석하면 누군가와 같은 유배지에 발령받은 것이 된다.

2. 후자와 같이 분석해야 승진 발령이 난 곳이 ‘유배지와 같다’는 화자의 인식을 적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음보를 나눌 때는 의미를 살펴보고 통사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나누어야지 기계적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나. 경주 천마도(김창현)

1)

꼬리를 세우고 /하늘 달려 /

한강으로 /가고팠네.(2수 중 첫째 수 종장) 6444가 되어 시조의 종장의 3자를 지키지 못하여 이어서 둘째 음보도 파격이 된다.

시인은

꼬리를 / 세우고 하늘 달려/ 천당으로/가겠네./로 기계적으로 끊어서 첫 음보가 3자가 아니냐고 말하지 모르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눈으로만 읽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눈으로 읽던 소리 내어 읽던 읽어보면 시조의 운율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흔히 틀리기 쉬운 것이다. 통사적인 결합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2)

가슴속 응어리/ 풀어내듯/ 단전에 /힘 모은다.

-청정화,「도봉 주능선,『 현대시조』103호(2009년 겨울호)

종장의 첫 음보가 3음절이 아니라 6음절로서 6434의 파격이 된 것이다. ‘풀어내는’의 목적어는 응어리이다. 가슴속은 응어리를 꾸미는 관형어이다. 단순히 글자수로 음보를 잡아서는 안 된다. 통사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가슴속/ 응어리 풀어내듯/ 단전에 /힘 모은다.”로 읽으면 되고, 시가 문법을 꼭 지켜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읽으면 ‘응어리 풀어내는 ’주체가 ‘가슴속’이 된다. 가슴속의 응어리를 푸는 것이지 가슴이 응어리를 풀 수도 없은 비문이 된다. 응어리를 푸는 것은 가슴이 아니라 시시적화자인 ‘나’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것이 아닌가.

 

3) 만선한 마음/ 씀씀이 /두 팔 벌려/ 쏟아진다 (5344)

-우아지,「대변항」세 수 중 첫째 수 종장

시인은

만선한 /마음 씀씀이 /두 팔 벌려/ 쏟아진다 (3544)로 시조 정격으로 썼다고 말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서술어 ‘쏟아지는’의 주체는 ‘씀씀이’이며 그 ‘씀씀이’는 어떤 것이냐 하면 ‘만선한 마음’이라는 관형어의 수식을 받는 ‘씀씀이’인 것이다. ‘만선한’은 통사적으로 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선한 마음’고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창작 과정상에서 흔히 틀리기 쉬운 것이다.

 

 

2. 장

1)

나서기가 부끄러워

언제나 뒤에 서서

생긋이 웃으면서

살며시 끌어안고

당신만 행복하다면

나도 따라 좋아요.

- 전병태, 「안개꽃」,『 현대시조』103호(2009년 겨울호)

 

초장과 중장의 의미를 살펴보면

 

나서기가 부끄러워//

 

언제나 뒤에 서서

생긋이 웃으면서

살며시 끌어안고// 로 읽어야 한다.

위 시는 결국 초장은 두 음보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시조라고 할 수 없으나, 억지로 ‘나서기가 부끄러워’를 초장에 가져다 붙인 것이다. 도치법으로 썼다고 말할지 모르나 ‘끌어안고’어떻게 했다는 구체적인 서술이 있어야 하나 그것도 없다.

‘끊어안고’에 대한 목적어도 없다. 시라고 해서 함부로 생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어, 목적어나 보어, 서술어는 주성분으로서 함부로 생략하면 비문이 된다.

결국 위 시는 말이 안 되는 것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음보도 함부로 만들 수 없듯이 장을 만드는 데도 구를 같다 붙여서 글자를 맞춘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2)

연두빛 아득히

하늘지던 봄날에

접동새는 목울대 찢어저라 울더니만

진달래

시름을 안고 흐드러지던 둔덕에

- 박건배, 「불 잉걸 타는 노을은」세 수 중 첫째 수,『 현대시조』103호(2009년 겨울호)

 

중장의 ‘울더니만’의 주체는 접동새이며, ‘울더니만’은 행동이 끝난 것이 아니라 ‘우는 것’과는 대조되는 행동의 서술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이 종장에 와야 한다.

그런데 종장은

“진달래

시름을 안고 흐드리지던 둔덕에”는 ‘진달래 흐드러진 둔덕에 시름을 안고(                      ) ' 로 된다.

괄호 안에는 접동새가 어떻게 한다는 행위의 서술이 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 이것은 생략이 아니라 비문인 것이다. 문법으로 따져도 비문이지만, '시‘라는 것에 최대한의 아량을 가진다 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시인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둔덕에 접동새는 시름을 안고 목울대 찢어져라고 울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시조 형식도 안 되고, 시도 안 되는 것이다.

 

현대시조는 형식을 파괴하거나 시가 안 되는 것을 쓰는 것이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시조단에 독버섯이 되는 견해요 행동이다. 촛불을 횃불삼아 거리를 일삼는 무리들처럼 소리 높이 외친다고 정의가 살아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부정은 아무리 많아도 정의롭고 더 큰 부정만이 부정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왜곡된 사람들은 정치판에서나 있을 일이다.

시조는 전통형식을 계승하고 있는 문학이요 정형시이다. 아무렇게나 파괴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한 달 내 땀 흘려도

그네들 잔 술값을

 

받아들고 헤아리는

꿈을 꾸자 잠이 들면

 

벗어 논 신발 속에도

달빛 별빛 소복하다.

-노종래,「신발속에 소복한 빛」두 수 중 둘째 수, 『현대시조』103호(2009년 겨울호)

위 작품도 초·중·종장을 구별배행하고 있어 외형적으로는 정형 형식을 잘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석해보면,

초장의 둘 째구는 의미가 중장과 한 덩어리 되어 있다.

한 달 내 땀 흘려도

 

그네들 잔 술값을

받아들고 헤아리는

꿈을 꾸다 잠이 들면

 

벗어 논 신발 속에도

달빛 별빛 소복하다.

초장이 없는 기형인 것이다. 또 초장의 ‘땀 흘려도’란 말에는 뒤에 대조적인 내용이 와야 한다. 즉 잔 술값만한 작은 돈을 받는 다는 것이요 땀 흘려서 일하면 작은 돈일지라도 받아서 행복해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벗어논 신발에 달빛 별빛 소복하다 하였으니 그들에게 희망을 보이고 있는 화자의 시선은 따뜻하고 긍정적이고 밝아서 좋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시어들로 되어 있다.

잠이 들어야 꿈을 꾸는 것인데, ‘꿈을 꾸다 잠이 들면’이라는 말도 상식에 어긋나는 말이다. 시인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른다. ‘잔 술값을 받아들고 헤아리는 꿈을 꾸다가 잠이 든다. 꿈을 꾼다는 것은 생각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생각을 여기에서 꿈꾸다고 한다면 적절한 표현이 되지 않을 뿐만아니라 뒤에 오는 잠이들다와 결합하면 더욱 말이 안 된다.

 

그네들 잔 술값을

받아들고 헤아리는

꿈을 꾸다 /잠이 들면

통사적으로는 이렇게 두 구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되어도 구가 둘째 음보(가운데 음보)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셋째 음보에서 끊어지고 있어 시조 형식이 아니다.

이렇게 보더라도 ‘한 달 내 땀 흘려도’와 ‘잠이 들면’은 호응이 되지 않는다. ‘땀 흘려도’는 문맥으로 보면 결국 ‘땀 흘려서’이다. 이렇게 보더라도 초장의 첫째 구인 ‘한 달 내 땀흘려도’와 ‘그네들 잔 술값을’이 함께 초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겉으로 시조 형식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장’의 개념을 혼동하고 잘못 사용한 것이다.

 

시조는 정형시이다. 현대시조 역시 자유시가 아닌 정형시인 것이다. 이호우 시조에서도 파격은 많다. 그러나 장이나 구의 개념이 분명하다. 한 장의 음보도 5음보, 6음보가 많이 나타났지만 구와 장이 개념만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현대시조』103호(2009년 겨울호)에서는 이 밖에도 형식상 문제점이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시조는 정형시이기 때문에 내용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형식이 되지 않으면 시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정형시를 쓰는 시조시인들이 운명이다. 물론  새로운 형을 개척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조라는 명칭이 아닌 다른 이름일 경우에 가능하다. 정형시는 개인이 주관적으로 사용하는 형식이 아니다. 이것은 상식이다.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사용하고 인정한 그릇이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통설에는 고려 중엽에 발생하였다고 하지 않은가. 고려 시대에는 물론 고려 가요가 있었다. 흔히 속요라는 것이 있었다.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진 형태는 없다. 그런 문화는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3. 구

하늘이/ 별들을/ 가득이고/ 살 듯이

-안영준,「과제」, 두 수 중 둘째 수 초장『현대시조』103호(2009년 겨울호)

 

위 시를 읽어보면 4음보로 되어 있어 정격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용 상으로

‘하늘이/ 별들을 가득이고 살 듯이’로 나눌 수 있다. 즉 첫 음보에서 구가 나누진다는 말이다.

‘별들을 가득이고’도 ‘별들을 가득 이고’로 띄어쓰기 해야 할 것이다. 한 작품 내에서 다른 것은 띄어쓰기 했는데 이곳만은 붙여쓴다는 것은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안 된다.

현대시조를 쓰는 사람들 중에는 이와 같이 구가 잘못된 것은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이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시조의 장점인 정형시의 음악성이 저해되는 것이다. 현대시는 읽는 것으로 음악성을 없애는 것이 현대시조의 작품성을 살리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시조든 자유시이든 시가 산문과 다른 특징이 바로 압축성이요 음악성이기 때문이다.

 

 

 

4. 제멋대로 형(자유시형)

시조가 아닌 자유시를 시조라고 발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정형시의 형식을 바꾸어 놓고 주관적으로 시조라고 해서는 안 된다. 언어도 약속이 되어 있듯이 밥을 보고 혼자 법이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혼란할 뿐만 아니라 의사 소통도 제대로 안 된다.

특히 정형시인 시조를 제멋대로 창안한다면 시조단을 떠나서 혼자서 방안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까지는 알 수도 없고 말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남들 앞에 버젓이 발표한다면 시조단에서는 암이 될 뿐이다.

 

무릎이 시리도록

기도하는 사람아

 

내 어이 예수님을

동경하고 기도 하는가

 

하느님

굽어 살피소서

 

자기의 소원 빌겠다고

무릎이 닳도록

 

그렇게 기도하면

무슨 일이 이룰지니

 

굽어 살펴 영화로다

-박규해, 「기도」, 전문『 현대시조』103호(2009년 겨울호)

설명이 필요 없다. 자유시인 것이다. 어떻게 해서 시조라는 이름으로 이런 작품들을 실어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2010. 1.24)

 

 

철심을 심장에 박고 선 비닐하우스

시도 때도 없이 물을  뿜는 고무호스

조가비 껍데기 같은 이름 속에 갇히는 땅

  -서연정, '밭' 넷 수 중 첫째 수, 『시조21』2007,상반기호.

 

철심을 /심장에 박고 선 /비닐하우스

시도 때도 없이 /물을  뿜는 /고무호스

조가비 /껍데기 같은 이름 속에/ 갇히는 땅

 

3음보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철심을 /심장에 /박고 선 /비닐하우스

시도 때도/ 없이 /물을  뿜는 /고무호스

조가비 /껍데기 같은/ 이름 속에/ 갇히는 땅

 

4음보로 읽어보면 시조와는 전혀 다른 운율이 되고 만다.  구는 초, 중, 종장 모두 셋째 음보에서 끊어지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파격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음보에서 구를 끊어서 읽어보면 통사적 의미와는 다른 것이 된다.

결국 위 작품은 파격을 넘어서서 제멋대로형인 것이다. 글자수만 시조 비슷하게 나열하였을 뿐이다.

시조시인들이 시조가 아닌 것을 시조라고  우길 바에야 조지훈의 승무 등은 자유시가 아니라 시조라고 우기는 것이 옳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