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자료

독서자료집2(독서의 뗏목을 타고(2)

가산바위 2013. 12. 13. 12:15

 

2012-독서자료(2)-수정본.hwp

2012학년도

사제동행 독서동아리(여울) 독서자료

 

 

 

 

 

독서의 뗏목을 타고

 

 

 

 

(2)

 

 

 

 

 

 

 

 

 

 

 

 

 

 

 

 

 

 

사교육절감형창의경영학교

 

 

사 곡 고 등 학 교

 

http://www.sagok.hs.kr

 

 

 

 

 

차 례

 

 

 

1. 시(1)-가 보지 못한 길/ 로버트 리 프로스트/천승걸 옮김1

2. 시(2)-애너벨 리/ 애드거 A.포 2

3. 생각은 크게 하고 실천은 작은 것부터3

4. 인생/사랑/깊은 기도4

5. 내 마음의 모습5

6. 사랑은 기술(1)6

7. 사랑은 기술(2)8

8. 사랑은 기술(3)11

9. 표해록』의 저자 최부 /조영록 14

10. 표해록(1)16

11. 표해록(2)18

12. 표해록(3)20

13. 표해록(4)23

14. 표해록(5)27

15. 연오랑 세오녀30

16. 만파식적(萬波息笛)31

17. 손순이 아이를 묻다(흥덕왕 대)33

18. 포산의 두 거룩한 승려34

19. 사복이 말을 못하다36

20. 성공한 사람들의 10가지 공통점37

21. 격몽요결의 구용(九容)과 구사(九思)38

22. 향랑 노래비40

23. 세로토닌하라41

24.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1)/한비야 43

25.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2)/한비야 45

26.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3)/한비야 46

27.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4)/한비야 47

28.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5)/한비야 48

29.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6)/한비야 50

30. 말이 없으면 닭이나 타고 가지51

31. 책만 보는 바보(1)-나는 책만 보는 바보53

32. 책만 보는 바보(2)-가난한 날 나의 독서법55

33. 책만 보는 바보(3) -선입견을 버려라57

34. 책만 보는 바보(4) -내가 있을 자리59

35. 책만 보는 바보(5)-백탑 아래 맺은 인연61

36. 책만 보는 바보(6)-어찌 눈으로만 책을 읽는다고 하는가63

37. 책만 보는 바보(7)-운명, 나라고 마음대로 하지 못할까66

38. 책만 보는 바보(8)-서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벗68

39. 장길산(12권)-귀면69

40. 천국의 열쇠-치셤 신부72

41. 박제가의 북학의(1)73

42. 박제가의 북학의(2)75

43. 박제가 북학의(3)78

44. 박제가 북학의(4)-1만리나 되는 길을79

45. 박제가 북학의(5)-소[牛]80

46. 박제가 북학의(6)-통역[譯]81

47. 박제가 북학의(7)-거름[糞]82

48. 박제가 북학의(8)-과거론(科擧論)83

49. 박제가 북학의(9)-가난 구제84

50. 박제가 북학의(10)-나라의 좀벌레85

51. 박제가 북학의(11)-사치와 검소86

52.오만과 편견-마지막 수업87

53. 카멜레온(체홉)88

54. 열하일기(1)89

55. 열하일기(2)-범의 꾸중(虎叱)92

56. 열하일기(3)99

57. 열하일기(4)101

58. 『1984』(조지 오웰)104

59. 과연 농약을 사용해야 하는가106

60. 왕랑과 공명의 설전108

61. 생각의 지도(1)-생태 환경이 경제․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110

62. 생각의 지도(2)-인권 문제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차이111

63. 생각의 지도(3)-개인의 ‘관계’를 중시했던 고대 중국①112

64. 생각의 지도(4)-개인의 ‘관계’를 중시했던 고대 중국②113

65. 생각의 지도(5)-중국과 그리스의 과학과 수학114

66. 생각의 지도(6)-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자기 개념115

67. 시경(詩經)116

68. 관저(關雎)117

69. 동화(1)-가장 아름다운 꽃/ 정호승118

70. 동화(2)-기다림/ 정호승119

71. 동화(3)-기다림/ 정호승119

72. 우문현답(1) 실행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것이 없다 120

73. 우문현답(2) 내 삶의 이야기꾼은 나120

74. 우문현답(3) 자신감을 매일 축적하라120

75. 우문현답(4)-매일 좋은 습관을 가꾸어가라121

76. 우문현답(5)-스트레스는 자연의 계획이다121

77. 우문현답(6)-편하게 살고 싶으세요?121

78. 우문현답(7)-삶이란 원래 불공평하다122

79. 우문현답(8)-책을 가까이 하면 외롭지 않다122

80. 우문현답(9)-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라122

81. 우문현답(10)-혼자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라123

82. 우문현답(11)-잠재력을 열어주는 열쇠123

83. 우문현답(12)-감사는 행복의 열쇠123

84. 꽃보고 춤추는 나비와 /송이124

85. 오늘도 좋은 날이요 / 실명씨125

86. 반중 조흥감이 / 박인로126

87. 칼의 노래-밥/김훈127

88. 칼의 노래-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김훈128

89. 이삭줍기(1)129

90. 이삭줍기(2)130

91. 이삭줍기(3)131

92. 현대시조(1) 바람의 뼈-불일암 / 유선철132

93. 현대시조(2) -꺾이는 소리 / 김우연133

94. ‘흴링’은 장삿속이다 / 양선희134

95. 아시아 속의 일본 -이케다 다이사쿠135

96. 토황소격문 / 최치원136

97. 가야를 지도에 되살려내자/ 존 카터 코벨137

98. 생각한다는 것 / 고병권138

99. 1천년이 넘는 단군 수명의 비밀139

100. 단군신화 / 제왕운기(帝王韻紀) -이승휴

 

 

 

 

 

 

 

 

 

 

 

 

 

 

 

 

 

 

 

 

 

 

 

 

 

 

 

 

 

 

 

1. 시(1)-가 보지 못한 길/ 로버트 리 프로스트/천승걸 옮김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 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더 나은 듯도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비슷했지만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덮여 있었습니다.

먼저 길은 다른 날로 미루리라 생각했습니다.

 

먼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 놓은 것입니다.”라고.

 

* 로버트 리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 미국의 시인.

* 주제 : 택하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김윤식 4인, 『고등학교 문학Ⅱ』, 천재교육, 182~183쪽.

 

 

 

 

 

 

 

 

2. 시(2)-애너벨 리/ 애드거 A.포

 

퍽이나 오래된 이야깁니다. /바닷가의 한 왕국에

혹여나 여러분도 아실지 모를

애너벨 리라는 한 아가씨가 살았답니다.

날 사랑하고 내 사랑받는 것밖에는 / 다른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아가씨.

바닷가의 이 왕국에

그 애도 어린아이 나도 어린애.

하지만 우리는 사랑보다 더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했지요, 나와 애너벨 리는

하늘의 날개 돋친 천사님들도

우리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바로 바로 그 때문, 그 옛날에

바닷가 이 왕국에서

오밤중 구름에서 바람이 불어 닥쳐

나의 애너벨 리를 냉기로 휩싼 것은.

그래서 그녀의 대갓집 친척들이

그녀를 내게서 앗아가 버렸지요.

그리곤 바닷가 이 왕국의

무덤 속에 그 애를 가뒀답니다.

천국에서 절반도 행복하지 못한 천사들이,

그 애와 나를 시기하게 된 거지요.

맞아요! 바로 그 때문에 / (바닷가 이 왕국에선 누구나 다 알아요.)

구름에서 바람이 불어 닥쳐

내 애너벨 리를 차디차게 죽였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나이 먹은 어른들, 똑똑한 어른들의 사랑보다도

훨씬 훨씬 강했어요.

저 하늘 위 천사들도 바다 밑 물귀신도 / 어여쁜 애너벨 리의 영혼과

내 영혼을 떼 놓았답니다.

달만 뜨면 언제나 찾아드는 / 어여쁜 애너벨 리의 꿈

별만 뜨면 언제나 눈에 선한 / 애너벨리의 빛나는 눈동자

그래서 밤새도록 나의 애인, 나의 사랑, / 나의 목숨, 나의 색시 옆에 누워 있어요.

바닷가의 그 애 무덤 속에서,

바닷가의 그 애 잠자리에서.

* 주제 :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

3. 생각은 크게 하고 실천은 작은 것부터

 

생각은 크게 하고

실천은 작은 것부터 하십시오.

왜냐하면, 작은 생활의 변화에서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인연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인연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를 잘하고 싶으세요?

신문에 있는 오늘의 생활영어부터 외우세요.

건강을 챙기고 싶으세요?

잠을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주무세요.

살 빼고 싶으세요?

오늘부터 밤참 금지입니다.

중요한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하나요?

그러면 컴퓨터 방 청소부터 하세요.

 

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말을 만들고,

어떤 말을 하는가가 행동이 되며,

반복된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그게 바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어떤 생각을 일으키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이란 놈은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전 우주를 막아버릴 수도 있어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처음 일어난 한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그 첫 생각을 잘 단속하면 큰 재앙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틀린 말보다는 옳은 말을 듣기를 원하고

옳은 말보다는 진심이 들어간 말을 더 듣기를 원하며

진심이 들어간 말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도와주는 행동을 더 원합니다.

 

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쌤앤 파커스, 2012, 134~135.

4. 인생/사랑/깊은 기도

 

인생은 정해진 멜로디가 없는

즉흥 재즈 음악과도 같습니다.

삶 속의 변수를 내가 조정할 수 없고,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의 스타일을 찾아 내 음악을 만들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31쪽)

 

사랑은

같이 있어 주는 것.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를 믿어주는 것.

사랑하는 그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없는 것.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

그를 지켜봐주는 것. (164쪽)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너무 오랜 시간 착 달라붙어 있으면

힘들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사랑을 할 때는

같은 지붕을 떠받치는,

하지만 간격이 있는 두 기둥처럼 하세요.(169쪽)

 

내 의식은 무의식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릅니다.

의식으로는 이것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막상 하거나 얻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내 무의식의 소리를 듣고 싶을 땐 기도를 하세요.

깊은 기도는 내 무의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특별한 통로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돈과 권력, 명예를 원하지만

우리의 깊은 무의식은 나 자신을 초월하는 사랑,

합일, 공감, 소통, 유머, 아름다움, 신성함, 고요를 원합니다.(198쪽)

 

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쌤앤 파커스, 2012.

5. 내 마음의 모습

 

사람들의 의식은 보통 외부로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밖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지요.

반대로 수행자는 그 의식을 마음 안으로 돌려서

평생 남 이야기를 하던 버릇을 고쳐

내 마음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을 알아채려 합니다.(192쪽)

 

사람들은 대개 말을 듣는 것보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해요.

상대가 나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게 하는 방법은

좋은 질문을 많이 해서 상대가 말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유도한 후, 그 사람 말에 즐겁게 맞장구를 쳐주면 됩니다.

사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230쪽)

 

멈추면 비로소 보여요.

 

내 생각이

내 아픔이

내 관계가

 

멈추면서 그것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것들에 휩쓸려 살아야 했던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잘 보여요.

 

그리고 멈추면 내 주변이 또 비로소 보여요.

나를 항상 도와주는 가족과 동료들의 얼굴들

매일 지나치지만 볼 수 없었던 거리의 풍경들

들어도 잘 들리지 않았던 상대방의 이야기들

 

내가 지금 하는 것을 잠시 쉬면

내 안팎의 전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요.(286쪽)

 

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쌤앤 파커스, 2012.

6. 사랑은 기술(1)

 

제1장 사랑은 기술인가?

 

1.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이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아니면 사랑은 우연히 경험하게 되는, 즉 행운(幸運)만 있으면 ‘빠져들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작은 책에서는 사랑은 기술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 수많은 영화를 관람하고, 사랑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같은 특이한 태도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 전제들은 단독으로 또는 결합해서 그 태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여기기보다는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남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성공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지위가 지니는 사회적인 한계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자신의 몸매를 가꾼다거나 옷치장을 하는 등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녀 모두 사용하는 방법은 유쾌한 태도, 흥미 있는 대화술(對話術)을 익히고 유능하며 겸손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은 결국 성공하기 위해, 즉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行使)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과 비슷하다. 사실 우리 문화권 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기와 성적 매력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태도의 배경에 깔려 있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오히려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대상을 찾는 일이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근대 사회의 발전에 근거를 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9~10쪽)

 

 

2. 사랑에 대해서 배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세 번째 오류는,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다’는 영속적인 상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 우리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서로 전혀 모르고 지냈던 두 사람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합일(合一)의 순간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흥미 있는 경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특히 고립되어 사랑 없이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멋지고 기적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특히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주도되고 이와 결합될 때 더욱 촉진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사랑은 그 성격상 지속적이지 못하다. 두 사람이 점차 친숙해지면 그들의 친밀감이 지녔던 기적적인 성격은 서서히 잃게 되고, 마침내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실망감, 그리고 권태감으로 인해서 최초의 흥분은 흔적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심취, 즉 서로에게 ‘미쳐 있다’는 것을 그들은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증거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는, 그렇지 않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라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다. 사랑처럼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없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다른 활동이었다면,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를 배우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활동을 포기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삶이 하나의 기술이듯이 사랑도 기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려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기술, 즉 음악이나 그림, 건축, 의학이나 공학의 기술을 배우고자 할 때 시작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밟아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기술을 배우는 데 있어서 거쳐할 단계는 무엇인가?

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편의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이고, 둘째는 실천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만일 내가 의학기술(醫學技術)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인체에 대한 지식과 여러 질병에 대한 사살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러한 이론적 지식에 통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의학 기술에는 숙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내가 가진 이론적 지식과 실천의 결과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즉 그 두 가지가 모든 기술 습득의 원천인 직관(直觀)으로 될 때까지 상당한 정도의 실천을 쌓은 후에라야 비로소 나는 의학에 있어서 대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익히는 것 외에도 어떤 기술에 있어서 대가가 되는 데는 또 한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즉 기술 습득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사랑뿐만 아니라 음악, 의학, 건축에도 해당된다.

우리 문화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실패하면서도 왜 이러한 기술을 배우려 들지 않는가에 대한 해답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그렇게 갈망하면서도 사랑보다는 성공․ 권위․ 돈․ 권력 등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모든 정력을 사용하고 있다.

돈이나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만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면, 오직 영혼에만 유익하고 현대적인 의미에서 볼 때 아무런 이익도 없는 사랑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는 사치에 불과할 것일까?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든 앞으로는 사랑의 기술을 이미 앞에서 구분해 놓은 대로 살펴볼 것이다.(12~15쪽)

 

에리히 프롬/설상태 옮김,『사랑의 기술』, 청목, 2001.

7. 사랑은 기술(2)

 

제2장 사랑에 관한 이론

 

3. 동물에서도 사랑이라든지 혹은 이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지만, 동물의 애착이란 동물이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장치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본능적 장치의 극히 일부만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은 것은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본능적인 적응의 세계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결코 떠날 수 없고 비록 일부분일지라도 그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일단 자연과 결별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즉 자연과 원시적 합일 상태인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아무리 되돌아가려고 해도 불같이 훨훨 타오르는 칼을 가진 케루빔 천사가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인간은 이미 잃어버린 전인간적인 조화 대신에 자신의 이성을 발달시키고 새로운 조화, 즉 인간적인 조화를 찾음으로써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경험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확실히 그것은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을 사용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무력함을 의미하며 이 세계, 즉 사물과 인간을 능동적으로 파악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이 세계에 대해 반응하지 못한 채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근원이다. 그것을 넘어서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유발시킨다. 분리된 상태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타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이는 아담이 이브를 보호하려 하기보다는 그녀를 꾸짖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 사실에 의해서도 아주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사라에 의해서 다시 결합되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수치심의 원인인 동시에 죄책감과 불안의 근원이다.

인류도 유아기에는 자연과 일체감을 느낀다. 대지와 동물, 그리고 식물은 아직도 인간의 세계이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이것은 동물의 머리 모양을 한 가면을 쓴다거나, 토템(totem)으로 삼고 있는 동물이나 동물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인류가 이런 원시적인 유대 관계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인류는 자신을 자연 세계와 분리시키게 되고, 분리를 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요구는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잔뜩 마시고 떠드는 상태’가 있다. 이런 상태는 때로 마약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저절로 유발되는 황홀경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원시 부족들의 종교 의식의 대부분은 이러한 형태의 해결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보여 준다. 황홀경으로 빠져드는 상태에서 외부 세계는 사라지게 되고 더불어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도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의식들은 공동으로 행해지므로 집단과의 융합이라는 경험이 강화되어 이 해결 방법을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만든다.

또한 현대 서구 사회에서도 집단과의 합일은 분리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널리 사용된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自我)가 대부분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이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고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하는 감정이나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관습, 의복, 사상 등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구제된다. 즉 고독이라는 무시무시한 경험으로부터 구제되는 것이다. 독재적인 체제는 이러한 일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위협과 공포를 이용하며 민주주의 국가는 암시와 선전을 이용한다.(19~26쪽에서 발췌 편집함)

4.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일치하려는 욕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의견에 도달했으며, 어쩌다 우연히 자신의 생각이 대다수의 생각과 같아졌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사람과의 의견 일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충족된다.

즉 손가방이나 스웨터에 새겨진 첫머리 글자, 은행 출납 계원의 명찰, 공화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소속해 있다는 것 등이 개인차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데도 ‘이것은 다르다’라는 슬로건은 달라지고자 하는 애처로운 욕구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차이를 없애려는 경향이 강한 것은, 가장 발달된 산업 사회에서 발전하고 있는 평등(平等)의 개념과 경험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평등(平等)이란, 우리들은 모두 신의 자식이며 우리들은 모두 사람으로서 신성한 자질을 나누어 가졌으며 우리들은 모두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개인 간의 차이는 서로 존중받아야 하며 우리가 모두 하나이지만 우리들 개개인은 독특한 실재이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조화로운 우주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한 개인의 특이성에 대한 확신은《탈무드》에도 표현되어 있다. ‘누구든지 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전 세계를 구하는 것과 같고, 한 생명을 파괴하는 사람은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개성 발달을 위한 조선으로서의 평등은 또한 서구 계몽주의 철학의 평등 개념의 의미이기도 했다. 칸트에 의해 매우 명학하게 설명된 그 평등 개념은 인간은 타인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그들이 목적인 한에서만 동등하며 서로에게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계몽 철학의 사상을 따라, 여러 학파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평등을 착취의 폐지, 즉 그 이용이 잔인한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을 폐지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현대 자본의의 사회에 있어서 평등의 의미는 계속 변화해 왔다. 이 사회에서 말하는 평등이란 자동 인형의 평등, 즉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평등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동일성’을 의미한다. 즉 평등은 추상적인 동일성, 곧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생각을 갖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시대의 진보의 징표라고 찬양되어지는 몇 가지 업적들, 예를 들면 남녀(男女) 평등 같은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가 남녀 평등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평등을 얻으려는 경향에 긍정적인 측면으로 인해 기만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이를 없애고자 하는 경향의 일부이다. 여성은 이제 더 이상 다르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것, 그것을 근거로 해서 남녀 평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신에는 성(性)이 없다’라는 계몽 철학의 명제는 이제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다. 성의 양극성(兩極性)은 사라지고 그 양극성에 바탕을 둔 성적인 사랑도 사라지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으로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개성화되지 않은 평등의 이상을 가르친다. 왜냐 하면 현대 사회는 인간들이 대집단 속에서 자신의 기능을 원활하게 아무런 마찰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그것도 그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두 같은 명령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原子的人間)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의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상품의 표준화가 필요한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있고 이 표준화가 ‘평등’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27~29쪽)

 

에리히 프롬/설상태 옮김,『사랑의 기술』, 청목, 2001.

 

 

 

 

 

 

 

 

 

 

 

 

 

 

 

 

 

 

 

 

 

 

8. 사랑은 기술(3)

 

제2장 사랑에 관한 이론

 

5. 합일을 얻는 세 번째의 방법은 ‘창조적인 활동’이다. 비록 그것이 예술가의 활동이든 숙련된 장인(匠人)의 활동이든 어떤 종류의 창조적 활동이든 간에 창조적인 사람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나타나는 자료와 결합한다. 목수가 탁자를 만들든 금세공이 보석을 다듬든 농부가 곡식을 재배하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든 간에,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자신을 세계와 결합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생산적인 작업에만 적용된다. 즉 내가 계획하고 내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무원의 작업 과정에서는 작업의 이러한 합일적 성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일하는 사람은 기계 혹은 관료 조직의 부속물이 되었다. 그는 이미 자신임을 포기하였고 따라서 일치에 의한 수준을 넘는 합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생산적인 작업에서 이루어진 합일은 인간 상호간에 관계 되는 것이 아니다. 황홀경 속에서 이루어진 합일은 일시적이며 일치에 의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실존(實存)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해답에 불과하다. 완전한 해답은 인간 상호 간의 합일과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의 성취인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융합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가장 강렬한 갈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며, 인류와 집단, 가족과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발광이나 파괴(자신의 파괴 혹은 타인의 파괴)를 의미한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人間性)은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인간 상호간의 합일의 성취를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심각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융합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으며 그 방법들 사이의 차이점은 사라의 제 양식의 공통점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러한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혹은 ‘사랑’이란 말을 오직 특별한 형태의 합일, 즉 지난 4천년 동안 동양과 서양의 역사에서 나타난 모든 위대한 인본주의적 종교와 철학 체계에서 이상적인 덕(德)으로 여겨졌던 합일에만 사용해야 하는가?

대답은 어차피 임의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언급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인간 조재의 문제에 관한 신중한 대답으로써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고 불리는 미성숙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는 전자의 경우만을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다.(30~32쪽)

 

6. 공서적 합일과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즉 인간이 타인과 분리되는 벽을 허물어 버리고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독감과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며 동시에 각자에게 자신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고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남는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활동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활동’이란 말이 지니고 있는 모호성 때문에 생기는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활동’이란 말은 현대적인 의미로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기존의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업을 하거나 의학을 공부하거나 작업장에서 끊임없이 일을 하거나 탁자를 만들거나 스포츠에 종사하는 사람은 활동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 모든 활동에 공통되는 것은 그들이 성취해야 하는 외부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되지 않는 것은 활동의 ‘동기’이다. 심한 불안감과 고독감에 의해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 혹은 야망이나 돈에 대한 욕심에 의해 일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그 사람은 열정의 노예이며 그의 활동은 쫓기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수동적이다. 그는 행위자가 아니라 수난자(受難者)이다.

한편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세계와의 일체성(一體性)을 경험하는 것 외에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 없이 그냥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사람은 ‘수동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집중적 명상은 최고의 활동이며 내적 자유와 독립의 상황에서만 행할 수 있는 영혼의 활동이다.

활동에 대한 한 가지 개념, 즉 근대적 개념은, 외부의 변화가 일어났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의 내재적인 힘의 사용을 강조한다. 이 개념은 스피노자에 의해 가장 분명하게 형성되었다.

그는 감정을 능동적인 감정과 수동적인 감정, 즉 ‘행위’와 ‘열정’으로 구분한다. 능동적인 감정을 행사하는 인간은 자유롭고 자신의 감정을 지배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감정이 나타날 때 인간은 충동을 느끼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동기에 좌우되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덕과 힘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명제에 도달한다.

시기와 질투와 야망 등 모든 종류의 욕심은 열정이다. 하지만 사랑은 행위이며 오직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해질 수 있고 억압의 결과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인간의 힘의 행사이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인 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주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애매하고 복잡한 것이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생각은, 주는 것이란 뭔가를 포기하는 것과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저장하는 것을 지향햐는 단계를 넘어설 만큼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준다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市場型)의 성격은 오직 받는 것에 대한 교환으로서만 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받지 않고 주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은 준다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주기를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규범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보다 박탈당하는 것을 참아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은 주는 것에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나는 나의 힘과 부(富)와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高揚)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는 것은 나를 환희로 가득 채워 준다. 나는 자신을, 충만 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왜냐 하면 주는 것은 박탈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서 나의 생동감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34~37쪽)

 

7. 그러나 주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면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과 그가 지닌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준다. 물론 이 말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을 준다. 이것들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의 표현이며 명시이다. 따라서 그는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부유하게 하며, 자신의 생동감을 강화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강화한다.

그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기쁨이다. 하지만 주는 것을 통해서 그는 타인의 삶에 뭔가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렇게 가져온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진실로 주게 될 때 그는 그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는 것은 타인을 역시 주는 사람으로 만들며, 그들은 서로의 삶에 가져온 것을 함께 즐기게 된다. 주는 행위 속에서 뭔가 탄생하며 관계된 두 사람은 새로 태어난 생명에 감사하게 된다. 특히 이를 사랑과 관련지어 보면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무능력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8~39쪽)

 

에리히 프롬/설상태 옮김,『사랑의 기술』, 청목, 2001.

 

 

 

 

 

 

 

 

 

 

 

 

 

9.『표해록』의 저자 최부 /조영록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동양사학)

 

조선 성종 연간에 관인 최부(崔溥) 일행이 제주도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절강성 영파부(寧波府) 연해에 도착했다. 최부 일행은 왜구라는 혐의를 받고 고초를 당한다. 그러나 곧 혐의를 벗고 중국 군리(軍吏)의 호송을 받으며 항주(杭州)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른다.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상사를 하사받은 후 요동 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돌아온다. 약 6개월간의 견문기를 일기체로 써서 임금에게 바치니, 이 기록이 바로『표해록』이다.

최부의 본관은 탐진(耽津)으로 나주에 살았으며,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진사 택(澤, ?~1488)과 여양(驪陽) 진씨(陳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조선조 사림의 종장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명망을 얻었다. 그는 성종 8년(1477) 24세의 나이로 진사에 합격하여 바로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29세가 되는 성종 13년에는 친시문과의 을과에 급제한 뒤 교서관 저작과 박사를 거쳐 군자감 주부와 수찬 등을 역임했다.

성종 17년에는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는데, 당시 8명의 급제자 중 점필재 문하의 동문으로 신종호와 표연수, 김일손 등이 있었다. 그후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을 거쳐 성종 18년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승진되었다. 바로 그해 11월에 제주 3읍 추쇄경차관으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했으나, 다음해 정월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 나주로 돌아오다가 태풍을 만나 중국 절강(浙江) 연해 지역으로 표류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6월 18일 청파역에서 국왕의 명에 따라 표류할 때부터 귀국까지 견문사실을 써서 바쳤다. 이 일을 끝내고 고종으로부터 부의로 포 50필과 마필을 지급받아 곧장 나주로 내려갔다. 상을 당한 지 반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집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상중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게 되었다. 만 4년 동안 부모상을 치르고 나서 성종 23년(1492)에 상경하여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성종이 금남에게 내린 벼슬은 사헌부 지평이었다. 그러나 그가 임용된 지 한 달여가 지나도록 사간원에서 동의해주지 않아 정식 임용이 보류되고 있었다. 대간은 4년 전에 그가 중국에서 돌아와 상주된 몸으로 견문기를 쓴 것이 명교(名敎)에 어긋나는 행위였다며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종은 견문기를 쓴 것은 자기가 시켜서 한 일이므로,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금남을 두둔했다.

사실 최부보다 5년(성종 14년 2월) 먼저 제주도 정의현감 이섬(李暹)이 중국 양주 지역으로 표류했던 내용을 「행록」으로 적어 올린 일이 있다. 이때에도 대간의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은 가자(加資)하여 승진시켰다. 이섬은 일개 무신인 데 반해, 최부는 문신일 뿐만 아니라 견문기 내용도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성종이 금남을 옹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종은 1년 후에 그를 홍문관 교리로 교체 임명했다. 하지만 재차 대간이 그 직책이 경연관이 된다는 점을 문제 삼았으므로 시비가 재연되었다. 이번에는 육조와 홍문관 쪽에서 금남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두둔하고 나섰다. 금남이 저술한 것은 왕명에 따른 것이며, 또한 부모상을 치르면서 여묘(廬墓)살이를 할 만큼 효를 다했다고 비호했다. 이와 같이 문제가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나, 성종 24년 5월 승문원 교리로 고쳐 임명함으로써 시비가 일단락되었다. 그후 그는 다시 홍문관 교리로 돌아왔으며, 이어 부응교와 예문관 응교를 겸했다. 성종의 금남에 대한 신임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 3년에는 중국을 다녀온 지 10년 만에 정절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처럼『표해록』을 저술한 일로 잠시 파란을 겪은 금남의 벼슬길은 순조로웠으나, 사람파와 훈구파의 갈등으로 벌어진 사화의 혹독한 정치파동을 겪게 되면서 파탄의 길을 걷게 된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즉위한 연산군은 유교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를 당해서는 동문의 김굉필, 박한주 등과 함께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난했다는 죄목으로 장 80대에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연산군 10년에는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처음에는 장 100대에 거제로 귀양보내며, 노(奴)로 삼는다는 처벌이 내려졌지만 결국 참형을 면치 못했다. 그는 처형장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이 담담히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사관은 왕조실록에서 “부는 공렴정직하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했으며, 문사(文詞)에 능했다. 간관이 되어서는 아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었으며,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고 묘사했다.

금남의 묘소는 전남 무안군 몽탄면(이산2리 느러지마을)에 있으며, 생가지는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기촌이다. 최근 중국 절강성 영해현 월계촌에 현지의 행정 당국과 최문 문중의 협조로 「최부표류사적비」가 세워졌다.

금남은 해남 정씨와의 사이에 딸 셋을 두었다. 장녀는 유계린(柳桂隣), 차녀는 나질(羅晊), 삼녀는 김분(金雰)에게 각각 출가했으며, 함양 박씨와의 사이에 서자 적(適)을 두었다. 『표해록』을 간행하고 발문을 쓴 유희춘은 그의 외손이다.

 

 

 

 

 

 

 

 

 

10. 표해록(1)

 

[윤1월 초4일] 대양으로 표류해 들어가다.

 

이날은 우박과 대풍이 불어 크고 무서운 파도와 풍랑이 일었는데, 하늘 높이 치솟고 바다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돛자리가 모두 파손되었다. 배에는 두 개의 높고 큰 돛대가 있어서 더욱 기울어지고 구부러지기 쉬웠으며, 형세가 곧 내리덮을 것 같아 초근보(肖斤寶)에게 명하여 도끼를 가지고 그것을 제거하게 했고, 고이복(高以福)에게는 풀섶을 묶어 고물에 붙여 파도를 막게 했다.

정오가 되어 비가 점차 개었으나, 동풍이 크게 불어 배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하여, 가는 바대로 맡기니 순식간에 서해로 들어갔다.

키를 잡은 사람이 동북쪽 멀리 아득하게 한 점의 탄환과 같은 섬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마 흑산도(黑山島)인 듯합니다. 이곳을 지나가면 사방에 도서(島嶼)가 없고, 바다가 하늘과 서로 맞닿아 아득히 넓고 끝이 없는 바다뿐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배 가운데 누웠다. 나는 안의에게 군인을 감독하여 취로(取露, 바닷물을 증류시켜 식수를 받는 일)와 배를 수선하는 일 등을 시켰다.

군인 고회(高廻)라는 자가 소리 질러 말했다.

“제주의 해로는 매우 험하여 무릇 왕래하고자 하는 자는 바람을 몇 달씩 기다립니다. 전의 경차관도 저천과에 있기도 하고, 수성사에 있기도 하면서 통산 대개 3개월 정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와 바람이 안정되지 않은 때 길을 떠나 하루의 날씨도 예측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두 자초한 것입니다.”

군인 모두가 말했다.

“형세가 이미 이와 같으니 이슬을 받거나 배를 수리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도 끝내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우리가 힘을 쓰다가 죽느니보다는, 편안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군인들은 모두 귀를 가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때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송진(宋眞)은 말했다.

“이 배는 오래도 견디는구나! 거의 파손된 것 같은데 어찌 빨리 망가지지 않는가!”

정보가 말했다.

“제주사람은 마음이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하나 안으로는 독하며, 완악하고 거만하고 사나우므로 죽음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이 대체로 이렇습니다.”

나 또한 익사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하늘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 익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니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게다가 군인의 나태함에 분격에 배에 탄 사람을 점검하였다.

(중략) 나까지 합하면 모두 43명이나 되었다. (중략)

나는 군인들을 큰 소리로 불러 말했다.

“나는 초상을 당해 가는지라 조금도 머무를 수 없는 사정이었다. 더구나 어떤 사람들은 떠나기를 권하기도 했으니 자식된 자로서 잠시라도 머물 수 없었다. 너희들이 표류하게 된 것은 실로 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지만 형세가 또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너희들이 어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배가 부서지거나 혹 전복되었으면 그만이지만 배를 보건대 지금은 단단하고 견고하여 파손되지 않겠으니, 만약 바위섬을 만나지 않는다면 수리하고 물을 퍼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혹시 바라이 잦아지고 파도가 조용해진다면 계속 표류하여 다른 나라에 이르러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도 부모가 있고 처자가 있으며 형제 친척이 있어 모두 살기를 바라고 오래 살지 못할까 염려한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우리가 처한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으며 다만 나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해이해져 흩어지고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려고 하니 대단히 미련하다.”

허상리 등 10여 명이 말했다.

“군인은 모두 완고하고 둔하며 무식한 자들입니다. 때문에 그 마음 씀씀이가 통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각각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는 마땅히 힘을 다해 일에 종사하면서 죽을 때까지 힘을 쓰겠습니다.”

밤에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큰 파도가 매우 심하여 이물과 고물로 물이 빠르게 들어와 들어오는 대로 퍼냈다. 대략 2경(오후 9시~11시)쯤 대자 성난 파도가 내리치면서 멍에와 봉옥(蓬屋, 거적으로 만든 집)의 반이 잠겼고, 의복과 행장도 모두 물에 젖었다. 추위가 뼈를 에이고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나는 이정의 손을 잡고 정보의 무릎을 메고 누웠고, 김중과 손효자가 내 곁에 있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 사람이 목을 매어 죽으려고 했다. 이정이 그 결박을 풀고 보니 오산이었다. 최거이산과 막금 등이 힘을 다해 물을 퍼냈는데도 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배는 아직 튼튼하니 위에서 세게 쏟아지는 물과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물을 퍼내지 않는다면, 앉아서 침몰을 기다리는 것이고, 퍼낸다면 살 방법이 있다.”

나는 힘써 일어나 권송을 큰 소리로 부르며 부싯돌을 모아 불을 켜고는 돗자리를 말아 불을 지폈다. 또 초근보와 고복, 그리고 김고면 등을 불러 몸소 물이 새는 틈을 찾아 보수하여 막게 했다. 또한 옷을 벗어서 권산, 김고면, 최거이산, 김괴산, 허상리 등에게 나누어주면서 일하는 것을 독려했다. 정보와 김중, 그리고 손효자 등이 의복을 벗어서 군인들에게 나누어주자 김구질회, 문회, 김도종, 한매산, 현산 등이 감동을 받아 분발하여 사력을 다해 물을 퍼내니 물이 거의 없어져 배가 겨우 안전하게 되었다.

얼마를 지나지 않아 배가 바위섬에 들어가 뒤섞여 어수선한 가운데, 권산은 배를 운전했지만 어디로 몰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허상리와 김구질회는 삿대를 잡고도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다행히도 배가 천풍(天風)에 힘입어 바위섬에서 빠져나와 파손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최부 지음/서인범·주성지 옮김,『표해록』, 한길사, 2004.

 

 

11. 표해록(2)

 

[윤1월 초5일] 대양 중에 표류하다

 

이날은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로막아서 지척도 분별할 수 없었는데 저녁으로 접어들자 빗발이 삼대같이 굵어졌다.

밤이 되자 약간 그쳤으나 무섭게 밀려오는 큰 파도는 마치 산과 같아서 높을 때는 푸른 하늘로 솟는 듯했고, 낮을 때는 깊은 연못에 들어가는 듯했다. 세차게 이는 충격으로 튀어오르는 파도 소리가 천지를 찢는 듯했고, 모두 바다에 빠져 썩어서 못쓰게ㅐ 될 것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막금과 권송 등이 눈물을 훔치면서 나에게 말했다.

“형세는 이미 급박해졌으니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는 나에게 의복을 갈아입고서 죽음을 기다릴 것을 청했다.

나는 인(印)과 마패(馬牌)를 품 안에 넣고 상관(喪官)과 상복(喪服)을 갖추어 입고, 매우 두려운 마음으로 빌며 하늘에 축원했다.

“저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오직 충효우애를 마음먹었으며, 마음을 속이거나 모함이 없고, 원수나 원한을 산 적이 없고, 내 손으로 살해한 적도 없으니, 비록 하늘은 높지만 실로 굽어살피시는 바입니다. 지금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가는 중입니다. 제게 어떤 죄와 하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나 혹시 저에게 죄가 있다면, 벌이 저에게만 미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배를 같이 탄 40여 명은 죄가 없는데 바다에 빠지게 되었으니, 하늘이 어찌 불쌍히 여겨 감싸주지 않습니까? 하늘이 만약 이 궁지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면 바람을 돌려주고 파도를 그치게 하여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삶을 얻게 하여 얼마 전에 죽은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70에 가까운 저의 노모를 봉양하게 해주십시오. 다행히 또 대궐의 뜰 아래서 임금에게 예를 다한 후에 비록 만 번 죽어 살지 못한다 해도 저는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을 끝내지 않았는데 막금이 나의 몸을 감싸 안으면서 말했다.

“한 집안의 사람들이 백 년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이 한 몸에 의지하기를, 마치 열 명의 앞 못 보는 사람이 하나의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과 같이 했는데, 지금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으니 다시는 한 집안의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슴을 치고 발로 땅을 차며 통곡을 하자 배리 이하도 큰 소리로 울면서 손을 모아 하늘의 도움을 빌었다.

 

[윤1월 초6일]

 

이 날은 흐렸고 바람과 파도가 조금 그쳐 비로소 김구질회 등을 독려하여 조각난 돗자리를 수선하여 돛을 만들고 장대를 세워 돛대를 만들었다. 전에 쓰던 돛대의 밑동을 쪼개서 닻을 만들었다.

바람을 따라 서쪽으로 가는데 돌아보니 큰 물결 사이로 물체가 보였으나 그 크기를 알 수 없었다. 수면 위ㅏ로 보이는 그것은 길이가 긴 행랑 같았고 하늘로 거품을 내뿜는데, 파도가 나부끼고 물결이 일렁였다. 초공(梢工)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위를 주고 손을 흔들어 말을 못하게 했다. 배가 멀리 지나쳐 간 후에 초공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저것은 고래인데 큰 고래의 경우에는 배를 삼키고 작은 고래는 배를 뒤엎습니다. 서로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우리는 죽을 지경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밤이 되어 바람과 물결이 다시 강해져 배의 항해가 대단히 빨랐다. 안의가 말했다.

“일찍이 듣건대 바다에는 탐욕스런 용신(龍神)이 있다 하니 소지하고 있는 행장 등 물품을 던져 제사를 지냄으로써, 저희가 구원을 얻기를 청하옵니다.”

내가 그 말에 응하지 않자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사람이란 몸이 있은 후에야 물건이 있는 것입니다. 물건은 모두 몸 이외의 것입니다.”

이에 다투어 물들인 의복과 군기, 철기, 구량(口糧, 병사와 역부(役夫)에게 매월 급여애주는 식량) 등을 조사하여 모두 바다에 던졌다.

나도 그것을 막지는 못했다.

 

최부 지음/서인범·주성지 옮김,『표해록』, 한길사, 2004.

 

 

 

 

 

 

 

 

 

 

 

 

 

 

 

 

 

 

 

12. 표해록(3)

 

[윤1월 초7일] 대양 중에 표류하다

-만약 중국에 정박할 수 있다면 중국은 우리 부모의 나라다.

-바람은 동풍이 북풍으로 변했으나 권산은 오히려 키를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한밤중이 되지 않았는데 사나운 물결이 부딪치고 튀어 멍에로 넘나들고 봉옥을 넘어 사람의 머리와 얼굴을 덮어 가리나 사람들이 모두 눈을 감고 뜰 수가 없었다. 영선과 초공들이 몹시 슬피 울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도 죽음을 면할 바를 알지 못했다. 한 채의 이불을 찢어 여러 번 둘러 동여매고 횡목(橫木)에 그것을 묶어서 죽은 후에도 시신이 배와 함께 오래도록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 막금과 최거이산 모두 큰 소리로 울며 나를 부둥켜안고 말했다.

“죽어서도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안의가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

“우리 모두 짠 바닷물을 마시고 죽은 것보다 활시위로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

그러나 김율이 그를 구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나는 영선과 초공 등을 큰 소리로 불러 말했다.

“배가 이미 파손되었는가?”

“아닙니다.”

내가 다시 물었다.

“키는 잃어버렸는가?”

“아닙니다.”

나는 즉시 최거이산을 돌아보며 말했다.

“비록 큰 물결이 험하고 일의 형세가 급하지만 배는 실로 튼튼하고 단단하여 쉽게 파손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물을 거의 다 퍼낸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진실로 씩씩하고 강하니 가서 물을 퍼내는 작업을 앞장서서 독려하라.”

최거이산이 지시대로 물을 퍼내고자 했으나 물을 퍼내는 그릇이 이미 파손되었다. 큰 소리로 물 퍼낼 물건이 없다고 외치자 안의가 곧 칼로 소고(小鼓) 의 한 면을 찢어서 그릇을 만들어 최거이산에게 주었다. 최거이산과 이효지, 권송, 도종, 현산 등이 있는 힘을 다해 물을 퍼냈는데도 아직도 무릎 깊이만큼 차서 손효자 · 정보 · 이정 · 김중 등이 스스로 물을 퍼내거나, 또는 서서 군인을 독려했다. 김구질회 등7, 8명이 계속해서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니 간신히 물에 가라앉지 않았다.

 

 

 

 

[윤1월 초9일] 대양 중에 표류하다.

 

마침내 서로 마주보고 울며 말했다.

“이처럼 배를 수리하는 데 마음을 다하고 있지만, 배고픔과 목마름이 열흘 정도나 지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손발이 저리고 마비되어 몸을 보전하지 못하고 힘을 다할 수 없어 배를 수리해도 튼튼하지 못할 텐데 앞으로 어찌해야 합니까?”

이때 바다갈매기가 떼를 지어 빠르게 날아 지나갔다. 뱃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면서 말했다. (중략)

그런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다갈매기 몇 쌍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 역시 점차 섬이 가까워진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정오가 되어 남쪽을 바라보니, 구름의 기운이 진을 만들었는데, 희미하게 산 모양이 보였고, 또 인가의 연기 같은 기운이 있었다. 유구국 땅의 경계라 생각하여 가서 정박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후에 동풍이 불어 배가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밤이 되어 바람의 기세가 더욱 세차 배의 빠르기가 나는 듯 했다.

 

 

[윤1월 초10일] 대양 중에 표류하다.

이날은 비가 왔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동풍이 불었다. 오후가 되자 바다색이 청색으로 돌아왔다.

제주에서 출발할 때 뱃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해 식수를 조그마한 거룻배에 실었는데, 폭풍 후에 서로 잃어버려 다시 찾지 못했다. 배 안에는 물 받을 그릇 하나 없어, 식수(빗물)를 받지 못해 밥을 지을 수가 없어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때 권송이 나에게 고했다.

“뱃사람들을 보니 누군가가 황감(黃柑, 잘 익은 감귤)과 청주(淸酒)를 가지고 왔습니다. 제멋대로 먹으면 남는 게 없으니, 다 거두어 배 위의 창고에 보관하면 기갈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즉시 최거이산에게 명하여 선실 내 행장을 조사하여 황감 50여개와 술 두 동이를 얻었다. 그리고 손효자에게 말했다.

“같은 배에 타면 멀리 떨어진 타 지역의 사람이라도 한마음이라 하는데, 하물며 우리는 모두 한 나라 사람으로 골육의 정을 같이하니, 산다면 같이 살고 죽는다면 같이 죽게 될 것이다. 이 감귤과 술 한 방울이이말로 천금과 같으니, 자네가 그것을 관리하되 함부로 쓰지 말고 기갈이 아주 심한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하라.”

손효자가 사람을 살펴서 입술이 타고 입이 마른 사람에 한하여 고루 나누어 마시게 했으나, 단지 혀만 적시게 했을 뿐이다. 며칠 뒤 감귤과 청주조차 없어지자, 마른 쌀을 씹기도 하고 오줌을 받아 마시기도 했는데, 얼마 안 가서 오줌마저도 잦아버렸고, 가슴이 타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럴 즈음에 비가 내리자 뱃사람들 중 어떤 이는 손으로 봉옥의 처마를 들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는가 하면, 어떤 이는 갓으로 솥같이 하여 빗물을 받아 간직하고, 어떤 이는 돗자리를 접어 받쳐 들고 떨어지는 빗물을 받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돛대와 노를 세워서 종이 노끈으로 같아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았다. 작은 한 방울이라도 얻기 위해서 혀로 핥는 사람까지 있었다. 안의가 말했다.

“옷을 빗물에 적신 다음 옷을 짜 물을 마시면 실로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뱃사람들의 옷은 모두 짠 바닷물에 젖어 있기 때문에 옷에서 짜낸 물을 마실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보관해둔 옷 두서너 벌을 바로 찾아내어 최거이산에게 시켜서 옷을 비에 적신 다음 물을 짜 저장했는데, 거의 두서너 병에 달했다. 김중에게 숟가락으로 나누어 마시도록 하니, 김중이 숟가락을 들고 사람들의 입을 벌리도록 했는데, 물을 떠넣는 광경이 마치 새끼제비가 먹이를 달라는 모습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혀를 움직일 수 있고 입김을 내쉴 수도 있게 되어 좀 살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윤1월 11일] 대양 중에 표류하다.

이날은 흐렸다. 서늘한 이른 새벽 어느 섬에 도착했는데, 석벽이 산같이 우뚝 솟아서 아주 험난해 보였다. 파도는 세차게 돌무더기 위로 거의 한두 길이나 쳐 올랐다. 배는 파도를 따라 곧장 들어가는데, 상황이 돌무더기에 부딪쳐 산산조각날 정도로 급박했다. 권산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죽을 힘을 다해 배를 움직였다. 손효자와 정보 등도 몸소 돛줄을 단단히 쥐어잡고 바람과 파도의 상태를 보아 가면서 놓아주거나 잡아당기는 동안 물결은 바다를 따라 섬으로 들어가고 바람은 섬을 따라 나오는데, 배를 바람을 따라 돌아나와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 한 큰 섬에 도착했는데, 암석이 깎아 세운 듯하여 배를 댈 수가 없었다. 고이복이 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배를 끌어당겨 섬 가장자리에 대어 매놓으니 사람들이 기뻐하며 뛰어내렸다. 골짜기 물을 발견하여 떠 마시고는 물을 떠와서 밥을 지으려고 했다.

“굶주림이 극도에 이르면 오장이 붙어버리는데, 만약 갑자기 먹으면 배부른 즉시 죽음을 면치 못한다. 차라리 먼저 미음을 끓여 마신 다음 죽을 쑤어 먹는 것이 나으니 적당히 먹었을 때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내 말에 따라 사람들이 모두 죽을 끓여 먹었지만, 섬은 바람을 피할 곳이 없었으므로, 밤에 또 배를 풀어 나아갔다.

 

최부 지음/서인범·주성지 옮김,『표해록』, 한길사, 2004.

 

 

 

 

13. 표해록(4)

 

[윤1월 12일]영파부 경계에서 도적을 만나다.

이날은 조금 흐리고 비가 왔다. 바닷색은 다시 희었다. 신시(申時, 오후 3~5시경)에 커다란 섬에 이르렀는데, 그 섬의 형상이 마치 병풍 늘어선 듯했다. 멀리 바라보니 거룻배를 매단 중선(中船, 중간 정도의 배) 두 척이 곧 바로 우리 배를 향해 왔다. 정보 등이 내 앞에 꿇어앉으며 말했다.

“모든 일에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습니다. 청하컨대 상복을 벗으시고 권도로서 사모와 단령을 착용하시어 관인(官人)의 모습을 보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해적이라고 떠벌리며 모욕을 가할 것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해상에서 표류한 것도 하늘의 뜻이요, 여러 차례 사지에서 다시 살아난 것도 하늘의 뜻이다. 이 섬에 이르러 저 배를 만나는 것 또한 하늘의 뜻이다. 천리는 원래 올바르니 하늘의 뜻을 어기고 어찌 속임수를 행하겠는가?”

잠시 후 두 척의 배가 점점 가까워져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배는 10여 명이 탈 만한 크기였다. 그 배의 사람들이 모두 검은 속옷과 바지, 신발을 신고 있는데, 수건으로 머리를 싸맨 사람도 있고, 대나무 잎으로 엮은 삿갓과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도롱이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떠들썩하게 시끄러운 소리가 한어(漢語)였다. 이로 인해 그들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보에게 종이에 글을 써서 보내었다.

“조선국 최부는 왕명을 받들어 해도(海島, 제주도)에 갔다가 부친상을 때문에 급하게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어느 나라의 땅인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대답했다.

“이 곳은 대당국(大唐國) 절강의 영파부 지방이오.”

또 말했다.

“본국으로 가려 한다면 반드시 대당으로 가는 것이 좋소.”

그때 정보가 손으로 입을 가리키니, 그 사람이 민물[陸水] 두 통을 보내주고는 배를 저어 동쪽으로 갔다. 내가 배에 있는 사람에게 노를 저어 한 섬으로 들어가서 정박하도록 했다. 그곳에는 거룻배를 매단 배 한 척이 있었는데 군인 7, 8명이 타고 있었고, 의복과 언어가 앞서 본 사람들과 또 같았다.

이번에는 그들이 우리의 배로 와서 물었다.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나는 다시 정보를 보내 앞서와 같이 답하게 하고, 이어 물었다.

“이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오?”

“이곳은 바로 대당 영파부의 하산(下山)으로 바람과 물길이 좋으면 이틀이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소.”

나는 또 말했다.

“다른 나라 사람으로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다행히 대국의 경계에 이르렀으니 기쁘게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소.”

내가 또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 사람이 답했다.

“나는 대당의 임대(林大)요. 그대들이 만약 대당으로 가고자 한다면 우리가 데리고 가도록 하겠소. 그러니 그대들이 가진 보화를 우리에게 보내도록 하시오.”

나는 답했다.

“우리는 왕명을 받은 사신이지, 상인의 무리가 아니오. 또한 표류하여 떠다닌 후이니 어찌 보화가 있겠소?”

그런 뒤 곡식을 덜어 그들에게 보냈다.

그 사람이 곡식을 받고 나서 말했다.

“이 산에 배를 정박할 때 서북풍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만, 남풍은 좋지 않으니 우리를 따라 배를 정박하시오.”

그가 우리 배를 인도하여 하루 묵을 만한 섬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박할 만하구나! 정박할 만하구나!”

나 역시 일리가 있다고 여겨 그곳에 정박했다. 과연 바람이 불지 않으며, 섬 주변으로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섬의 서쪽 해안에는 두 채의 초가집이 있었는데 말린 고기를 만드는 집인 듯했다. 그 사람들은 집 아래에 배를 정박했다. 나와 일행은 오랫동안 굶주리고 목마르며, 피곤하고 잠을 못 잔 것이 극에 달했다. 음식을 얻어먹고 바람이 평온한 곳에 정박할 곳을 찾아 배를 댔다. 너무나도 피곤해서 서로 배 안에서 얽혀 잤다.

2경쯤(오후 9시~11시) 스스로 임대라고 칭하던 자가 무리 20여 명을 거느리고 왔다. 그 무리 중 어떤 이는 창을 잡고, 어떤 이는 작두를 메었으나 활은 없었다. 그들은 횃불을 들고 우리 배에 난입했다. 도적의 우두머리가 글로 써서 말했다.

“우리는 관음불로서 너희”들의 마음을 꿰뚫어본다. 그대들이 가진 금은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답했다.

“금은이란 본래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서 처음부터 가져 온 것이 없소.

도적의 우두머리가 다시 말했다.

“너희가 만약 관인이라면 어찌 가져오지 않겠는가? 우리가 찾아봐야겠다.”

원래 나와 정뵈, 이정, 김중, 효자 등은 제주가 바다 건너의 땅이어서 왕래함에 기한이 없으므로 사계절 의복을 준비하여 여러 보통이에 싸서 왕래했다. 이윽고 도적의 우두머리가 큰 소리로 무리를 불러 모아 나와 배리 등이 쌓아놓은 행장과 뱃사람들의 곡식과 물건을 수색하여 자신들 배로 실어 보냈다. 남은 것은 소금기가 흠뻑 묻은 옷과 여러 종류의 서책 같은 것뿐이었다. 도적 중에 애꾸인 자가 가장 악독했다.

정보가 나에게 말했다.

“적이 처음에 왔을 때 순순히 따르는 것같이 행동하면 우리의 기세가 약하다고 보아 더욱 큰 적이 될 것이니, 청컨대 싸움을 해서 생사를 결정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배의 사람들은 모두 배고픔과 갈증으로 기진맥진해 이미 적에게 기세를 빼앗겨버렸다. 적은 유리한 입장에 있어 방자하고 난폭한 것이다. 만약 싸움이 붙는다면 우리는 다 적의 손에 죽을 것이니, 행장을 모두 바치고 삶을 구걸함만 못하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내가 가져온 인수(印綬)와 마패를 빼앗아 소매 속에 넣었다. 정보가 그 뒤를 쫓아가 둘려줄 것을 청했으나 돌려받자 못했다.

“배 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가지고 갈 수 있으나, 인수와 마패는 곧 나라의 신표로 사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으니 나에게 돌려주시오.”

내 말을 들은 도적의 우두머리가 인수와 마패를 돌려주었다. 겨우 봉창(배의 창문)을 나선 그는 무리와 같이 뱃전에 서서 오랫동안 시끄럽게 떠들어대더니, 배 안으로 돌아와 정보의 의복을 벗기고 바닥에 눕혀 놓고 매질을 했다. 그러고는 작두로 나의 의복을 잘라서 맨몸으로 만들고 손을 등 뒤로 돌려 다리를 구부려 함께 묶고 몽둥이로 나의 왼팔을 일고여덟 대 내리치면서 말했다.

“살고 싶다면 즉시 금은을 내놓아라.”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몽둥이를 뭉개고 뼈를 부순다고 해서 금은을 얻을 수 있겠는가.”

도적이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결박을 풀며 글로 의사를 표시하도록 했다. 내가 글로 쓰니 도적의 우두머리가 노하여 눈을 부라리고 입을 씰룩이며 정보를 향해 큰 소리를 쳤다. 나를 가리키면서 소리를 지르다가, 나의 머리를 잡아끌고 다시 결박지어 거꾸로 매달았다. 작두를 메고 나의 머리를 베려 했는데, 잘못하여 오른쪽 어깨 끝을 내리쳤다. 칼날이 위쪽에서 나부꼈다. 도적이 또 작두를 들어 올려 나를 베려고 할 때, 어떤 도적이 와서 작두를 맨팔로 잡으며 저지했다. 도적의 무리가 일제히 큰 목소리로 부르짖었으나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우리 일행은 두려워하며 정신을 잃은 듯 달아나 숨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직 김중과 최거이산 등이 손을 맞잡고 엎드려 절하며 나를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갑자가 도적의 우두머리가 나의 몸을 짓밟고 우리 일행을 큰 소리로 위협했다. 그가 무리를 이끌고 떠날 때, 배 둘레에 묶인 닻줄을 끊어 바다에 던졌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배로 우리 배를 끌어 대양으로 내버린 후에 달아났다. 밤이 이미 늦었다.

 

 

[윤 1월 13일] 다시 대양에 표류하다.

 

이날은 흐리고 서북풍이 크게 일어 다시 끝없는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나와 뱃사람들이 소장했던 유의(襦衣, 동옷. 종이를 넣어 만든 것으로 병사들이 입는 옷)는 모두 도적에게 빼앗겼고, 구멍 난 옷은 오래도록 바닷물에 절었는데 하늘이 항상 흐려서 말릴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배에 실었던 식량을 도적에게 모두 빼앗겨 굶어 죽을 때가 다가왔다.

배의 닻과 노는 도적들이 바다에 던졌고 임시로 만든 돛은 바람에 파손되어, 다만 바람 따라 동서로 왔다갔다하고 물결 따라 흘러 다녔기에 사공은 힘을 쓸 수 없었고, 침몰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일행 모두 목이 메어 소리를 낼 수 없었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효지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들의 죽음은 당연한 일이지만, 경차관의 죽음은 애통할 뿐입니다.”

내가 말했다.

“너는 어찌 죽음을 당연한 일이라고 하느냐?”

“우리 제주는 멀리 큰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수로가 900여 리입니다. 파도를 다른 바다와 비교하면 매우 험악하여, 공선과 상선의 왕래가 끊이지 않지만 표류하여 침몰하는 것이 열 중에 대여섯이어서, 제주사람들은 먼저 죽지 않으면 반드시 나중에 죽습니다. 그러므로 제주에서 남자의 무덤은 아주 적고, 민간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세 배나 많습니다. 부모가 딸을 낳으면 ‘이 아이는 나에게 효도할 놈이다’라고 말하고, 아들은 낳으면 ‘이 아이는 내 아리가 아니라 고래와 악어의 먹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죽는 것은 하루살이 목숨과 같아서 비록 평상시에 살아 있지만 어떻게 자신들의 방 안에서 죽겠다는 마음을 갖겠습니까? 다만 조신(朝臣)의 왕래에는 바람을 기다리도록 권유하고, 선박이 빠르고 튼튼한 까닭에 풍파로 죽는 자가 예로부터 적었습니다. 지금 경차관의 몸인데도 우연히도 하늘이 돕지 않아서 앞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따름입니다.”

 

최부 지음/서인범·주성지 옮김,『표해록』, 한길사, 2004.

 

 

 

 

 

 

 

 

 

 

 

 

 

 

14. 표해록(5)

 

[윤1월 14일] 대양 중에 표류하다.

이날은 맑았고,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어떤 섬으로 흘러들어갔다. 동 · 서 · 남쪽의 삼면이 트여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만 북풍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를 살펴보니 닻이 없이 근심이 되었다. 제주에서 출발할 때 배가 매우 컸지만, 실을 물건이 없어 돌덩이를 배에 실어 배가 흔들리지 않게 했다. 허상리 등이 새끼를 꼬아 그 돌 4개를 같이 묶어서 임시 닻으로 삼아 정박할 수 있었다.

안의와 군인들이 서로 나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이번 행차에 표류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를 나는 안다. 자고로 제주에 가고자 하는 자는 모두 광주 무등산사(無等山祠)와 나주 금성산사(金星山祠)에서 제사를 올리고, 제주에서 육지로 나아가는 자는 또한 광양(廣壤), 차귀(遮歸), 초춘(楚春) 등의 산사에서 제사를 지낸 후에 배를 띄운다. 그로 인해 신의 도움을 받아서 큰 바다를 쉽게 건넌다. 지금 이 경차관은 특히 큰 소리로 제사지내는 것을 그릇되었다 하고, 올 때에는 무등과 금성산의 신사에서, 갈 때에도 광양 등의 여러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신을 업신여기고 공경하지 않아 신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누구의 잘못인가?”

군인들이 화답하여 모두 나의 허물이라고 했다. 권송만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전에 이곳 정의현감 이섬은 3일 동안 재를 올려 광양 등의 신에게 정성으로 제사했으나 표류하여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차관 권경우(權景祐)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왕래가 순조로워 조그만 근심도 없었다. 그렇다면 바다를 건널 것인가는 바람을 기다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을 뿐, 어찌 신에게 제사 지내고 지내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겠는가?”

나 또한 그들을 깨우치며 말했다.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으며, 귀신은 은밀히 움직여 복 · 선 · 화 ·음(福善禍淫)이 오로지 공절할 뿐이다. 사람 중에서 악한 자가 있어 거짓으로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그것으로 복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 중에 선한 자가 있어서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않고 거짓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화가 될 수 있겠는가? 천지귀신에게 음식으로 아첨을 한다고 사람에게 화복을 내리겠는가? 절대로 이런 이치는 없다. 하물며 제사를 지내는 데에도 항상 등급이 정해져 있다. 사(士)와 서인(庶人)이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고, 예에 해당되지 않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곧 음사(淫祀)다. 음사로서 복을 얻은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너의 제주사람들은 귀신을 아주 좋아하여 산택천수(山澤川藪)에 모두 신사를 만들었다. 광당당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공경히 제사를 지내는 지극함을 보여 그것으로 바다를 건널 때 표류하고 침몰하는 우환이 없도록 한다. 그러나 오늘 어떤 배가 표류하고 내일 어떤 배가 침몰하여, 표류하고 침몰하는 배가 서로 끊이지 않으니, 과연 신에게 영험함이 있다고 하겠는가? 제사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더구나 지금 나와 같은 배를 탄 사람들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너희 군인들은 모두 성심껏 제사를 지내고 왔다. 영험하다면, 어찌 내가 제사를 지내지 않은 까닭으로 너희 40여 명이 제사 지낸 정성을 폐하려 하겠느냐? 이 배의 표류는 오로지 급하게 서둘러 항해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람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제사를 폐했다고 나를 탓하니 그 또한 미혹됨이 아닌가?”

안의 등은 오히려 나의 말이 사정에 어두운 것이라 하여,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윤1월 16일]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도착하여 정박하다.

이날은 흐리고 바다는 검붉은 색이었으며 바닷속은 매우 탁했다.

서쪽을 바라보니 이어지는 봉우리가 중첩되어 하늘을 버티고 바다를 감싸고 있는데 인가에서 나는 연기인 듯했다. 동풍을 타고 가서 도착하니 바로 산 위에 봉수대(烽燧臺)가 나란히 솟은 것이 많이 보여, 다시 중국 경계에 도착한 것 같아 기뻤다.

오후에 풍랑이 더욱 위태롭고 비가 내려 어둑어둑했다. 배는 바람을 따라 내쳐졌으며, 순식간에 표류하여 두 섬 사이에 이르렀다. 해안을 지나며 보니 중선 여섯 척이 나란히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정보 등이 나에게 청하였다.

“전에 하산에 도착했을 때 관인의 의례를 보이지 않아 도적을 불러들여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권도를 따라 관복을 갖추어 저들의 배에 보이십시오.”

“너는 어찌 도리를 해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정보 등이 말했다.

“죽음에 직면한 때를 당하여 어찌 예의를 지킬 겨를이 있겠습니까? 잠시 권도를 행하여 살 길을 취하신 연후에 예로써 상을 치르시더라도 의(義)를 해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거절했다.

“상복을 벗는다는 것이 길(吉)이라면 효도가 아니고,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차라리 죽을지라도 효(孝)와 신(信)이 아닌 지경에 이르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으니, 나는 마땅히 정도를 받아들이겠다.”

안의가 와서 간곡하게 말했다.

“제가 잠시 이 관대를 착용하고 관인인 것같이 보이겠습니다.”

“아니다. 저 배가 만약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도적과 같다면 오히려 괜찮겠지만, 만약 좋은 배라면 반드시 우리를 관부로 몰고 가 그 사정을 진술 받게 할 것인데, 너는 장차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옿지 못하면 저들이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그러니 정도를 지키는 것이 더 낫다.”

갑자기 여섯 척의 배가 노를 저어 우리 배를 둘러쌌는데, 한 배에 사람이 8, 9명 정도 있었다. 그들의 의복과 말소리 또한 하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 해적의 무리와 같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글을 써서 보여주었다.

“보아하니 그대들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어디에서 왔소?”

나는 정보에게 명하여 역시 들로 써서 답하도록 했다.

“나는 조선국 조정의 신하로 왕명을 받들어 해도를 순검하다가 상을 당하여 급히 바다를 건나더 풍랑을 만나 이곳에 오게 되었소. 그래서 이 해역이 어느 나라의 경계인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답했다.

“이 바다는 우두외양으로 지금은 대당국 태주부 임해현(臨海縣)의 경계에 속해 있소.”

정보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키자 그 사람이 물통을 보내왔다. 또 북쪽에 있는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산에 샘이 있으니 그대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소. 만약 후추가 있으면 나에게 두세 냥을 보내시오!”

내가 답했다.

“우리 나라는 후추가 생산되지 않으므로 애초부터 가져오지 않았소.”

그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우리 배에서 점점 물러나 우리 배를 둘러싸고 닻을 내렸다. 우리 배 또한 바닷가에 정박했다. 안의와 최거이산, 그리고 허상리 등이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가 인가의 기척을 두루 살펴보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다.

나의 이번 행로에서 거쳐온 바다의 흐름은 똑같은 바다 같았지만, 물의 성질이나 빛깔은 이르는 곳마다 달랐다. 제주의 빛깔이 매우 푸르며 사납고 급하여, 작은 바람이라 하더라도 물결 위로 물결이 더해지고 부딪쳐 빙빙 돌아 물살이 무척 빨랐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기까지 그랬다. 4주야(4일)를 지나가니 바다의 빛깔이 희고, 2주야를 지나가니 더욱더 희었다. 또 1주야를 가니 다시 푸르고 또 2주야를 더 가니 다시 희었다. 또 3주야를 가니 붉고 탁했으며, 또 1주야를 가니 붉고 검으며 그 속이 완전히 탁했다. 우리 배의 행로는 바람을 맞아 따르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동서남북으로 부평초와 같이 떠돌아 정처가 없었는데 그 사이에 본 바다색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색으로부터 푸른색으로 돌아온 이후로 바람은 비록 거세었지만 파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백색으로 돌아온 이후에야 비로소 돌이 많은 섬이 있었다.

섬은 모두 바위절벽으로 골짜기가 넓고 깊으며 바위가 많이 쌓여 있고 위에는 흙이 덮혀 있는데, 잡풀과 향초가 무성하고 푸르렀다. 물이 유유히 흘렀는데, 만일 심한 바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놀란 파도와 거친 물결의 우환은 보기 힘들 것이다. 내가 도적을 만나 다시 표류한 바다 또한 제주바다의 험난함과 같았다면 어찌 다시 해안가에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대개 매년 정월은 매서운 추위가 극에 달하는 시기로 거센 바람이 불고 거대한 파도가 내래쳐 배에 타는 것을 꺼린다. 2월이 되면 점차 바람이 순조로워지는데, 제주의 풍속에서 연등절(燃燈節)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한다. 또 강남의 조주(潮州) 사람들도 역시 정월 바다에는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음력 4월이 되어 이미 장마가 지나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불어오면, 바다에서 항해하는 큰 배가 비로서 제주로 돌아오는데 이를 박간풍이라 한다.

내가 표류한 때는 풍파가 험악한 때로, 해상의 하늘이 흙비로 인하여 날마다 흐렸다. 돛과 돛대, 배를 매는 줄과 노가 꺾이거나 없어졌으며, 기갈로 인하여 열흘 동안이나 크게 고생했는데, 하루 사이에도 물에 빠져 낭패를 볼 조짐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생명응ㄹ 보전하여 해안에 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비에 젖은 옷을 짜 물을 받음으로써 타는 창자를 적셨을 뿐만 아니라 배가 실로 견고하고 빨라서 바람과 파도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부 지음/서인범·주성지 옮김,『표해록』, 한길사, 2004.

 

 

15. 연오랑 세오녀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에 동해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그를 태우고는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記)≫3)를 살펴볼 때, (이 때를) 전후해서 신라 사람으로서 왕이 된 자가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하였다. 그녀 역시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의아하게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세오녀를 왕께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왕께 상주하였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내렸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벼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연오랑이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으므로 그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를 삼았다.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되기야(都祈野)라 하였다.

 

일연 지음/김원중 옮김,『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 82∼83쪽.

 

 

 

 

 

 

 

 

 

 

 

 

 

16. 만파식적(萬波息笛)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성은) 김씨이며, 개요(開耀) 원년 신사년(681)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하루에 해관(海關) 파진찬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일관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일관은 왕께 이렇게 말하였다.

“돌아가신 임금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며, 또 김유신 공이 33천(天)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킬 보배를 내리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어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신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산의 형세는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혹은 산 역시 대나무처럼 밤낮으로 합쳐졌다 떼어졌다 하였다고 한다.)

사신이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하나로 합치자, 천지가 진동하고 이레 동안 폭풍우가 치면서 날이 어두워졌다가 그 달 16일에야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용을 영접하여 함께 자리에 앉았다. 왕이 물었다.

“ 이 산과 대나무가 떨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용이 말하였다.

“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친 이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다스릴 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께서는 바다 속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또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한 마음이 되어, 값으로는 정할 수 없는 이런 큰 보물을 내려 저에게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옥으로 답례하고는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17일에 지림사(祇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다.)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런 일이 있었음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 축하하고 천천히 살펴본 다음 아뢰었다.

“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태자가 아뢰었다.

“한 쪽을 떼서 물어 넣어보십시오.”

그리하여 왼쪽에서 두 번째 쪽을 떼어내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못이 되었다. 그래서 용연(龍淵)이라 불리게 되었다.

왕은 궁궐로 동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아 일컬었다. 효소대왕 대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년(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이 있었으므로 다시 만만파식적(萬萬波息笛)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보인다.

 

일연 지음/김원중 옮김,『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152∼156쪽.

 

 

 

 

 

 

 

 

 

 

 

 

 

 

 

 

 

 

 

 

 

17. 손순이 아이를 묻다(흥덕왕 대)

 

손순(孫順)은 모량리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자, 손순은 민망하게 여겨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모실 수 없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니 밥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이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니의 배를 채워드리도록 해야겠소.”

그리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산은 모량리 서북쪽에 있다)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자 이상한 돌종[石鐘]이 나왔다. 부부는 놀랍고 괴이하게 여겨 재빨리 나무 위에 걸고 한번 쳐보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듣기에 좋았다. 아내가 말하였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도 아이의 복인 것 같으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어요.”

남편도 그렇게 여겨 아이를 종과 함께 업고는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매달고 쳤다. 그러자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려 흥덕왕이 듣고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그 맑고 고운 것이 보통 종과 비길 바라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신이 와서 그의 집을 조사하고 그 사유를 모두 아뢰었다. 왕이 말하였다.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으려 하자 하늘이 금솥을 내려주었는데,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돌종이 솟았으니, 곽거의 효도와 손순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본 것이다.

따라서 집 한 채를 내려주고 해마다 벼 50섬을 주어 극진한 효성을 기렸다.

손순은 옛 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횽효사(弘孝寺)라 하고 돌종을 두었는데, 진성왕(眞聖王) 대에 후백제의 도적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는 바람에 종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 종을 얻은 자리를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 한다.

 

일연 지음/김원중 옮김,『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579∼580쪽.

 

 

 

 

 

 

 

 

 

 

18. 포산의 두 거룩한 승려

 

신라 시대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란 두 명의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느 곳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함께 포산(包山, 향전에서 所瑟山이라고 한 것은 범음(梵音)이며, 이는 ‘싸다’(포(包)의 뜻이다.)에 살고 있었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북쪽 굴속에 살아 서로 10리쯤 떨어져 있었다. 이들은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매일 서로 오고 갔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산 속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해 구부러져 서로 맞이하는 형상을 하여 관기는 그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고,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려고 하면 역시 나무가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도 관기에게 가게 되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년이나 되었다.

도성은 늘 그가 살고 있는 뒷산의 높은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바위 틈에서 몸이 솟구쳐 나와 온몸이 공중으로 올라가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이는 수창군(壽昌郡, 지금은 수성군(壽城郡)이다)에 이르러 죽었다고 한다. 관기도 그 뒤를 따라 죽었다. 지금은 두 대사의 이름으로서 그 터의 이름을 삼고 있는데 모두 터가 남아 있다. 도성암(道成嵓)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세웠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년(982)에 승려 성범(成梵)이 처음으로 절에 와 머물면서 만일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열고 50여 년 동안 부지런히 도를 닦았는데, 여러 차례 특이한 조짐이 있었다. 이때 현풍(玄風)에 사는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사(社)를 만들어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다. 그들은 늘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거두어들여 쪼갠 다음 씻어서 발 위에 펼쳐 두었는데, 그 나무는 밤이 되면 촛불처럼 빛났다. 이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 향나무에 시주하고 빛을 얻은 해[歲]를 축하하였다. 이것은 두 성인의 영감인데 산신령이 도운 것이라고 한다. 산신령이 이름은 정성청왕(靜聖天王)이다. 일찍이 가섭불 시대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아 발원 맹세를 하여 말하였다.

“산 속에서 천 명의 출가를 기다린 후에 남은 업보를 받겠습니다.”

지금 산중에는 아홉 성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지만, 관기(觀機)․ 도성(道成)․ 반사(㮽師)․첩사(첩師)․ 도의(道義)․ 자양(子陽)․ 성범(成梵)․ 금물녀(今勿女)․ 백우사(白牛師) 등이다. 다름과 같이 기린다.

 

달빛을 밟고 서로 찾아 구름과 물을 희롱하니,

두 노인의 풍류 그 몇백 년이었는가.

연하(煙霞) 가득한 골짜기엔 고목만 남아 있고,

흔들거리는 찬 그림자 아직도 서로 맞이하는 듯하다.

 

반(㮽)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 피나무라 하고, 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말로 갈나무라고 한다. 이 두 승려는 오랫동안 바위 사이에 숨어살며 인간 세상과 사귀지 않고 나뭇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추위와 더위를 겪어내며 습기를 피하며 몸을 가릴 뿐이었다. 이 대문에 나무 이름으로 호를 지은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금강산에도 이런 이름이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써 옛날에 숨어산 선비들의 운치가 이처럼 뛰어났음을 알 수 있으나 그대로 본받기는 어렵다. 내가 일찍 포산에 살 때, 두 승려가 남긴 아름다운 덕을 기록한 것이 있기에 지금 여기에 함께 싣는다.

 

자색 띠풀과 거친 수수로 배를 채우고,

입은 옷은 나뭇잎이지 베가 아니더라.

솔바람이 차갑게 부는 험한 바위산,

해 저문 숲 아래로 나무꾼이 돌아오네.

깊은 밤 밝은 달 아래에 앉아 있으니,

반쯤 젖혀진 옷깃이 바람에 나부낀다.

부들자리 깔고 누워 잠이 드니,

꿈에도 혼이 티끌 같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다.

구름은 무심코 떠가는데 두 암자의 터에는

산사슴만 제멋대로 뛰놀고 인적은 드물다.

 

일연 지음/김원중 옮김,『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560∼562쪽.

 

 

 

 

 

 

 

 

 

 

 

 

 

 

 

 

 

 

 

19. 사복이 말을 못하다

 

서울의 만선복리(萬善北里)에 사는 한 과부가 남편 없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가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해 사동(蛇童)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高禪寺)에 머물고 있었다. 원효가 사복(蛇福)을 보고 맞이하여 예를 올렸으나, 사복은 답례를 하지 않고 말하였다.

“옛날 그대와 내가 함께 불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는데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좋다”

그래서 함께 (사복의)집에 갔다.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 수계(布薩受戒)를 해 달라고 하였다. 원효는 시신 앞으로 가서 빌었다.

“태어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구나.

죽지 말지니, 태어나는 것이 괴롭구나.“

사복이 말하였다.

“말이 번거롭다.”

그래서 원효가 다시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이 괴롭구나.”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하였다.

“지혜 있는 호랑이를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사복이 곧 게(偈)를 지어 말하였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도다. 지금 또한 그러한 자가 있어, 연화장(蓮花藏)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아래에 밝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있었는데, 칠보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아마도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땅 속으로 함께 들어가니 땅이 다시 합쳐졌다. 원효는 곧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짓고 도량사(道場寺)라 하였으며, 매년 3월 14일이면 점찰회(占察會)를 행하는 것은 일반 규정으로 여겼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을 드러낸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황당한 것을 덧붙이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깊은 못처럼 잠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랴.

떠나면서 읊은 한 곡 간단하기도 하다.

고달프구나, 생사는 본래 고통이 아니니

연화장 떠도는 (극락) 세계는 넓기도 하네.

 

일연 지음/김원중 옮김,『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469∼470쪽.

 

 

20. 성공한 사람들의 10가지 공통점

 

1. 문제 해결 능력이 강하다.

어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한 기회로 삼는다.

 

2. 현실 중심적이다.

진실과 상반되는 거짓, 가짜, 허위 등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다.

 

3. 사생활을 즐긴다.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에 종종 더 편안함을 즐긴다.

 

4. 주위 환경과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주변에 맞춰 판단을 바꾸기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따른다.

 

5. 사회적인 압력에 굴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항상 사회에 순응하는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니다.

 

6. 민주적인 가치를 존중한다.

인종, 문화, 개인의 다양성에 열린 자세를 취한다.

 

7. 깊이 있는 인간 관계를 맺는다.

수많은 사람들과 피상적인 관계를 맺기보다는, 가족이나 소수의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인간미가 있다.

 

8. 공격적이지 않는 유머를 즐긴다.

자신을 조롱하는 유머로 주변을 웃기지만, 남을 모욕하는 유머는 하지 않는다.

 

9. 자신과 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또한, 다른 사람을 억지로 바꾸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10. 창의적이고 풍부한 감성을 갖고 있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며, 발명가적인 기질이 있다.

 

출전 : 경상북도교육연구원,『고등학교 진로 가이던스 내꿈․내 비전』, 2009, 122쪽.

 

 

 

21. 격몽요결의 구용(九容)과 구사(九思)

- 『혼불』에서

 

효원이 아직 출가하지 전 대실의 친정에서 자라고 있을 때, 그네의 부친 허담은 여식과 마주앉아 율곡 선생이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말한 ‘구용’과 구사‘를 일러주었다.

그것은 사람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하여 마땅히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바른 용모와 아홉 가지 바른 생각을 이르는 것이었으니,

 

구용(九容)

 

1. 족용중(足容重)

발을 무겁게 가져 경박하게 들어올리거나 흔들지 않는다.

2. 수용공(手容恭)

손은 공손히 두어 만지작거리거나 함부로 내두르지 않는다.

3. 목용단(目容端)

눈동자를 단정히 하여 정면을 바로 보고 곁눈질하지 않는다.

4. 구용지(口容止)

말할 때와 먹을 때를 빼고는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는다.

5. 성용정(聲容靜)

맑은 음성으로 말하며 재채기나 기침 등 잡소리를 내지 않는다.

6. 두용직(頭容直)

고개를 똑바로 하여 한편으로 기울게 하지 않는다.

7. 기용숙(氣容肅)

호흡을 조절하여 늘 엄숙한 태도를 지니도록 한다.

8. 입용덕(立容德)

낯빛을 늘 바로잡아 가지런히 하여 태만한 기색을 내지 않는다.

 

구사(九思)

 

1. 시사명(視思明)

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사물이나 사람을 바르게 볼 것.

2. 청사총(聽思聰)

항상 말과 소리를 똑똑하고 분별 있게 들을 것.

3. 색사온(色思溫)

항상 온화하여 얼굴에 성난 빛이 없도록 할 것.

4. 모사공(貌思恭)

항상 외모를 공손하고 단정하게 가질 것.

5. 언사충(言思忠)

항상 진실하고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

6. 사사경(事思敬)

모든 일에 공경하고 행동을 조신히 삼갈 것.

7. 의사문(疑思問)

항상 의심이 있을 때는 반드시 선각(先覺)에게 물어 알 것.

8. 분사난(忿思難)

분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사리로 따져서 참을 것.

9. 견득사의(見得思義)

항상 재물을 얻게 될 때는 의(義)와 이(利)를 구분하여, 얻어도 되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명확하게 가릴 것.

 

“이 가르침을 명심하여 마음에 새기면, 남들한테 본이 될지언정 결코 흉이 되지는 않으리라.”

허담은 이렇게 말하였다.

 

최명희,『혼불』6권, 69~71쪽.

 

 

 

 

 

 

 

 

 

 

 

 

 

 

 

 

22. 향랑 노래비

 

1. 비석의 위치

현재 향랑의 유택은 그가 살던 집 가까이 구미시 형곡동 산 2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烈女香娘之墓>라고 비제(碑題)만이 쓰여 있었다. 1994년에 향랑 노래비(비 앞면)을 세웠다. 향랑비는 모두 세 개다.

 

2. 향랑에 대한 소개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경북 구미시 오태동 낙동강가에서 한 여성의 투신 자살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이름은 향랑(香娘), 나이는 19세. 평범한 서민(양인) 집안의 딸이었던 향랑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라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14세의 칠봉에게 출가했다. 남편 칠봉은 성질이 괴팍했고 외도를 하면서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향랑은 3년만에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왜 왔느냐, 죽어도 그 집에서 죽어라.”친정 부모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숙부에게 찾아가 의탁했지만 숙부는 조용히 개가를 종용했다. 향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시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남편의 횡포는 더 심했고 이번엔 시아버지까지 개가를 권유했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향랑은 자신의 심경을 초녀(樵女·나무하는 여자 아이)에게 간절하게 전하고 '산유화가(山有花歌)'를 구슬프게 부른 뒤 낙동강 지류인 오태소에 몸을 던졌다.

 

3. 산유화가(山有花歌)

 

天何高遠 (천하고원)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地何廣邈 (지하광막)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고

天地雖大 (천지수대)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하나

一身靡託 (일신미탁) 이 한몸 의탁할 곳 없다네.

寧投江水 (영투강수)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서

葬於魚腹 (장어어복)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내리라

 

 

5. 열녀 향랑은 1683년(조선 숙종 9)에 지금의 구미시 형곡동에서 태어났다. 향랑이 물에 투신 자살한 사건은 1702년(숙종28년) 9월 6일, 경상북도 선산군 에서 발생한 향랑이라는 아낙네의 죽음에 관한 사건이었다.

 

 

 

 

 

23. 세로토닌하라

 

1. 마음을 결정하는 3 가지 뇌 내 물질

1) 도파민 : 호기심이 왕성하며 새롭고 기이한 것을 추구한다. 새로운 일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며 겁 없이 뛰어든다.

 

2) 세로토닌 : 작은 위험이나 해로움에 민감하다. 위험을 회피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다소 소심한 면모를 보인다.

 

3) 노르아드레날린 : 즉흥적이며 충동적이다. 적극적이지만 공격적으로 되기 쉽다.

 

2. 도파민-엔도르핀 시스템의 함정

산업 시대 한국 사회를 이끌어 온 것은 한마디로 도파민적․엔도르핀적 가치관이었다. 바라는 바를 이루면 보상이 따라온다. 돈, 좋은 성적, 승진, 칭찬 등이 보상으로 돌아온다. 꿈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실현된다.

이게 발전도상국의 가치관이다. 이렇게 경쟁을 통해 노력하고 보상이 따라오는 ‘경쟁-노력-보상’ 체계가 뇌 속에 ‘보수 회로’를 만드는데, 여기엔 강력한 쾌감이 동반된다. 이 시스템이 의욕과 학습에 관여한다는 사실은 우리 경험으로 알 수 있다.(중략)

문제는 거기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성공이란 이름의 산에는 정상이 없다. 정상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뭔가! 더 높은 정상이 앞에 버티고 있다.

 

3. 목적 의식이 일을 즐겁게 만든다.

1) ‘인생의 의미를 찾아 목적을 갖고 긴 안목으로 일을 즐겨 한다.’(디너가 정의한 행복)

 

2) ‘성공이 행복의 열쇠가 아니라 행복이 성공의 열쇠다.’(슈바이처)

 

4. 성공 법칙 제1조 ‘불평하지 않는 것’

상습 불평꾼이 있다. 아주 습관적이다. 그에겐 모든 게 남의 탓이고, 자기는 패해자일 뿐이다. 그에겐 과거가 현재보다 힘이 세다. 그래서 내가 이 모양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누구도 그런 인간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괜히 나까지 짜증이 난다. 기피 인물 1호다. 그가 하는 일이 잘될 리 없다. 불평을 말하면서 자꾸 귀찮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뇌 속에 부정적 회로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성곡의 제1법칙은 불평하지 않은 것이다.

 

5. 세로토닌의 중요한 3대 기능

1) 조절 기능 : 공격성, 폭력성, 충동성, 의존성, 중독성 등을 조절해 평상심을 유지하게 해 준다. 또 격한 감정을 조절해 준다.

 

2) 공부와 창조성의 기능: 주의 집중과 기억력을 향상시켜 준다. 신피질을 살짝 억제해 잡념을 없애 주고 변연계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창조성 함양에 크게 기여한다.

 

3) 행복의 기능 : 생기와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편안하고 평온한 행복감을 갖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다.

 

6. 새로토인 인간형의 8가지 특징

1) 합리적으로 조절한다.

2) 무섭게 집중한다.

3) 목표가 분명하다.

4) 쓰라린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다.

5) 우뇌형이다.

6) 사람 냄새가 난다.

7) 베풀어 행복하다.

8) 자연친화성 지능이 높다.

 

7. 잠재능력 200% 올려 주는 전두엽 만들기 10계명

1) 눈물이 나도록 감동하라.

2) 일단 시작해보는 거다.

3) 아침 1 시간이 운명을 가른다.

4) 책과 함께 있으면 행운이 따라온다.

5) ‘당사자 의식’을 가져라.

6) 함께 어울리되 혼자서도 행복하라.

7) 물고기 한 마리에도 고래를 잡은 듯

8) 그래도 웃자.

9) 감사가 가장 강력한 치유제다.

10)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라.

 

이시형,『세로토닌하라』,중앙북스,2010.

 

 

 

 

24.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1)/한비야

1

 

구호의 세상은 우리가 아는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는 학교나 사회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건 무한 경쟁의 법칙, 정글의 법칙이라고 배운다. 이런 세상에서의 생존법은 딱 두 가지. 이거거나 지거나, 먹거나 먹히거나다. 그러나 구호의 세상은 경쟁의 장(場)이 아니었다. 우리 서로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 가진 것을 나누는 세상이었다. 세상에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 같은 사람이면 어떤 때는 강자였다가, 다른 때에는 한없는 약자가 된다. 이렇게 얽히고설켜 있으니 서로 도와야 마땅하다는 것이 구호 세상의 법칙이었다. 멋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졌다. (11쪽)

 

 

2

 

구호는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구호 전쟁을 하려면 사랑의 총알이 필요하다. 구호 자금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오기 직전, 한 아이에게 카드와 함께 꽉 채운 저금통을 받았다. 카드에 적힌 사연은 기도문 형식이었다.

‘하느님, 이제 저는 그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돌봐주세요.’

글씨체로 봐서는 겨우 유치원이나 다닐 만한 아이. 그 조그만 아이가 우리를 어떻게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이었을 저금통을 통째로 보냈단 말인가. 생각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난다.

이번 구호 자금에는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보낸 1백만 원도 들어 있다. 세뱃돈과 용돈, 상금 등을 알뜰히 모은 것이라는데, 그 아이는 지난해 가을 백혈병으로 죽고 말았다. 아이 부모님은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월드비전에 보내셨다. ‘우리 아이도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살리는 데 줬다고 하면 무척 좋아할 거예요’라는 편지와 함께

그 외에도 늦깎이 사법연수생의 첫 월급, 어느 할머니가 칠순잔치 안 하고 보내신 잔칫돈,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의 일주일 치 급료 등 정말 한 푼 한 푼이 귀하고 멋진 돈이다.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이분들을 포함한 후원자 모두에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해주고 싶다. 현장에 있던 ‘목격자’로서 당신들이 맡기신 돈으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살렸다고 말할 수 있어서 얼마나 마음 가볍고 떳떳한지 모른다. (62쪽)

 

 

3.

 

차를 타고 떠나려는 나에게 이 의사, 잊어버릴 뻔 했다는 듯 명함을 내밀었다.

“아까 세상에서 제일 많은 지뢰가 묻혀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하셨죠? 그때 비야 씨가 한국 사람인 줄 알았어요. 한국은 비무장지대에 묻혀 있는 지뢰 매설 밀도가 세계 최고랍니다. 통일이 되면 지뢰 제거가 큰 문제가 될 겁니다. 만약 내가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언제라도 달려가죠.”

오는 차 안에서 데니스의 마지막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D.M.Z(Demilitarized Zone). 이름 그대로라면 비무장지대인데 땅 속은 그렇게 잔뜩 무장을 하고 있는 내 나라의 현실이 슬프다. 내 땡의 허리가 안쓰럽다. 괜히 내 허리를 만져본다. 아, 생각할수록 시리고 저린 나의 조국이여.(50쪽)

 

 

4.

 

다음 날에는 차를 타고 좀더 깊은 시골 마을로 들어가 한 가정을 방문했다. 쓰러지기 직전의 초가 주인 찰로 씨는 PD들이 연신 아이들의 부른 배를 찍고 있으니까 걱정이 되었는지, 변명하듯이 설명했다.

“이건 배가 불러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먹고 싶은 게 많아서 헛배가 부푸는 거예요.”

온 가족이 들판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왔다는데 여섯 사람이 가져온 식량이라고는 전분이 든 야생 칡 한 뿌리, 손가락보다 가는 고구마 뿌리 10개, 그리고 야생 콩 한 종지가 전부였다. 그나마 야생 콩은 여섯 번을 삶아야 간에 치명적인 독이 빠진다는데 땔감이 없어서 세 번만 삶고 먹는다고 했다.

“아니, 독시 들어 있는 걸 알면서 어떻게 아이들한테 먹여요?”

PD가 물었다.

“당장 먹을 게 없는데 그까짓 독이 문젠가요?”

엄마는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한다.

이게 현실이다. 아프간 사람들은 주린 배를 독초로 채우면서 눈이 이곳 사람들은 덜 삶은 야생 콩으로 배를 채우는 대가로 간을 손상시키는 거다. 말 그대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지금이 9월. 다음 수확기는 3월에 시작하니 앞으로 6개월이 고비다. 이들이 과연 그때까지 저 야생 콩과 야생 칡만으로 견딜 수 있을까? 다행히 수확기까지 살아남는다고 해도 이번 파종기에 뿌릴 씨앗도 없는데 무슨 수확을 기대할 것인가. 독이 든 콩까지 먹는 판에 종자 씨앗이 남이 있을 리 없다.(75쪽)

 

한비야,『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 2010(200쇄) / 2010년 구미시 『한책하나구미 운동』 지정 도서

 

 

 

 

 

 

 

 

 

 

 

 

25.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2)/한비야

5. 내 별명은 마이꼬리

 

모술에서 나는 한국, 미국, 호주가 지원하는 식수 사업 총괄 책임을 맡았다. 30년 전반 하더라도 이라크의 상하수도와 사회 기반 시설은 이웃 나라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막대한 저수량의 댐을 끼고 있는 모술은 항상 물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차례의 전쟁과 경제 제재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특히 이곳은 화장실 처리를 휴지가 아닌 물로 하는 풍습을 갖고 있는데, 물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수인성 전염병과 불결에 따른 각종 질병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이곳 물 사정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다. 우리 숙소는 집 안에 커다란 물탱크가 있어 물 부족을 겪지는 않았지만, 수돗물이라고는 5일에 한 번도 구경하기 힘든 동네가 태반이다. 주민들은 물탱크 차에서 물을 사 써야 하는데 그 물값이 1천 리터에 노동자 일당의 절반이다. 사정이 이러니 한낮 기온이 50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에도 씻기는커녕 먹을 물도 아껴야 할 형편이다. 모술은 30분만 벗어나면 사정은 더 나쁘다. 보통 시골 마을 중심에 우물이 있는데 대부분 거의 말라 있는 데다 덮개가 없어 간신히 퍼올린 물도 불순물투성이다.

수백 명이 다니는 학교도 사정은 마찬가지. 조사 나간 학교에는 식수대는커녕 화장실이 하나도 없다. 볼일이 급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선생님들은 바로 옆의 교장 사택으로 달려가고, 학생들은 하루 종일 참거나 급하면 아무 데서나 일을 본단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학교에 오는 걸 싫어하고 고학년 여자아이들은 자퇴율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적어도 학교에 와서는 깨끗한 물을 실컷 마실 수 있고, 지역 주민들도 학교에 와서 물을 길어갈 수 있도록 학교를 통한 식수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곳 병원 환자의 반이 아이들이고, 그 가운데 70퍼센트가 더러운 물 때문이라는 의사의 말도 우리 결정을 뒷받침해주었다. 총예산은 70억 원. 끊어진 수도관을 연결하여 식수대를 마련하고, 화장실에서 항상 물을 쓸 수 있도록 넉넉한 크기의 물탱크를 배치하는 사업으로, 170개 초․중학교 약 7만 명의 아이들과 이라크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게 되는 것이다. 9월에 개학을 한 아이들이 학교에 왔을 때 깨끗한 물이 콸콸 나오는 식수대와 새로 생긴 화장실을 보면 얼마나 놀라고 또 좋아할까.

 

* 별명 ‘마이꼬리’의 뜻 : 마이는 물, 꼬리는 한국인. 그러니까 ‘물을 가져다주는 한국인’이라는 뜻.

 

한비야,『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 2010(200쇄) / 2010년 구미시 『한책하나구미 운동』 지정 도서

 

 

26.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3)/한비야

6. 밥 퍼얼스 목사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세계적인 구호 단체의 발생지가 다름 아닌 한국이라는 것.

월드비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전쟁 고아와 미망인을 돕는 일로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한경직 목사님이 아이들을 돌보시고 밥 피얼스 목사님은 외국에서 필요한 자금을 모아 오셨다. 이렇게 작은 규모로 출발한 긴급구호 팀이 지금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약 1억 명의 사람들을 돌보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 구호 및 개발 단체가 된 것이다.

나도 월드비전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1990년까지 우리 나라에 들어온 해외 원조 총액이 무려 25조 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1960년대에는 한 해 원조 액수가 우리 나라 보사부 예산의 두 배를 능가하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렇게 맛있게 먹던 옥수수빵과 덩어리 우유도, 학기 초에 받던 공짜 공책과 연필도, 아프게 맞던 예방주사도 바로 이런 돈에서 나온 것이다. 그때는 막연히 바다 건너 부자 나라에서 오는 거려니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눈물 나게 고맙다. 누군가가 지금 우리처럼 그 돈을 모아다 주려 갖은 애를 썼을 테니 말이다.

우리 나라에도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왜 멀리 있는 한국까지 도와야 하느냐는 사람도 많았을 테고, 희망도 없으니 도울 필요가 없다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외국 기자는 노골적으로 이런 기사를 썼다고 한다. ‘35년간 일본 식민지에, 남북간 이념 대립에, 이제는 전쟁까지 하고 있는 한국이 제 발로 서기를 바라느니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바라겠다’고. 이런 차가운 시선에도 한국의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구호 활동을ㄹ 벌여준 단체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런데 이 도움은 1990년까지 계속되었다. 가만, 1990년이라니? 처음 이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1988년 뻑적지근하게 올림픽을 열고, 경제 선진국 20개국이 모인 OECD에 가입하느니 마느니 할 때도 다른 나라 어린이들의 코 묻은 돈으로 우리 아이들을 먹이고, 외국 할머니들의 쌈짓돈으로 우리 할머니들 약을 사드렸다는 말인가? 얼굴이 화끈했다. (152~153)

 

 

한비야,『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 2010(200쇄) / 2010년 구미시 『한책하나구미 운동』 지정 도서

 

 

 

 

27.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4)/한비야

7.

 

“우리 나라에도 도울 사람이 많은데 왜 외국까지 도와야 하나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물론 우리 나라에도 도울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제 나라 아이를 돌보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40년 넘게 우리를 도왔던 외국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까. 더구나 우리가 돌보고자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선 채로 삶과 죽음을 동시에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해당 정보가 돌봐야겠지만 대부분의 정부는 지금 당장 그럴 능력이 전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똑같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경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은혜의 빚’이라는 부채감과 의무감으로 그들을 돕는 것은 참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도울 때에는 기껍고 즐거운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성경에도 이런 말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구제하고, 네가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인정이 대단히 고품질이라는 것을 오지 여행을 하면서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월드비전에서 일하면서 더욱더 확실해졌다. IMF 때보다도 더 어려웠다는 지난해에 월드비전 모금액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론 대기업이나 고액 기부자는 줄었지만, 개미군단 후원자들이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다. 우리 10만 명의 후원자 가운데 대부분이 한 달 수입 2백만원 이하라는 것을 안다면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나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 마음, 아름답다. 멋지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 대한민국 만세다.

그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우리’를 좋아한다. 나도 ‘우리’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하며 즐겨 사용한다. 이 말은 어떤 명사와 붙여놓아도 단박에 정이 가는 말로 변신시킨다. 우리 엄마, 우리 집, 우리 마을, 우리 나라.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은 나라에까지 우리라는 말을 붙여 아주 가까운 공동 운명체로 느끼곤 한다.

이제 범위를 조금만 확장시켜보면 안 될까? 우리 나라를 넘어 우리 아시아, 우리 세계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아시아와 우리 세계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 다 우리 아이들이 될 것이다. 그 ‘우리’ 아이들 가운데 굶어 죽는 아이가 있다면, 별것 아닌 병에 걸려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난 때문에 노예처럼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그들도 내 집에 살고 있는 내 아이와 다름없는 우리 딸, 우리 아들인데…….(157~157쪽)

 

한비야,『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 2010(200쇄) / 2010년 구미시 『한책하나구미 운동』 지정 도서

 

 

 

 

 

28.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5)/한비야

8. 시에라리온의 별

 

“시에라리온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일행들 잠잠)

“시에라는 산, 리온은 사자, 즉 ‘사자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어, 서아프리카에는 사자가 없다는데 웬 사자?”

“어, 서아프리카에는 사자가 없다는데 웬 사자?”

PD가 아는 체를 한다.

“맞아요. 15세기 서양 사람들이 처음 갔을 때 들렸던 천둥소리가 사자 포효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요. 자, 좀더 중요한 정보를 알려드릴까요?”

이쯤 되면 일행들이 눈길과 관심이 내게로 쏠리게 마련.

“시에라리온의 국토 면적은 남한 땅 3분의 2정도, 인구 약 5백만 명의 작은 나라지만 여러 가지 세계 기록을 갖고 있어요. 평균 수명이 25~35세로 가장 짧은 나라, 인구 대비 난민 수가 가장 많은 나라(인구의 절반이 난민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나라. 남자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986.6캐럿이나 되는 이것을 ‘시에라리온의 별’이라고 부른답니다.”

“아니,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요?”

“물론이죠. 세계 다이아몬드의 3분의 1이상이 아프리카에서 난다는 사실! 최대 생산국은 호주지만 아프리카의 콩고, 남아공, 앙골라와 함께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도 주요 생산국이죠.”

“이상하다. 값비싼 보석이 그렇게 많이 나는데 왜 그렇게들 못 사는 걸까?”

“아주 좋은 질문. 그 보석을 팔아서 국민들을 위해 쓰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니까 문제지요. 내전에 필요한 총과 마약을 사느라 그 다이아몬드를 다 쓰는 거에요. 게다가 서로 세를 과시하느라 사람들의 손목과 발목을 무수히 자르고 천인공노할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전쟁을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이라고 말하죠.”

“세상에. 그 예쁜 다이아몬드가 그런 흉악한 일에 쓰인다는 거야?”

김혜자 선생님이 놀란 눈을 깜빡이며 날 쳐다본다. 사랑스럽다.

(중략)

“어느 날 새벽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리 마을에 쳐들어왔어요.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도망갈 시간도 없었죠. 내 나이 또래 되는 반군들이 총을 들이대면서 우리 마을 남자들을 한 줄로 세워서는 나무 등걸 밑으로 끌고 갔어요. 그러고는 한 사람, 한 사람 손목을 등걸에 걸어놓고는 코코넛 따는 칼로 내리쳤어요. 잘린 손목들에서 솟아나온 피가 나무 등걸 주위에 흥건했어요. 완전히 손목이 잘린 사람들과 반만 잘린 사람들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몸부림치며 울부짖었죠.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속으로 기도했어요. 내 손목이 단칼에 잘려나가게 해달라고.”

나는 앞으로 다이아몬드를 볼 때마다, 잘려서 피가 뚝뚝 흐르는 자마엘의 팔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분명 괴로운 일일 것이다.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마음 편했을 것을…….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 많은 ‘피 묻은 다이아몬드’는 어디로, 누가한테 간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복잡한 수십 단계를 거쳐서 가공되고 세련되고 예쁘게 세팅이 되어 세계 도처의 고급 보석상 진열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상당 부분은 이미 변치 않은 사랑의 징표나 예물이 되어 누군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을 것이다. 전 세계 다이아몬드의 5퍼센트 남짓이 우리 나라에 팔린다니 한국 사람의 손가락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내 손가락이 거기에 끼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 혹시라도 나에게 사랑의 징표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려는 사람은 참고하시길. 난 반지를 아예 끼지 않는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사랑의 시가 적힌 예쁜 공책이 훨씬 좋다. 자작시면 더 좋고. (163~170쪽).

* 시에라리온 : 서부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의 조그만 나라.

 

 

9. “애썼다” 한 마디면 족하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이 오디서 오나?

처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야훼로다.

네 발이 헛디딜까, 야훼 너를 지키시며 졸지 아니하시리라.

너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잠들지도 아니하신다.

야훼는 너의 그늘, 너를 지키시는 자는 항상 네 오른편에서 계시어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야훼께서 너를 모든 재앙에서 지켜주시고 네 목숨을 지키시리라.

떠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너를 지켜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너를 지켜주시리라.

-시편 121편-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서일까, 아침 기도는 언제나 시편 121편 ‘순례자의 노래’로 시작하게 된다. 한 달이 넘었는데도 질리기는커녕 소리 내어 외울 때마다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이곳은 이미 해발 4천 미터, 하늘이 가까워서인지 기도가 참 잘 된다. 내 기도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그분은 아침, 저녁 만나면서도 만날 때마다 반갑고 새롭다. 기도가 끝날 때쯤은 아쉽기까지 하다. 이렇게 나는 그분과 매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다.

 

하느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 아침, 이렇게 기도드릴 수 잇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말씀이 적혀 있는 성경책, 그리고 자연이라는 성경책을 한꺼번에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가족, 제 친구들, 제 팀원과 전 직원들의 건강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214~215쪽)

 

한비야,『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 2010(200쇄) / 2010년 구미시 『한책하나구미 운동』 지정 도서

 

 

 

 

 

 

29.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6)/한비야

10.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철들고 나서 내가 넘어온 산들을 따져본다. 국제 홍보라는 산, 세계 일주라는 산, 중국어라는 산을 넘어 지금은 긴급구호라는 산을 오르고 있다. 이제 5년 차이지만 이번 산은 워낙 크고 높아서 정상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다. 겨우 3부 능선쯤 올라온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오래 걸릴 것을 각오했기 때문에 진독 더디게 나간다고 답답해하거나, 어느 천 년에 정상까지 가냐며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곧 7부 능선, 8부 능선으로 올라가면 조금씩 시야가 트이고, 어느 순간 까마득했던 정상이 눈앞에 나타나면서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오늘도 나는 행군한다. 지금은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좀 괴롭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기가 꺾여 자신이 없어질 때마다, 몸이 지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일 때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싶을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나에게 내려진 절체절명의 명령 소래가 들린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286~287쪽)

 

한비야,『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 2010(200쇄) / 2010년 구미시 『한책하나구미 운동』 지정 도서

 

 

 

 

 

 

 

 

30. 말이 없으면 닭이나 타고 가지

 

일화(逸話)는 실제로 겪은 경험이나 실제로 있었던 현상, 그리고 실존했던 사람의 특별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일화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실재성, 현실성 그리고 일탈성(逸脫性)이다. 일화는 저잣거리나 들판에서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평민 일화, 관아나 사랑방 서재에서 사대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대부 일화로 나눌 수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일화가 형성된 시기는 아주 오래 전이지만,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조선시대 초기이다. 고려 중기 이후《파한집》《보한집》《역옹패설》등에서 평민 일화와 사대부 일화의 모습이 간간이 보이기 시작하다가, 사대부들이 사회적 자리를 굳건히 잡게 된 조선 초기에 이르면 《용재총화》《필원잡기》《파한집》《청파극담》등 여러 잡록집에서 다양한 일화가 대거 등장하게 된다.

일화의 문학사적 의미로는 등장인물의 말이나 대화방식 그리고 말의 기능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조선 초기의 일화는 16~1·7세기경에 사실주의 소설이 나오게 된 바탕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강옥,『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 학고재, 6~11쪽에서.

 

1.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

근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다. 하루는 친구집에 찾아갔더니 친구가 술상을 차렸으나 안주가 채소뿐이었다. 그 친구가 먼저 “집이 가난하고 저자도 멀어 맛있는 것을 차리지 못해 싱겁고 박하기만 한 것이 부끄럽네”하고 사과를 하였는데, 때마침 닭들이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김이 자기 말을 잡자고 하자 주인이 “말을 잡으면 무엇을 타고 돌아갈 건가?”라고 묻자 김이 “닭을 타고 가면 되지”라고 했다. 주인이 껄껄 웃으면서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해동잡록)

이강옥,『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 학고재, 286~287쪽.

 

 

2. 선생을 가르친 어린 조광조

 

정암 조광조는 8,9세 때 환훤(寒暄) 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한훤을 모시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한훤이 고양이가 고기를 물고 가는 것을 보고 여종에게 고기를 잘 지키지 않았다면서 성을 내고 꾸지람을 하였다. 그 고기는 공이 어머니에게 반찬을 해드리려던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정암이 천천히 말했다.

“어버이를 위하는 선생님의 정성은 실로 지극합니다만, 고양이는 그런 것을 모르고 여종 역시 일부러 범한 것이 아니온데, 선생님께서는 이 일로 지나치게 화를 내시니 좀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한훤이 놀라고 탄복하여 “어린아이인 네가 나에게 와서 공부하는데, 내가 도리어 너에게서 배웠구나”하면서 종일토록 데리고 다니며 칭찬하였다. (기옹만필)

이강옥,『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 학고재, 303쪽.

 

 

3. 봉급 일만 이천 냥

 

아버지는 사람들이 수령의 봉급이 많고 적음을 비교할 때면 잠자코 계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양양 부사를 그만두고 돌아와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실 때였다. 그들은 이전에 자기가 다스리던 고을의 봉급이 많네 적네 하다가 양양은 어떻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농담으로 “일만 이천 냥 받았소이다”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게 정말이오?”하자 아버지는 “그렇고 말고요”라고 하셨다. 그들은 반신반의 하면서 어서 자세히 말해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일만 냥 가치는 되고, 녹봉이 이천 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일만 이천 봉과 겨룰 만하지 않소?”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과정록)

이강옥,『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 학고재, 303쪽.

 

 

 

 

 

 

 

 

 

 

 

 

 

 

 

 

31. 책만 보는 바보(1)-나는 책만 보는 바보

 

햇살과 함께하는 감미로운 책읽기는,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스무 살 무렵, 내가 살던 집은 몹시 작고 내가 쓰던 방은 더욱 작았다. 그래도 동쪽,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오래도록 넉넉하게 해가 들었다. 어려운 살림에 등잔 기름 걱정을 덜해도 되니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온종일 그 방 안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상을 옮겨 가며 책을 보았다. 동쪽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어느새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면 펼쳐 놓은 책장에는 설핏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책 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면 얼른 남쪽 창가로 책상을 옮겨 놓았다. 그러면 다시 얼굴 가득 햇살을 담은 책이 나를 보고 한하게 웃어 주었다. 날이 저물어 갈 때면, 해님도 아쉬운지 서쪽 창가에서 오래오래 햇살을 길게 비껴 주었다.

햇살이 환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신기하기도 했다.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책 한 권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가로 한 뼘 남짓, 세로 두 뼘 가량, 두께는 엄지손가락의 절반쯤이나 될까. 그러나 일단 책을 펼치고 보면, 그 곳게 담긴 세상은 끝도 없이 넓고 아득했다. 넘실넘실 바다를 건너고 굽이굽이 산맥을 넘는 기분이었다.

책과 책을 펼쳐 든 내가,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쯤 될까. 기껏해야 내 앉은 키를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책과 내 마음이 오가고 있는 공간은, 온 우주를 다 담고 있다 할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 번쩍번쩍 섬광이 비치고 때로는 우르르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하고한 날 좁은 방 안에 들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날마다 책 속을 누비고 다니느라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때론 가슴 벅차기도 하고, 때론 숨 가쁘기도 하고, 때론 실제로 돌아다닌 것처럼 다리가 뻐근하기도 하였다.

못 보던 책을 처음 보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덕무의 눈을 거치지 않고서야, 어찌 책이 책 구실을 하겠느냐”며 귀한 책을 구해 자신이 보기 앞서 내게 먼저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책표지만 바라보아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좀처럼 웃을 일일 없는 생활인지라.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던 집안 식구들도 나중에는 으레 귀한 책을 얻어서 그러려니 생각하였다.

누가 일러 주고 깨우쳐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책을 읽었기에, 막히는 구절이 나오면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얼굴은 먹빛처럼 어두워지고 앓는 사람마냥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뜻을 깨치기라도 하면, 나는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고함 질렀다.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깨친 내용을 몇 번이고 웅얼거렸다. 눈앞에 누가 있는 양 큰 소리로 일러 주며 웃기도 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집안 식구들도 나중에는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혼자 실없이 웃거나 끙끙대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책만 들여다보는 날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간서치(看書痴)’라고 놀렸다. 어딘가 모자라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말이다. 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20~22쪽)

 

안소영 지음,『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 진경문고, 2011./ 2011년 구미시 『한책 하나구미 운동』지정 도서

 

 

 

 

 

 

 

 

 

 

 

 

 

 

 

 

 

 

 

 

 

 

 

 

 

 

 

 

32. 책만 보는 바보(2)-가난한 날 나의 독서법

 

하루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는 것은 시각을 짐작하게 해주지만, 밥 때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세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흉년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두 끼는커녕 한 끼만 제대로 먹어도 다행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 형편이 나아진 지금도, 끼니를 거르지 않고 챙겨 먹으면 오히려 속이 더부룩해져 불편하다.

내가 젊은 시절에는 유난히 큰 흉년이 잦았다. 오랜 가뭄으로 고생을 하고 나면 그 다음 해에는 큰물이 나 농작물을 휩쓸어 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돌림병이 찾아들었다. 가뭄과 큰물이 번갈아 온 어느 해였다.

멀건 나물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한 채, 해가 뉘엿하도록 온 식구가 굶고 있었다.

꼬르륵 꼬륵 꼬르르륵 꼬르르르.

아침나절만 하더라도 뱃속 창자의 기세는 맹렬했다. 어딘가 달라붙어 있을지도 모를 한 톨의 곡식까지 찾아내려는 듯 창자는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제 풀에 지쳐 수그러든 지도 오래였다. 식구들도 저마다 방 안에서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을 터였다. 나는 숨소리조차 들려 오지 않는 방문을 바라보며 무능한 가장이 되어 버린 자신의 처지를 새삼 서글퍼하고 있었다.

부질없는 생각들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러고 나서 소리 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책에 빠져 들어 있는데, 문득 내 목소리가 무척 맑고 낭랑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굶주려 비어 있는 나의 몸이, 소리를 내는 울림통이 되어 그런가 보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배고플 때뿐만이 아니었다. 추위에 떨 때, 근심 걱정에 시달려 마음이 복잡할 때, 아플 때도 책을 읽으면 그 모든 괴로움이 덜어지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문득 느꼈던 책읽기의 이로움을 나는 이렇게 써 두었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이길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22~24쪽)

 

굶주림

 

나에게는 밥을 먹는 것보다는 굶주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내 몸에는 임금님과 성이 같은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서자의 집안, 반쪽의 핏줄이다. 본가의 적자가 아니니 물려받을 재산도 없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니 살림을 꾸려 갈 녹봉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다. 온전한 양반들만의 세계에 끼워 주지도 않으면서, 또 다른 반쪽의 핏줄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비웃으며 허락하지 않았다.

글을 읽어 깨우친 뜻을 펼쳐 보지 못하고, 그렇다고 땀 흘려 일하지도 못하고, 그저 별 도리 없이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다. 음식을 담아 본 지 오래인 그릇은 이가 빠지고, 소반은 저절로 닳아 살림은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그 가운데 나는 애써 소리 내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24~25쪽)

 

안소영 지음,『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 진경문고, 2011./ 2011년 구미시 『한책 하나구미 운동』지정 도서

 

 

 

 

 

 

 

 

 

 

 

 

 

 

 

 

 

 

 

 

 

 

33.책만 보는 바보(3) -선입견을 버려라

 

바둑이나 장기를 즐기지는 않지만, 장기판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다. 장기판은 옛 중국의 한(漢)나라와 초(楚)나라의 싸움터를 그대로 축소한 것이다. 그러니 병졸(兵卒)은 물론 수레(車)와 말(馬), 대포(包)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는 코끼리(象)의 등장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레(車)’야 장기판 위에서도 거침없이 일직선으로 내달리겠고, ‘대포(包)’야 포신을 걸쳐 놓아야 하기에 뭔가를 넘어서 날아가겠고, ‘말(馬)’이야 무릎 관절이 구부러져야 빨리 달리니 한 번은 방향을 틀어 나아가겠고, ‘병졸’들이야 물러서지는 못하니 그저 한 걸음씩 앞으로 옆으로 맨몸으로 움직일 뿐이다. 그런데 장기판 위의 ‘코끼리(象)’은 어째서 그처럼 성큼성큼 넓게 움직이는 걸까?

사신 일행을 따라 박제가와 함께 중국에 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코끼리를 보았다. 코끼리의 긴 코와 입 밖으로 뻗은 어금니를 보고 나니, 유달리 삐침이 많은 ‘코끼리(象) 글자’도 그럴 듯하다 싶었다. 성큼성큼 코끼리가 걷는 것을 보니, 장기판 위에서 그처럼 넓게 움직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몇 해 뒤, 연암 선생도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때 코끼리를 가까이에서 보실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함께 구경하던 조선 사람들 중에서도 코끼리를 처음 보는 사람이 많았다는데, 그때의 일을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코끼리가 코로 먹을 것을 집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둥이가 별나게 긴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입은 있는데 코가 어디 있냐며 열심히 찾았다는 것이다. 코로 먹을 것을 집을 수 있다거나, 코가 그렇게 생겼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코끼리의 다리가 다섯이로군.”

코끼리의 코가 길게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다리인 줄 알았던 까닭이다.

이렇게 코끼리를 처음 본 사람들처럼, 선생은 모든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중심으로 보려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평소에도 선생은 나와 벗들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자네들의 눈과 귀를 그대로 믿지 말게. 눈에 얼핏 보이고 귀에 언뜻 들린다고 해서, 모두 사물의 본모습은 아니라네.”

선생이 탓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아니었다. 눈과 귀야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사람의 머리에 전해 주는 감각 기관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느끼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先入見)이다.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음식은 손이나 기껏해야 입으로 집는 것이며, 아래로 드리워진 것은 모두 다리여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동물인 코끼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비좁은 틀에 거대한 코끼리의 몸을 구겨 넣으려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코끼리를 다리가 다섯 개인 하마라든가, 주둥이가 새의 부리처럼 별나게 긴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코끼리에 대한 것뿐이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날의 선입견에 갇혀 있으면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게 된다. 세상은 늘 이대로 계속되어야 하고, 학문도 옛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외우는 것이 제일이라 여기게 된다. 글도 옛사람의 것을 본떠지어야만 제대로 된 글이라는 대접을 받는다. 사람과 사귈 때도 신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을 먼저 보게 되니, 참다운 벗을 만나 마음을 나누기가 어렵다.

선입견은 결국,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은 새로운 활기라고는 없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선입견을 버리라는 선생의 말씀에, 나와 벗들이 벅찬 마음으로 따른 것은 당연했다. 우리들이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선입견의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니던가. 할 수만 있다면 신분의 굴레가 씌운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서고 싶었다.(174~178쪽)

 

안소영 지음,『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 진경문고, 2011./ 2011년 구미시 『한책 하나구미 운동』지정 도서

 

 

 

 

 

 

 

 

 

 

 

 

 

 

34. 책만 보는 바보(4) -내가 있을 자리

 

군신유의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리로써 대할 기회가 나에게는 임금을 대할 기회가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나에게 군주(君主)는 그저 아득히 먼 존재일 뿐이었다. 그 은혜와 손길을 느낄 수가 없고, 나 역시 피가 도는 뜨거운 마음으로 나의 군주에게 의리를 바칠 수가 없었다.

부자유친이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친근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님을 뵐 때마다 내 마음은 늘 아려 온다. 아들을 낳고부터는 더욱 그랬다. 아비로서의 지극한 정으로도, 나와 같은 처지를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아버님 역시 그러하셨을 것이다. 아버님과 나에게는, 그리고 나와 나의 아들에게는, 부자로서의 친근함 이전에 흐르는 감정이 있다. 서자의 처지라는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이다.

부부유별이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나와 마찬가지로 서출(庶出)이라는 피가 흐르고 있다. 처가는 무인의 집안이지만, 그 활달하고 씩씩한 기운으로도 신분의 굴레가 주는 그늘을 없애지는 못했다. 아내 역시, 아버지와 형제들의 우울한 한숨과 끈끈한 탄식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아비와 어미들에게서 그러한 피를 물려받은 나의 자식들 역시 그러할지 모른다. 그러한 자식들은 바라보는 아내의 심정도 나와 마찬가지로 절망적이고 우울하리라. 부부는 이렇게 다르지 않다.

장유유서라, 어른과 어린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 물론 어린 사람은 나이든 사람을 공경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우리 같은 서자 출신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라도, 본가의 어린아이에게까지 존댓말을 써야 한다. 간혹 보잘 것 없는 벼슬이나마 관직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서출의 자리는 따로 있었다. 당당한 적자 출신의 사대부들끼리 차례를 지켜 앉은 다음, 그 아래쪽에 따로 앉았다. 앉은 자리가 남쪽이라 하여 우리를 ‘남반(南班)’이라 조롱하기도 했다.

붕우유신이라, 벗과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륜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한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오직 이 항목뿐이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곳에서도 우리가 마음 편히 있을 자리는 없었다. 우리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러한 벗들이 그리웠다. 내 입으로 글을 읽어도 듣는 것은 나의 귀뿐, 내 손으로 글을 써도 보는 것은 나의 눈뿐, 오로지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아 위안해 온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나도, 드디어 소중한 벗들을 만나게 되었다. 벗들에게도 가는 길을 나에게 내어 준 것은, 은은한 달빛 아래 더욱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백탑뿐

이었다. 탑은 제 그림자를 다리처럼 길게 놓아, 벗들에게로 가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내가 오래도록 머무를 자리도 만들어 주었다.(37~38)

 

안소영 지음,『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 진경문고, 2011./ 2011년 구미시 『한책 하나구미 운동』지정 도서

 

♣♣♣♣♣♣♣♣♣♣♣♣♣♣사제동행독서동아리♣♣♣♣♣♣♣♣♣♣♣♣

-구상문학관 탐방 및 점심 시간 독서 및 글쓰기, 시 낭송 대회-

 

 

 

 

 

 

 

 

 

 

 

 

35. 책만 보는 바보(5)-백탑 아래 맺은 인연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마당으로 나와 서늘한 바람을 쐬노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위에 달님을 인 채 탑은 고요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처럼 책을 읽다가 마당을 서성이고 있을 벗들의 발짝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저마다 가슴속에 담긴 외로움을 알아보고 탑이 우리를 차례로 부른 것인지, 탑의 따스한 기운에 이끌려 우리가 그 아래로 하나둘 모여든 것인지. 아무튼 우리는 서로의 숨결을 느낄 만큼 가까운 곳에 모여 살고 있었다.

백탑 아래 동네에서 옆동네 경행방과 이어지는 북동쪽 끄트머리에는 유득공과 그의 숙부들 집이 있었다. 정작 나와 동갑은 유득공의 숙부 유련(柳璉)이었으나, 가슴속의 이야기를 다 터놓을 만큼 허물없는 벗으로 지낸 이는 나보다 일곱 살 아래인 유득공이었다. 늘 환한 웃음을 띠고 있는 그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는 바람처럼 가볍게 이곳저곳 다니기를 즐겨했는데, 그때마다 사소한 옛 이야기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환한 얼굴에 부드러운 울림이 좋은 그의 목소리로, 예와 지금의 갖가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우리들의 큰 기쁨이었다.

내가 백탑 아래로 온 지 이태 뒤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이사 오셨다. 우리 집과는 사립문을 나란히 하고 있을 만큼 가까웠기에, 연암 선생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내 집에도 자주 들렀고 때로는 우리 집에 왔다가 함께 선생 댁으로 가기도 했다. 선생 자신이 이름난 사대부 집안의 자손이고, 드나드는 사람들 또한 우리 같은 서자보다는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이 많았다. 그러나 선생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스한 눈빛으로 시원스러운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 사람의 위치나 처지보다는 사람됨을 먼저 보셨다. 나와 벗들을 조이고 있는 무거운 신분의 사슬도, 연암 선생의 방 안에서는 느슨해졌고 나중에는 의식조차 못했다.

우리를 자애롭게 대해 주기는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남산 아래에 살고 계셨지만, 연암 선생을 자주 찾아오셨고 우리도 연암 선생과 함께 선생 댁을 자주 찾아갔다. 자그마한 체구에 목소리도 낮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에는 그 뜨거운 기운이 방 안을 다 채우고도 남았다. 선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복잡한 수식과 자연 세계의 규칙들 듣노라면, 내가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역학이나 천문학에도 나름대로 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곤 하였다.

남산 아래에는 또한 나의 벗이자 처남인 백동수(白東修)와 박제가(朴齊家)가 살고 있었다. 백동수는 우리들 가운데 유일하게 무예에 뜻을 두고 있는 벗이었다. 그가 활을 쏘는 모습이나 복검을 휘두르며 수련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와 벗들의 가슴도 왠지 후련해졌다. 다부진 몸집에 눈빛이 날카로운 그와 함께 걷노라면, 우리들의 어깨도 조금씩 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벗들 가운데 특히 박제가에게 어쩐지 마음이 많이 쓰였다. 박제가는 누구에게나 할 말을 거침없이 다 하였고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솔직히 드러내었기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거나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그를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언뜻 보기에는 대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라는 이름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제 몸과 마음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 다음, 나라를 바로 다스려 세상을 평안하게 한다.)’ 의 그 제가(齊家)를 말한다. 아름답게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에도 관심이 많아,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살펴보고 나아질 방법을 찾아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제가와 백동수는 남산 아래에 살고 있었지만, 아마 제 집에서 보낸 시간보다는 백탑 아래에서 우리들과 함께 보낸 밤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42~45쪽)

 

안소영 지음,『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 진경문고, 2011./ 2011년 구미시 『한책 하나구미 운동』지정 도서

 

 

 

 

 

 

 

 

 

 

 

 

 

 

 

 

 

 

 

 

 

 

 

36. 책만 보는 바보(6)-어찌 눈으로만 책을 읽는다고 하는가

 

나의 호, 청장(靑莊)은 푸른 백조를 말한다. 청장은 고요히 물가에 살면서, 눈앞에 지나가는 고기를 필요한 만큼만 먹고사는 맑고 욕심 없는 새라고 한다. 하늘처럼 미더운 새라는 뜻인지, 하늘도 그 고요한 성품을 믿는 새라는 뜻인지, 사람들은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높여 부른다.

나도 그리 살고 싶었다. 달리 누리는 것이 없어도 좋으니 그저 약간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책 속의 글귀들로 머리와 가슴을 채우며 고요히 한자리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간절한 바람에 지나지 않아서, 오랫동안 내게는 마음 편히 머무를 곳이 없었다. 백탑 아래, 벗들이 공부방을 지어 주면서 비로소 나의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청장이 푸른 날갯짓을 하듯이, 나는 날마다 방 안에서 책 속을 누비며 다녔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하고,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마음껏 내 발자국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림을 보듯, 소리를 듣듯, 나만의 작은 방에서 마음껏 책 속에 빠져 들었다.

사람들은 그저 눈으로 책을 읽는다고 한다. 그러나 책과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통로가 어찌 눈뿐이겠는가?

 

나는 책 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머나먼 북쪽 변방의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 먼 옛날 가을 귀뚜라미 소리가 책에서 들린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두보(杜甫)는 귀뚜라미 소리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서글픈 거문고와 거세게 떨리는 피리 소리

그 곡조도 따르지 못하는 이 천진함!

-두보,<귀뚜라미> 중에서

 

사람들은 흔히 귀뚜라미 소리를 서글프다거나 애절하다고 하지, 천진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울고 있는 귀뚜라미를 가만히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운다는 것도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실어 그러게 표현할 뿐, 귀뚜라미는 그저 앞날개를 열심히 비비며 소리를 낼 뿐이다. 밤새도록 계속되는 그 움직임은 무척이나 진지해 고지식해 보이기까지 한다. 너무나 진지해서 천진하고, 천진하기에 맑아, 우리 몸에서 가장 맑고 가느다란 감정의 핏줄과 쉽게 섞이는 것이 아닐까.

두보의 실을 읽으며 나는, 내 핏줄이 떨리는 듯한 귀뚜라미 소리를 새롭게 듣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덩달아 나도 천진해지고 맑아지는 기분이다.

책 속에는 또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세상살이와 사람살이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있고, 그늘진 신세를 한탄하는 울적한 목소리도 있다.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노니

세상에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구나.

창밖은 한밤중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 내 마음은 만 리를 달리네.

-최치원, <가을 밤 지는 내리고>에서

 

천 년 전, 신라의 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목소리이다. 그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당나라에서 유학하였다. 그곳에서 보장된 출세도 마다하고 돌아왔지만, 쇠하여 가는 어지러운 신라는 꿈에 그리던 고국이 아니었다. 한밤중,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되뇌어 본다. 세상에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구나. 나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달리 들어줄 사람이 없어, 책에다 대고 이야기해야만 하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틀림없이 외로웠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달래 주고 싶은 나는, 그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내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럴 때면 누군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또한 그림을 보듯 책을 본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울창한 숲을, 책은 나에게 보여 준다. 그 숲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뎌 본다. 높이 뻗은 아름드리나무들은 하늘마저 조각내 새롭게 보이게 하고, 채 마르지 않은 아침 이슬은 내 무릎을 적신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날, 그 숲에는 발자국 몇 개가 드문드문 찍혀 있다. 나처럼 책 속을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국이리라.

 

종일토록 산을 봐도 산은 싫지가 않아

산에 터를 잡고 그곳에서 늙어 가리라.

산에 핀 꽃 다 져도 산은 그대로이고

산골 물 흘러만 가는데 산은 마냥 한가롭구나.

-왕안석, <종남산에서> 중에서

 

옛 중국 송나라의 젊은 재상 왕안석(王安石)이 쓴 시이다. 기울어 가는 송나라를 새롭게 일으키려고 애를 썼으나, ‘신법(新法)’이라 불리던 그의 개혁은 반대파에 밀려 실패했다. 쓸쓸히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종일토록 산을 바라본다. 변화무쌍한 사람살이에도 불구하고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지가 않다. 그곳에서 터를 잡고 늙어 가리라 생각하지만, 어딘가 조금은 쓸쓸해 보이고 귀밑머리는 어느새 희끗희끗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이렇게 그림을 보듯 그를 보고 있다. 종일토록 들여다보아도 그의 산처럼, 책이 보여 주는 그림이 싫지 않다.

 

어떨 때는 책에서 냄새가 나기도 한다.

사람의 손때와 먼지, 습기를 머금은 책 특유의 냄새가 아니다. 자연이 저마다 독특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그런 냄새이다.

 

멀리서 안타까워하나니, 고향의 국화는

분명 싸움터 곁에 피어 있으리.

-잠삼(岑參),<군영에서 9월 9일 고향 장안을 생각함> 중에서

 

전쟁터가 된 고향을 그리며 노래한 시이다. 싸움터가 되어 버린 고향에도 올가을엔 어김없이 국화꽃이 피어 있겠지. 그윽한 국화꽃 향기와 함께 다가오는 싸움터의 피비린내는 더욱 서글프기만 하다. 코를 넘어 창자 깊은 곳까지 들어가, 그야말로 애끓는 아픔으로 다가 온다.

오랫동안 비워 둔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노래한 시도 있다. 눈이 따갑도록 매캐한 연기 냄새가 싫지 않고 반갑다. 모처럼 찾아온 평화와 오랜만에 피어난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반가워 그 냄새가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다.

책을 대할 때마다 이렇게 눈과 귀, 코, 입 등 내 몸의 모든 감각은 깨어나 살아 움직인다. 자신과 연결된 신경과 핏줄을 건드리고, 피가 도는 그 흐름은 심장까지 전해져, 마침내 두근두근 뛰게 한다. 감격에 겨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온 우주가 다시 깨어 일어나기도 한다. (49~55쪽)

 

안소영 지음,『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 진경문고, 2011./ 2011년 구미시 『한책 하나구미 운동』지정 도서

 

 

 

 

 

 

 

 

 

 

 

 

37. 책만 보는 바보(7)-운명, 나라고 마음대로 하지 못할까

 

박제가의 집은 남산 아래에 있었지만, 그는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와 다른 벗들이나 스승과 어울렸다. 장가들어 신부를 맞이한 첫날밤에도 장인의 말을 빌려 타고 우리를 찾아올 정도였다. 백탑아래에서 우리와 함께 보낸 밤들이 많아지면서 그는 조금씩 달라졌다. 갑옷처럼 단단한 슬픔과 분노 아래 웅크려 있던 웃음이 슬며시 새어 나오기도 하고, 얼굴빛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가 하는 우스갯소리에 웃어주면서, 지금 저렇게 환하게 웃는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박제가가 맞는가, 문득 새삼스러운 적도 있다.

하긴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편하게 하지 못하는 말도 벗들과 함께 있으면 저절로 흘러나왔다. 잔걱정이 많고 소심하다는 이야기는 벗들에게도 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둡고 말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말이 많은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였다. 이렇게 가슴속에 있는 생각들을 서로에게 펼쳐 보이노라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가난, 앞날에 대한 걱정, 서자라는 운명의 굴레도 조금은 헐거워지는 듯하였다.

어느 날 멋들과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실 때였다. 술기운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박제가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운명이란 게 어디 별것인가요? 저는 나를 마음대로 하려 드는데, 나라고 저를 마음대로 못하겠습니까? 단단히 얽어매어 놓은 사슬 한 겹이라도 내 반드시 풀고 말 것입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보이지 않는 운명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주눅들게 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과 무기력감이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하여 우리 같은 사람은 낄 자리가 없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여 먹고 살 방도를 찾아보려 하려도 양반의 핏줄이라 하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럴 때 한스러운 것은 어머니가 물려준 보잘것없는 핏줄이 아니라, 아버지가 물려준 이기적인 양반의 핏줄이었다.

우리를 쥐고 흔드는 운명의 손길은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고 우리가 낄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저마다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으로 늘 마음이 떠돌곤 했다. 하지만 그뿐, 한 번도 내가 그 운명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날고 제깟 운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느냐라니, 과연 박제가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왜 주저앉거나 포기한 적이 없겠는가. 그도 벗들 없이 나처럼 혼자 보내야 했던 지난날들에는 수없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내가 포기하고 울분을 안으로 삭였다면, 성미가 불같은 그는 분노하고 폭발하며 울부짖었을 터이다. 그래도 그의 운명이나 나의 운명이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박제가의 절한 자신감과 배짱은 공통의 운명을 짊어진 채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벗들이 있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를 죄고 있는 운명을 완전히 벗어 던질 수 없다고 해도 좋다. 다함께 손잡고 운명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그 든든함이면 충분하였다. 서로의 손길이 닿아 있노라면 우리를 꽁꽁 동여맨 사실 한 겹이라도 풀 수 있지 않을까. 박제가는 우리에게 그렇듯 서늘한 바람 같은 벗이었다.(72~74쪽)

 

안소영 지음,『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 진경문고, 2011./ 2011년 구미시 『한책 하나구미 운동』지정 도서

 

 

 

 

 

 

 

 

 

 

 

 

 

 

 

 

 

 

 

 

 

 

 

 

 

 

 

 

 

38. 책만 보는 바보(8)-서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벗

 

박제가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미가 불같고, 입바른 소리를 잘한다. 그래서 도무지 섬세함이나 부드러움이라곤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의 갑갑한 처지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 본디 마음결은 무척 여리고 고운 사람인 것을 나와 벗들은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아이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땅바닥을 들여다본다거나,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박제가를 볼 때가 있다. 그의 눈길을 좇아가보면, 땅 위를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벌레나 나뭇잎 사이에 걸린 거미줄에 닿곤 했다. 내가 옆에 있는 것을 문득 깨달은 박제가는 겸연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저 거미줄만 보았을 뿐, 거미의 꽁무니에서 실이 나오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하였습니다. 거미는 어제도 오늘도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을 텐데요.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합니다. 제가 마음을 기울여 들여다보면 볼수록, 모든 사물은 제 모습을 더 세밀하게 보여 주니까요.”

사물뿐이겠는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길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는 비로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오게 된다. 좀 더 마음을 기울이면 그가 살아온 이야기, 그의 가슴속에 담은 생각들을 알게 된다. 더욱더 마음을 기울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벗이 되리라. 박제가와 나처럼. 우리와 다른 벗들처럼.(74~75쪽)

 

안소영 지음,『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 진경문고, 2011./ 2011년 구미시 『한책 하나구미 운동』지정 도서

 

 

 

 

 

 

 

 

 

 

 

 

39. 장길산(12권)-귀면

 

길산은 옥여의 말을 들으며 별로 흥겹지 않게 말하였다. 그는 미륵도 이래로 말 많은 선비나 대처 한량들을 미더워하지 않았다.

“큰스님께서는 반드시 조정의 실정과 벼슬아치들의 동향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신 모양이오. 또한 그 사람들을 통하여 진인이 궁궐에 좌정한 뒤에 우리와 손을 맞잡을 조정 대신들의 명부도 만들고 있고. 주상의 동정과 재상의 어질고 모자란 점이며 시사(時事)의 득실을 상세히 탐문하여 한양 성내에 서얼, 노비, 중인들의 힘을 규합하는 일이 그들의 소임이오.”

“저는 돌아가신 김기 삼촌 외에는 글줄이나 아는 자들을 믿지 않습니다.”

장길산은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우선 저들은 먹을 것이 있고 면전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혈족을 본 적도 없습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이란 정병을 장악하는 일이요 정사에 참섭하는 자리입니다. 어제는 동편에 붙어 환국을 도모하고 날이 새면 다시 서편에 붙어 어제의 동류를 저버립니다. 정병을 다투는 자들을 용화세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운부 큰스님께서 방편을 취하시어 집정의 방도로 세상을 바꾸려 하시지만 저희는 생각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오?”

“재물과 신분의 구별이 없는 대동세상은 가장 천한 것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도대체 진인이라 무엇입니까? 진인은 따로이 있는 게 아니라 역병에 쓰러져가는 팔도의 백성들이 다시 살아 환호하며 춤추는 세상에서 서로 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모든 이가 진인이지요. 차라리 왕후장상의 씨를 만들 바에는 북관의 곳곳마다 널려 있는 무인지경으로 들어가 우리끼리 용화세상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낫겠지요.”

옥여는 염주를 헤아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침울하게 되물었다.

“그러면 장두령은 거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저는 큰스님들로 하여 겨우 지각을 차린 자가 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산에서 경문과 참선만 겪다 보면 멀고 훌쩍이고 살려고 기를 쓰는 여염의 삶을 먼데서만 볼 수도 있습니다. 저희 활빈도는 참활빈하려면 땅을 모두 빼앗아 갈아먹는 이에게 고루 나누어주어야만 합니다. 그 일이 근본이요, 겨우 양곡이나 재물 등속을 빼앗아 나누어주고 지방 수령들이나 징치하는 것은 지엽말단이올시다. 근본이 서지 않는다면 집정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저희 활빈도가 백성의 군사임을 알고, 참용화 세상을 이루는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다닐 것입니다.”

길산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잃어버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옥여가 말하였다.

“그러한 뜻은 대성법주나 소승과도 같소이다.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한번으로 안 되면 몇 번이든 다시…… 어느 진인이 거듭 나타난다 하여도 세상이 비뚫어지면 쓸어 없애야 하오.”

길산은 그의 단검을 허리에서 끌러 옥여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제가 어린 무동 광대 시절부터 지녀왔던 물건입니다. 저는 이 칼로 저를 지키고 이것으로 저희를 둘러싼 양반들의 세상을 막아 내려 하였지요. 또한 이 칼은 북선 활빈도는 물론이요 팔도의 녹림당을 움직일 수 있는 신표이기도 합니다. 저희 활빈도는 이번 일이 어긋나더라도 실패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 활빈도는 이번 일이 어긋나더라도 실패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뒤를 이어서 계속될 테니까요. 제가 이 칼을 스님께 드리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칼을 신표로 삼아 전국의 녹림당을 규합하라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이제 장길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팔도 활빈도라는 수많은 무리들만 남기려는 뜻입니다.”

옥여는 길산의 단검을 받았다. 그는 강계로 가서 인삼을 받아 돈으로 바꾸어 군복 군기 등물을 준비할 작정이었다. 유황과 동철을 다량으로 준비하고 화승총과 창검을 만들어 금강산과 간성의 대성법주에게 장닉해둘 것이었다.

“한양에서 십일월중에 거사할 날짜가 정해지면 곧 파발을 보낼 터이니 대성법주의 강원도 병력과 철원에서 합대하여 주오.”

“명심하겠습니다. 하오나……”

길산은 진대골에 들어앉은 포실한 마을을 둘러보더니 옥여에게 말하였다.

“저희들은 서수라와 백두산 인근 일대에 광활한 무인지경을 보아두었습니다. 일이 성사가 안 되더라도 저희는 각처의 유민들과 더불어 그곳에 가서 다시 시작하렵니다.”

한달 뒤인 팔월에 옥여는 묘향산에 다시 들렀고, 묘향산에 다시 들렀고, 묘향산과 낭림산 일대의 병력이 길산에 운봉산 병력과 합대하여 북관을 휩쓸었다는 소문에 접하였다. 병자년의 거사계획은 동지가 다 지나도록 미루어지다가 해를 넘겨서 숙종 이십삼년 정월 초열흘에 고변(告變)이 먼저 터지게 되었다. 한양의 일을 맡았던 선비들 사이에서 배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인 열하루부터 추국청이 열려 한양의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체포당하였다.

그것은 장길산이 우려하던 대로 정병(政柄)에 대하여 집착하는 무리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반대파는 이를 이용하려 하였다. 급부도사와 토포 군사가 사방으로 풀려나갔으나 그들은 죄인의 문초에 나온 동참자들을 거의 포득하지 못하였다. 한양에서는 너무나 먼 산과 골짜기에 산사들이 흩어져 있고, 승려들은 거의가 호적과 군역에서 빠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활빈도는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양주 포천 여주 안성 등지의 경기도까지 출물하였으며 군관과 수령들이 난민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흉황은 그로부터 삼년 동안이나 더욱 극심해져서 수만 명이 굶어죽거나 역병에 걸려 쓰러져갔다. 임금은 장길산의 활동이 끊이지 않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탄식하며 비망기를 내렸을 정도였다.

극악한 도적 장길산은 날랜 표한함이 비할 자가 없어 여러 도를 왕래한다는데 종적을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의 도당(徒黨)이 이같이 번성하여 일년 이년 십년이 이미 지났어도 아직도 잡지 못하고 있도다. 양덕에서 군사를 풀어 포위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한 행적을 알 수가 있구나. 죄인들의 초사(招辭)를 보면 더욱 극히 원통하도다. 비록 그 말을 믿기는 어려우나 이 도적이 나타나기 전에는 내 걱정 근심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 반드시 여러 도에 비밀히 지시하여 소재를 상세히 탐지하고 따로이 군대를 풀어서 소탕하여 후환을 없게 하라.

 

그러나 장길산 활빈도는 날랜 북방마와 황색 바탕의 깃발로써 일반 백성들은 누구든지 알아볼 수가 있었지만, 오히려 마을을 지날 때면 백성들 쪽에서 관군의 동향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기찰에 나선 경군 장교들도 감히 그들이 은거하여 있다는 소문이 낭자한 곳에는 들어가지도 못하였으니, 먼저 가서 돌아오지 않은 자가 여럿이었던 까닭이다. 세상의 소문에는 장길산이 압록강변의 벽동 수백리의 골짜기 안에 깊이 숨었다고도 하고, 또는 두만강 하류 서수라의 광활한 숲과 호수 사이에 대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다 하였지만, 아무도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활빈도의 깃발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계유년에 시작되었던 흉황은 기묘년까지 계속되어 여셧 해 동안에 이십오만삼천여 호가 줄고 백사십일만육천여 명이 호적에서 사라졌다. 죽은 이도 많았으나 스스로 조세와 군역에서 빠지고 여염 세상을 등진 자들도 적지 않았으며, 나라에서는 이들을 백성으로 재편성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조정에서는 무엇보다도 장길산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 점에 골치를 앓았다. 사방에서 장길산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났고 활빈도를 흉내내는 무리들이 삼남에서도 벌떼처럼 늘어가고 있었다. 병조판서 이세화(李世華)는 밀령을 내리기를, 장적의 소문이 가장 번성하고 민심이 가라앉지 않는 지역에서 장적을 자처하는 자가 되었거나 그에 관한 유언을 퍼뜨리는 자들을 본보기로 극형에 처하라고 지시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의 소문이 가장 번성하였으니 그의 출몰이 잦았던 곳이요, 구월산과 자비령 일대에는 그가 지척에 다시 돌아왔다는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평안도에서는 평양 외곽의 순안 장터에서 그리고 해서에서는 자비령 인근 봉산에서 중인 환시 가운데 본보기의 극형을 치를 필요가 있게 되었다.

 

-황석영, 『장길산』12권. 창비, 2004 개정판 1쇄, 282~286쪽.

40. 천국의 열쇠-치셤 신부

 

갑작스러운 발소리가 그의 명상을 깨뜨렸다. 얼굴을 들고 돌아보니 문이 열려진 사이로 초라한 강가의 인부에게 안내되어 세 수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긴 여행길의

피로와 먼지에 싸여 완전히 지친 모습들로 불안의 빛을 띠고 있었다. 수녀들은 약간 주저하더니 피로한 걸음으로 마당의 작은 길을 걸어 들어왔다. 앞장을 선 사람은 마흔 살 전후의 기품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얼굴의 선이 섬세한데다가 커다란 푸른 눈이 고귀한 집안의 출신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몹시 피로해서 창백한 안색인데도 품위 있는 자세로 걸음걸이도 꼿꼿했다. 수녀는 프랜치스를 잘 보지도 않으면서 유창한 중국말로 말을 걸었다.

“ 저, 성당의 신부님에게로 안내해 주세요.”

그는 세 수녀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질려 버려 자기도 중국말로 대답해 버렸다.

“당신들은 내일에야 도착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다시 저 무시무시한 배로 돌아가라는 말씀인가요?”

그녀는 몸을 떨며, 겨우 노여움을 참는 말투로 말했다.

“어쨌든, 신부님께 안내해 주세요.”

그는 이번에는 영어로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치셤 신부입니다.”

그 때까지 성당의 건물로만 시선을 보내고 있던 그녀의 눈이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와이셔츠만 입고 있는 작은 사나이에게 들여졌다. 그녀는 신부의 작업복과 더러운 손, 진흙이 묻어 있는 구두와 진흙이 튀어오른 뺨을 차례차례로 훑어보며 차츰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A.J.크로닌/유희명 옮김,『천국의 열쇠』(하), 행복,2002, 22~23쪽.

 

 

 

 

 

 

 

 

 

 

 

41. 박제가의 북학의(1)

- 정조 22년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棆音)이 내려지자 이 때를 기해서 上疏의 형식으로 바쳐 세상에 알려지게 됨.

 

1. 서문

 

나는 어렸을 적에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말채찍을 휘둘러서라도 그분들의 시대를 따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고운은 당나라에 건너가 진사(進士)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신라의 풍속을 변화시켜 중국과 같은 문명국으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때를 잘못 만나 가야산에 숨어 살게 되었기에 그의 마지막 삶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중봉은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가 지은 『동환봉사』는 아주 정성스럽게 지은 것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많다. 그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신을 깨우치려 했고,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따르려고 하였으니,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압록강 동쪽에서 천여 년 동안 이어온 이 조그만 나라를 변화시켜 중국과 같은 문명국에 이르게 하려던 사람은 오직 이 두 사람뿐이었다.

올 여름에 진주사가 청나라로 떠날 때 나도 청장 이덕무와 함께 따라갔었다. 덕분에 연주와 계주 지방을 돌아보고 오․촉의 선비들과 교제할 수가 있었다. 수개월을 머물면서 듣지 못하던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옛 습속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옛날 사람들이 나를 속이지 않았음에 감탄하였다.

그 습속 중에서 우리 나라에서 행하던 날마다 사용하기에 편리한 것을 글로 적고 그 행함의 이로움과 해로움에 덧붙여 설명하여, 『맹자』에 나오는 진량의 이야기를 본받아『북학의』라 이름하였다.

비록 그 말들이 자질구레하여 소홀히 여기기 쉽고 번잡하여 행하기 어려움도 있으나, 옛 임금들도 백성을 가르칠 때에 집집마다 전하여서 깨우쳤던 것을 아니다.

그러나 절구를 한번 만들자 온 천하가 곡식의 껍질을 벗길 수 있게 되었고, 신을 한번 만들자 온 천하에 맨발로 다니는 자가 없게 되었다. 배와 수레를 한번 만들자 온 천하의 물건들이 험한 곳에 막혀서 유통되지 못함이 없게 되었으니 그 가르친 법이 얼마나 간편하였던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릇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하는 데 하나라도 빠지면 위에서 베푼 올바른 덕[正德]을 침해하는 까닭에, 공자는 “백성이 많아지면 부유하게 해주고, 부유해지면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관중(管仲)은 “의식이 풍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하였다.

지금 민생이 날로 곤궁해지고 재용(財用;재물의 용도)이 날로 궁핍해지는데 사대부는 팔장만 낀 채 구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옛 것에만 의존하여 편안하게 지내다보니 이를 모르는 것인가?

주자(朱子)가 학문을 논할 때 “이렇게 하여 병이 되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약이 된다”고 하였다. 진실로 병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 약은 곧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병이 되는 것의 원인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비록 그 말이 지금 시행되지 않는다 해도 그 마음만은 후세를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고운과 중봉의 뜻이다.

 

2.

학문하는 길에는 방법이 따로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을 잡고서라도 물어 보는 것이 좋다.

비록 종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많이 알면 극에게서 배우는 것이 도리이다.

 

-순 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잘 배우려 한 데에 있었던 것이다.

 

- 장차 학문을 하려고 하면 중국을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의구스럽기만 하다.

이런 점을 말하면 식자들은 “지금 중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오랑캐들이니 그것을 배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면서 중국의 옛 제도까지 더럽게 여긴다.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42. 박제가의 북학의(2)

- 정조 22년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棆音)이 내려지자 이 때를 기해서 上疏의 형식으로 바쳐 세상에 알려지게 됨.

 

<내편>

1. 저자(市井)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 시장의 융성함을 보고는 “이(利)만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하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다.

장사치라고 하는 부류도 사민(四民 : 사농공상의 보통민) 중의 하나이므로, 사․농․공에 통하는 것으로 이들 인구가 십분의 일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쌀밥을 먹고 비단옷만 입으면 그 밖의 것은 필요 없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쓸모없는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쓸모 있는 물건과 통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쓸모 있는 물건도 장차는 모두 한 곳으로 치우치게 되어 제대로 유통(流通)되지 못한 채 한 쪽에서만 이용하게 됨으로써 모자라기 쉽게 된다.

그러므로 옛 성황(聖皇)이 주옥(珠玉)과 화폐(貨幣) 등을 만들어 가벼운 것으로써 무거운 것을 대신하게 했던 것이다. 즉 쓸모없는 것으로 쓸모 있는 것을 돕도록 한 것이다.

또 배와 수레를 만들어서 험하고 막힌 곳을 통하게 하였으면서도 천리 만리나 되는 먼 곳의 물자가 유통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염려를 하였다 하니, 성왕이 얼마나 널리 애를 썼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도 지방이 수천 리나 되고 백성이 적지 않으며 물자도 구비되어 있건만, 산과 물[澤]에서 생산되는 물자도 다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제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날마다 쓰이는 것에 대한 일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연구하지도 않으면서, 중국의 가옥(家屋)․거마(車馬)․단청(丹靑) 비단 등의 훌륭한 것을 보고 “아주 사치가 심하다”고 비웃고만 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사실 사치하다가 망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는 검소한 데도 쇠퇴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나라 안에 구슬을 캐는 집이 없고 시장에 산호 따위 등의 보내가 없다. 또 금과 은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가도 떡을 살 수 없는 형편이다.

이것이 참으로 검소한 풍속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이것은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할 줄 모르니 생산할 줄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은 나날이 궁핍해 가는 것이다.

무릇 재물은 우물과도 같다. 우물은 퍼서 쓸수록 자꾸만 가득 채워지는 것이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리고 마는 것이다. 비단을 입지 않으니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어지게 된 것이고, 이로 인해 여공(女功)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그릇이 비뚫어지든 어떻든 간에 개의치 않으므로 예술의 교묘(巧妙)함을 알지 못하니, 나라에 공장(工匠)과 도야(陶冶: 질그릇을 굽는 곳과 대장간)가 없어지고, 또한 기예(技藝)도 없어지고 말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농사도 짓는 방법을 몰라서 흉년이 자주 들고 장사도 물건을 팔 줄을 몰라서 이(利)가 박하기만 하다.

그러니 사민(四民)이 모두 곤궁하여져서 서로 도울 길이 없게 된 것이다.

조금 생산되는 보배도 나라 안에서는 이용하지 않으므로 외국으로 흘러들어가 버리고 마는 실정이며, 남들은 나날이 부강하여지건만 우리는 점점 가난해져 가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당연스런 추세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98~100쪽)

 

2. 장사꾼[상가(商賈)]

 

중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장사꾼이 되는데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거기서는 장사꾼으로 나서도 그 사람의 풍류(風流)와 명예는 그대로 인정된다. 그렇게 때문에 유생(儒生)은 직접 서점에 출입하며, 재상(宰相)들이라 할지라도 친히 융복사(隆福寺) 시장에 가서 골동품을 사기도 한다. 지체 높은 사람이 물건을 사러 융복사에 온 것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다.

우리 나라 같으면 그런 신분으로 시장에 출입하면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일이 아니다.

지금 청국의 이런 풍속은 어제 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벌써 명․송 시대부터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겉치레만 알고 꺼리는 일이 너무 많다. 사대부(士大夫)는 놀고 먹으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사대부로서 가난하다고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 알아주는 자 없고, 짧은 바지에다 대나무껍질 갓을 쓰고 시장에서 물건을 매매하거나, 자와 먹통, 칼과 끌을 가지고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이를 또 우습게 여겨 혼인길마저 끊어진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집에 비록 돈 한 푼 없는 자라도 높다란 갓에 넓은 소매가 달린 옷으로 어슬렁거리며 큰소리만 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입는 옷이며 먹는 양식은 다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자연히 그들은 권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요행을 바라는 길이 열리게 되고 청탁(請託)하는 버릇이 생기게 된 것이니, 시정(市井)의 장사치들도 그들이 먹던 나머지를 더럽다 할 것이다. 그러니 중국 사람이 장사하는 것보다 못함이 분명하다.(102~103쪽)

 

3. 은(銀)

우리 나라에서는 해마다 수만 냥의 은을 중국에 수출하여 약재(藥材)와 주단(紬緞) 따위를 무역해 온다.

그런데 저쪽의 은을 우리 나라 물건으로 바꿔 오는 경우는 없다. 은은 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약은 반나절이면 소화되어 버리고 비단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에 써버리면 반 년이면 썩어 버린다.

이와 같이 천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물건을 반나절, 반 년이면 없어지는 물건과 바꾸며 한정된 산천(山川)의 재원(財源)을 한 번 내보내면 돌아오지 않는 지역에 수출하니 나날이 귀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릇 화폐란 것은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104쪽)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43. 박제가 북학의(3)

- 정조 22년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棆音)이 내려지자 이 때를 기해서 上疏의 형식으로 바쳐 세상에 알려지게 됨.

 

1. 재목(材木)

 

중국에는 나무는 비록 귀하나 재목은 많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나무는 많으나 재목이 귀하다.

왜 그럴까.

요동벌 천 리를 가도 산이 없건만 거대한 재목은 성처럼 쌓였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미칠 바가 아닌 듯하다. 이것은 모두 장백산(長白山)에서 뗏목을 만들어 압록강에 띄운 다음 바다를 통해 가져온 것이다.

우리 나라는 서울에서 백 리 밖이면 소나무, 잣나무가 하늘을 가리었건만 궁실(宮室)과 관곽(棺槨)에 소용되는 재목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모두 운반하는 기구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 벌채한 재목은 한자 한 치도 서로 어긋남이 없으니 그 정밀함이란 놀랄 지경이다. (106쪽)

 

2. 거름[분(糞)]

중국에서는 거름을 금같이 아낀다. 재[회(灰)]를 길에 버리는 일이 없고, 말이 지나가면 삼태기를 들고 따라가면서 말똥을 줍는다.

(중략)

똥을 거름으로 쓸 때에도, 물을 타서 진한 흙탕 같게 한 다음 바가지로 퍼서 쓰는데, 이는 그 효력(效力)을 고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마른 똥을 그대로 쓰므로 효력이 흩어지게 되어 완전하지 못하다.

성안에서 나오는 분뇨(糞尿)를 다 수거하지 못하므로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다.

냇가 다리 옆 석축(石築)에는 사람의 똥이 더덕더덕하게 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는다. 깨똥과 말똥이 사람의 발에 항상 밟히게 되니, 이것만으로도 밭을 잘 가꾸지 않는다는 것을 말 수 있다. 똥은 남겨 두고 재는 모두 길에다 버리니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눈을 뜰 수 없다. 이리저리 날려서 많은 집의 술과 밥을 불결(不潔)하게 한다. 사람들은 그저 불결함만을 탓할 뿐, 그것이 함부로 버린 재에서 생기는 것인 줄은 모른다.

대체로 시골에는 사람이 적은 까닭으로 재를 구하려고 해도 많이 구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성안에는 한 해 동안의 재만 하여도 몇 만 섬이나 되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것을 모두 버리고 이용하지 않는데, 이것은 몇 만 섬 곡식을 버리는 것과 같다. (126~127쪽)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44. 박제가 북학의(4)-1만리나 되는 길을

 

1만리나 되는 길을 사람으로 하여금 도보로 따라가게 강요하는 일은 오직 우리 나라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도보로 따라가게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또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좌우로 떠나지 못하고 빠르거나 느리거나 간에 말과 똑같이 보조를 맞추게 한다. 그러므로 중국에 들어가는 마졸(馬卒)은 모두 죄수의 머리처럼 봉두난발을 한 채 마른 땅 진창을 가리지 않고 마구 다닌다. 다른 나라에 보이는 부끄러운 꼴로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 또 그들은 너무 과도하게 땀을 뻘뻘 흘리거나 숨을 헐떡거려도 감히 쉴 수가 없다. 온 나라 안의 종이나 역부(役夫)의 질병도 모두 여기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

일본 덕천가강(德川家康)은 이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무릇 물건을 절도 없이 실으면 소나 말이 많이 상한다. 이것은 어진 사람이 행할 정사가 아니다. 지금부터는 싣는 물건은 몇 근으로 제한하니 그 외에는 더 싣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짐승도 오히려 저런 정도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우해야 하겠는가?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33쪽.

 

 

 

 

 

 

 

 

 

 

 

 

 

 

 

 

45. 박제가 북학의(5)-소[牛]

 

통계를 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백 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成均館)과 한양(漢陽) 오부(五部) 안의 24개 푸줏간, 그리고 3백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작은 고을의 경우에는 날마다 도살하지는 않지만 큰 고을에서는 두어 마리씩 도살하므로 결국은 날마다 잡는 셈이 된다. 또 서울과 지방에서 벌어지는 혼사, 연회, 장례, 활쏘기 할 때에 잡는 것과 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그 수를 대충 헤아려보면 위의 5백 마리라는 통계가 나온다.

소는 열 달 동안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나고 세 살배기가 되어서야 새끼를 낳을 수 있다. 몇 년에 한 마리를 낳은 소를 날마다 5백 마리씩 도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소가 날로 품귀를 겪는 현상이 당연하다. 이에 따라 소 한 마리를 구비하고 있는 농부가 드물어 항상 이웃사람에게 소를 빌리고, 그로 인해 그 일수를 계산하여 품앗이를 해준다. 따라서 농사가 제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소를 일체 도살하지 않는다면 몇 년 안에 제 시기를 놓쳐 농사짓는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는 다른 가축이 없어서 소의 도살을 금하면 결국 고기가 없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는 그렇지 않다. 반드시 소의 도살을 금한 다음에야 백성들이 다른 가축을 키우기에 힘을 들일 것이고, 그러면 돼지와 양이 번식할 것이다.

여기 돼지를 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돼지 두 마리를 등에 지고 가다가 서로 짓눌려 죽었기에 잡아서 팔았다고 한다면 다 필지를 못해 하룻밤을 묵히는 고기가 남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소고기가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돼지고기나 양고기가 우리나라 사람의 식성에 맞지 않으므로 질병이 생길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 역시 그렇지 않다. 음식은 자꾸 먹어 버릇하면 습관에 의하여 먹을 수가 있다. 그런 식이라면 중국 사람들이 돼지고기나 양고기를 먹으므로 전부 병이 들어야 하지 않는가?

율곡(栗谷) 선생은 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고 말하기를, “그들의 힘을 빌려 밥을 먹으면서 또 그들의 고기를 먹어서야 되겠는가?”하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한 도리이다.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81-82쪽.

 

 

 

 

 

 

 

46. 박제가 북학의(6)-통역[譯]

 

청(淸)나라가 흥성한 이래로 우리 조선의 사대부는 중국과 연계된 일체의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억지로 사절(使節)을 받들어 청나라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일체의 행사나 문서와 대화를 주고받는 일을 모조리 역관에게 맡겨버린다.

책문(柵門)에 들어서서 연경에 이르기까지는 2천 리 길인데 경과하는 고을의 관원과 상견례 하는 법이 없다. 다만 각 지방에 통관(通官)이 배치되어 각 지방에서 사절을 접대하고 말에게 먹일 꼴과 사절이 먹을 식량을 공급하는 일이나 처리할 뿐이다. 저들의 의도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저들을 싫어하여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예부(禮部)와 접촉을 한다 해도 입으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으랴? 역관이 이러저러하다 하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조선관(朝鮮館) 안에 틀어 박혀 있다 보니 눈으로 무엇을 관찰할 수가 있으랴? 역간이 이러저러하다 하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보아도 지척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통관이 “뇌물을 좀 달라”고 요구하면 역관들은 그들의 조종을 달게 받는다. 그들은 저들의 뜻을 받들어 허둥대면서 혹시라도 저들의 마음에 들지 못할까 벌벌 떤다. 그 사이에 한없는 계략이 숨어 있기라도 한 듯이 늘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역관들을 너무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지만 그렇다고 너무 믿어버리는 것은 안 된다.

또 사신을 해마다 새로 파견하기 때문에 사신으로 가는 일이 해마다 생소하다. 다행스럽게도 천하가 평화로운 시절이라 서로 관련된 기밀이 없으므로 역관들에게 통역을 맡긴다 하더라도 별다른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의의 전란이라도 발생한다면 팔짱을 긴 채 역관의 입에 쳐다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사대부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각이 미친다면 그저 한어(韓語)를 익히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만주어나 몽고어, 일본어까지도 모두 배워야만 수치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110-111쪽.

 

 

 

 

 

 

 

47. 박제가 북학의(7)-거름[糞]

 

중국에서는 똥을 황금처럼 아낀다. 길에는 버려진 재[회(灰)]가 없다. 말이 지나가면 삼태기를 들고 그 꽁무니를 따라가서 말똥을 거두어들인다. 길 옆에 사는 백성들은 날마다 광주리를 가지고 가래를 끌고 다니며 모래틈에서 말똥을 가려 줍는다. 똥더미를 쌓되 네모 반듯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세모가 나게 하거나 여섯 모가 나게도 한다. 다만 똥더미 아랫니 둘레에는 고랑을 파서 똥에서 새어 나온 물이 어지럽게 흘러 내려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똥을 거름으로 사용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똥을 물레 섞어서 되게 반죽한 진흙처럼 만들고 이를 바가지로 퍼서 거름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거름을 골고루 뿌리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는 마른 똥을 거름으로 사용하므로 거름의 효과가 분산되어 온전하지 못하다. 성내(城內)의 똥을 완전히 거두어들이지 않기 때문에 악취가 길에 가득하다. 냇가의 다리 석축(石築) 가에는 마른 똥덩어리가 군데군데 쌓여 있는데 큰 장맛비가 아니면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개똥이나 말똥은 항상 사람 발에 밟힌다. 논밭이 제대로 가꾸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러한 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똥이 남아돌 뿐만 아니라 재도 완전히 길거리에 버려진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눈을 뜰 수가 없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바람에 날린 재는 가가호호 술과 음식의 불결을 초래한다. 사람들은 음식의 불결함을 탓하기나 할 뿐이고 불결의 원인이 실은 버려진 재에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그런데 시골은 사람이 적기 때문에 재를 구하고자 해도 많이 얻을 수가 없다. 지금 한양 성안에서 한 해에 나오는 재가 몇 만 섬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도리어 이것을 내버리고 전혀 사용하지 않으므로 수만 섬의 곡식을 버리는 것과 똑같다.

또 법률에 “더러운 분뇨를 흘려보내는 도랑을 길옆에 내는 자는 장형(杖刑)에 처하되 하숫물을 흘려보내는 도랑을 내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 라는 조문이 있다. 진(秦)나라 법에 “재를 버리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라는 이 법은 비록 상군(商群)이 만든 가혹한 법이기는 하지만 그 의도는 농업을 힘쓰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담당 관리가 재를 버리는 것을 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행위를 금한다면 농사에는 유익하고 나라는 청결하게 만들 테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135-136쪽.

 

 

48. 박제가 북학의(8)-과거론(科擧論)

 

무슨 목적이 있어서 선(善)을 행했다면 그 선행은 분명히 억지로 행한 위선이다. 무슨 목적이 없는데도 선을 행했을 경우 그 선행이야말로 진정한 선행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진정한 인재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불시에 그 인재를 시험해야 하며, 또 버림받은 많은 인재 가운데서 인재를 선발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인재의 수가 많아져 얼마든지 골라 쓸 수 있을 것이다.

버림받은 많은 인재들은 스스로 선을 그어 과거시험과는 단절된 채 무언가를 할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10여 일에서 한 달 정도만 과거에 쓰이는 문장을 공부해도 너끈히 합격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 제도를 잘 이용하는 자라면 그 제도를 이용해서는 중등(中等)의 선비를 낚을 수가 있고, 법을 초월한 제도를 이용해서는 상등(上等)의 선비를 낚을 수가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는 과거 문장을 이용하여 인재를 뽑고 있으므로 이익과 녹봉이 이 과거(문장)에 달려 있고, 공명이 이 과거(문장)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 태어난 사람은 이 과거를 통한 방법이 아니면 무슨 일을 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큰 뜻을 품은 선비라면 훌쩍 날아서 그 과거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저 과거를 비루하게 여겨 말도 꺼내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이 과거 문장은 옛날에 쓰던 문장이 아니고, 과거 제도는 옛날에 인재를 고르던 방법이 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 이 현세와는 부합하지 않고, 그가 배운 것이 자기 일신에는 아무 이익도 주지 못한다고 간주하여, 차라리 빈궁함과 굶주림의 생활을 달게 여길지언정, 차마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학문을 버리고 저 과거 보는 짓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159-160쪽.

 

 

 

 

 

 

 

 

 

 

49. 박제가 북학의(9)-가난 구제

 

현재 국가의 큰 폐단은 한마디로 가난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난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제 조정에서 사신 한 사람을 파견하여 중국 예부(禮部)에 이러한 자문(咨文: 중국와 왕복하는 공문서)을 보내십시오.

“가진 것을 다른 데로 옮기고, 없는 것을 얻고자 무역하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법입니다. 일본과 유구(琉球), 안남(安南), 서양의 무리가 모두 민(閩)․절강성․교주(交州)․광주(廣州) 등지에서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뱃길을 통하여 상인들이 통상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들은 반드시 아침에 요청하면 저녁에는 허가를 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당선(荒唐船)을 꾀어서 불러들여 가지고 안내자로 이용합니다. 황당선이란 모두가 광녕(廣寧) 각화도(覺化島) 백성으로 법을 어기고 몰래 바다로 나온 자들인데 항상 4월에 와서 방풍(防風: 한약재 이름)을 채취하여 8월에 돌아갑니다. 기왕에 저들의 행위를 금지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아예 교역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주고 후한 뇌물을 주어 친교를 맺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중략)

또 배와 수레, 가옥, 집기와 같은 이기(利器)에 관해 그들로부터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천하의 도서(圖書)를 국내로 들여게 할 수 있으므로 조선의 풍속에 얽매인 선비들의 편벽되고 꽉 막히고 고루하며 좁디좁은 견해가 굳이 깨뜨리고자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파괴될 것입니다.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200쪽.

 

 

 

 

 

 

 

 

 

 

 

 

50. 박제가 북학의(10)-나라의 좀벌레

 

저 놀고먹는 자는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이유는 사족(士族)이 날로 번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나라에 온통 깔려 있어서 한 가닥 벼슬로는 모두 옭아맬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을 처리할 방법이 반드시 따로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근거 없는 소문을 날조하는 무리가 사라지고 국가의 통치가 제대로 시행될 것입니다.

신은 수륙의 교통요지에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을 사족에게 허락하여 입적(入籍: 어떤 곳에 적을 올림)할 것을 요청합니다. 밑천을 마련하여 빌려주기고 하고, 점포를 설치하여 장사하게 하고, 그 중에서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그들을 권장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점차로 놀고먹는 추세를 줄입니다.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갖도록 유도하며, 그들이 가진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을 축소시킵니다. 이것이 현재의 사태를 바꾸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기만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피폐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재가 아주 드문데도 인재를 양성할 방도를 강구하지 않고, 재용(財用)이 날이 갈수록 고갈되는데도 소통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이 말세로 가니 백성이 가난하다”라는 핑계를 대니 이것은 국가가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중략)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 있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또 사촌간의 친지를 종으로 부리는 자가 있고, 머리가 허옇고 검버섯이 돋은 노인이 머리 땋은 아이들이 아랫자리에 끼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항렬의 어른에게 절을 하기는커녕 손자뻘 조카뻘 되는 자가 어른을 꾸짖는 일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쭐되며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며 자기야말로 예의를 지켜 중화(中華)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것은 우리 풍속이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202~204쪽.

 

 

 

 

 

 

 

 

51. 박제가 북학의(11)-사치와 검소

 

국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그 근본을 맑게 하는 데 힘쓸 뿐 그 지엽적인 것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 결과 행한 일이 간단하여도 거둔 성과는 거창합니다.

현재 국사를 논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신의 관점으로는 그들은 근본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다른 나라는 정말 사치로 인해 망한다고 해야겠지만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해 쇠퇴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화려한 비단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베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여인이 기능이 피폐해졌습니다. 노래하고 악기 연주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에 오음(五音)과 육율(六律)이 화음을 이루지 못합니다. 부서져 물이 새는 배를 타고, 목욕을 시키지 않은 말을 타며, 이지러진 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진흙이 바른 방에 그대로 살기 때문에 공장(工匠)과 목축과 도공의 기술이 끊어졌습니다.

더 나아가 농업은 황폐해져 농사짓는 방법이 형편없고, 상업을 박대하므로 상업 자체가 실종되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네 부류의 백성이 누구 할 것 없이 다 곤궁하게 살기 때문에 서로를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저 가난한 백성들은 아무리 날마다 채찍질을 해대며 사치할하고 몰아쳐도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대궐의 큰 뜰에서 국가의 의식을 거행할 때에 거적때기를 깔고 있습니다. 동서의 대궐에서 궁문을 지키고 있는 수비병은 무명옷을 입고, 새끼줄로 띠를 만들어 띠고 서 있습니다. 신은 정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실정을 고치려고 생각하지는 않고 도리어 민간 백성들이 대문을 높이 세우는 것이나 헐뜯고, 시정에서 가죽신을 신는 백성이나 잡으려 하고, 마졸(馬卒)이 뒤덮개를 하는 행위나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엽적인 것이나 건드리는 짓이 아닙니까?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북학의』, 돌베개(2003), 205~206쪽.

 

 

 

 

 

 

 

 

 

52. 오만과 편견-마지막 수업

 

예컨대 알사스(Alsace) 지역 주민들의 경우에는 혈통이나 언어, 문화적인 관습 등에서 게르만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그들은 주민투표를 통해서 기꺼이 프랑스 국민에 귀속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은 독일인으로 남아 있을 경우 독일의 봉건사회에 포박(捕縛)될 뿐이지만, 프랑스 국민의 일원이 된다면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성과들을 향유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그러니까 사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같은 단편소설은 언어나 문화 등 민족 구성의 객관적 측면에서 게르만이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80년 만에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역으로 되묻게 해줍니다. 특히 이 소설은 프랑스의 민족주의적 전회(轉回)를 상징하고, 나중에 그 아들인 레옹 도데가 프랑스의 극우조직인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caise)이 핵심인물이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제 ‘국민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나온 그 소설이 제 아이들의 교과서에도 여전히 실려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일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자기들도 교과서를 통해 그 소설을 읽었다더군요. 일본과 한국의 국가권력이 국민 만들기에 프랑스의 경험을 어떻게 이용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입니다만. <마지막 수업>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이나 중국은 일본에서 번역하고 만들어낸 민족 개념이나 민족 담론을 수입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서구의 민족 개념을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아들였는지, 또 민족어라는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전유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임지현․시카이 나오키,『오만과 편견』,청아문화사(2003), 106~108쪽.

 

 

 

 

 

 

 

 

 

 

 

 

 

 

 

53. 카멜레온(체홉)

 

새 외투를 입은 경철서장 오츄멜로프가 광장을 지나다가 마침 개에게 손을 물려서 피를 흘리며 개를 닦달하는 귀금속 상인 호류겐을 만난다.

진상을 알아본 서장은 개 주인을 찾아 손해 배상을 받음은 몰론 개를 풀어 놓은 과실을 엄중히 다스려야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이때 모여든 군중 틈에서 “저 개는 장군 댁의 것이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경찰서장은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여 피해자를 향해 “자네가 못에 찔려 가지고 연극을 하는 게 아니냐.” 욕설을 퍼붓는다.

이때 곁을 지나던 순경이 “저 개는 장군댁 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말하자 서장은 되받아 “글세 나도 알고 있어. 장군 댁의 개는 이보다 훨씬 큰 사냥개야.”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아닙니다. 저 개는 틀림없이 장군 댁의 것입니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서장은 순경에게 “자네 이 개를 장군 댁에 끌고 가 보이게. 내가 발견하여 보낸 거라고 말하게나. 잊지 말고.”

그런데 이때 장군 댁 요리사가 그 광경을 보고 “ 우리 집엔 이 따위 개는 없습니다.”고 내뱉는다. 화가 난 서장은 “이 따위 떠돌이 개를 당장 처치해 버려라.”고 고함을 친다. 그런데 그 요리사는 “서장님, 그러나 이 개는 장군님의 동생이 데리고 온 개입니다.”하고 말하고 지나가려 했다. 그때 지금까지 호통을 치던 서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럼 장군의 동생께서 오셨단 말인가? 자네가 끌고 가게.”

개에겐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그 요리사는 개를 데리고 가고, 서장은 호류겐을 혼내 줘야겠다고 위협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간다.

 

안톤 체홉, 「칼멜레온」

 

 

 

 

 

 

 

 

 

 

 

 

 

 

 

54. 열하일기(1)

 

후삼경자 우리 나라 성상 4년(청나라 건륭 45년, 정조 4년, 1780년) 6월 24일 신미일. 아침에 비가 내렸다. 온종일 비는 오락마락.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 더 가 구련성에서 노숙하였다. 밤에 큰비가 내리다가 곧 들었다.

 

당서(唐書)에 보면,

“고려의 마자수 馬訾水는 그 근원이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출발했으니 물빛이 오리 대가리빛처럼 푸르다 하여, ‘압록강鴨綠江’이라고 한다.

했다. 이른바 백산은 장백산長白山을 가리킨 것으로, 《산해경山海經》예는 ‘불함산不咸山’이라 쓰여 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 한다.

백두산은 여러 강물의 발운지로,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압록강이다. 《皇與考》에는,

“천하에 큰 강이 셋이 있는데, 황하, 장강, 압록강이다.”

하였고,

20쪽~21쪽.

 

의주 상인 중에서도 한가, 임가 같은 자들은 해마다 북경 드나들기를 제 집 문 드나들 듯 하여 북경 시장의 장사치들과는 아주 창자가 맞통하디시피 되었다. 물건을 사고 팔고, 값을 올리고 낮추는 것은 몽땅 이자들의 손아귀에 달려서 연화(燕貨) 값이 자꾸만 오르는 것도 전부가 이자들의 농간이다. 온 나라가 이 속을 모르고는 모두가 역관들의 소행인 줄만 알고 있다. 실상은 역관들도 자기들의 권리까지 의주 상인들에게 다 빼앗기고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할 분이다. 각자의 연상들도 이런 의주 상인들의 농간을 짐작하고 있지마는 눈앞에서 본 일이 아니니 속만 태울 뿐이요,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게끔 되어 이 폐단이 생긴 지 이미 오래다. 오늘도 이치들이 몸을 잠시 숨겨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은 필시 또 어데서 무슨 잔재주를 부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47~48쪽)

 

탁자 위에 술병들을 늘어놓았는데 한 냥쭝들이 병으로부터 열 냥쭝들이 병에 이르기까지 각각 크기가 달랐다. 모두 주석납으로 만들어 빚은 은빛이다. 넉 냥쭝을 내자면 넉 냥쭝들이 그곳에 부어 오고 보니 술을 사는 사람도 술을 다시 계량할 필요가 없어 그 간편한 법도가 이렇다. 술은 모두 백소주로서 맛은 그리 좋지 못하나, 선 자리에서 취했다가 돌아서면 깬다. 주위에 차려 놓은 범절을 보면 어느 한 구석이라도 빈틈이 없이 모두가 방정하고 물건 한 개라도 허투루 굴려 놓은 것이 없었다. 비록 소 외양간, 돼지우리까지라도 되는 대로가 아니라 일정한 법식이 있으며 심지어 거름더미 똥구뎅이까지도 그림같이 정갈했다.

옳다! 이렇고 난 후에야 이용(利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이용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있은 후에야 그 질서를 바로 잡을 것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모르고 그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몰라 생활 자료가 근본 부족하면서 억지로 잘 살겠다고만 한다면 어떻게 그 도덕과 질서를 바로잡을 것인가? (56~57쪽) -6월 27일에서-

 

또 못 보던 나무가 한 분 있는데 잎은 동백잎 같고 열매는 탱자같이 생겨 이름을 물으니, 무화과(無花果)라고 한다. 열매는 쌍쌍이 꼭지를 맺고 꽃은 피지 않으므로 ‘무화과’라 부른다고 한다. (63쪽)

 

6월 28일에서

방금 봉황성을 새로 쌓고 있는 중이다. 이 성을 안시성(安市城)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고구려 방언에 큰 새를 ‘안시’라고 하고, 지금도 우리네 속어에 왕왕 봉황을 ‘안시’라고 하고, 배암을 ‘白巖’이라고 음을 따서 붙인다. 수나라, 당나라 시절에는 우리 나라 말을 따라 봉황을 ‘안시성’이라 불렀고, 사성(蛇城)을 ‘배암성’이라고 했다하니, 이 말이 매우 이치에 닿는 말로 본다. (중략)

당 태종이 전국의 군대를 몰고 왔다가 이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성에 와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창황히 돌아서게 된 사적에는 다소 의심스러운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원리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당 태종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다만 중국 사서를 무턱대로 베껴 이를 사실로 삼았을 뿐이다. 심지어는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서 황제가 포위당한 것까지 인용하여 입증을 하였는데, 이 사실이 ≪당서≫나 사마광(司馬光)의 ≪통감通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고 본즉 중국에서는 이 사실을 꺼리는 줄 의심하고 조심하여 우리 나라의 전설 구문들은 그것이 믿을 만하건 못하건 간에 감히 한 구절도 싣지 않고 몽땅 빼고 말았다.

나는 여기서 말할 수 있다.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알을 잃어버렸는지는 똑똑히 고증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데는 분명히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당서≫를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요,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 한다고 썼고,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나, 이러고 보면 무엇을 표준삼아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다. 또 ≪지지≫에는,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 70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개평현으로부터 동으로 수암하까지 30리요, 수암하로부터 동으로 200리를 가면 봉황성이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말한 평양과 안시성의 거리가 약 500리쯤 된다는 것이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우리 나라 인사들은 기껏 안다는 것이 지금의 평양뿐으로, 기자가 평양에 도읍을 했더라 하면 이 말은 꼭 믿고, 평양에 정전(丁田)이 있었더라하면 이 말은 넙적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면 이 역기 믿으나 만약에 봉황성이 평양이었더라 하면 깜짝 놀랄 것이요, 더구나 요동에도 평양이 있었느라 한다면 아주 괴변으로 알고 야단들일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래 조선의 옛 땅인 것을 모르고, 숙신, 예맥과 동이의 잡족들이 모두들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던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오랄, 영고탑, 후춘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옛 강토임을 모르고 있다.

애달프구나!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여 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어 붙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아 혹은 압록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간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그려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어 언제나 사적을 따라다니게 된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 땅은 비단 요동분만 아니라 여진도 마땅히 들어간다고 주장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한서≫지리지에는 현도(玄菟), 낙랑은 있으나, 진번, 임둔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한나라 소제 시원 5년(기원전 82)에 4군을 합쳐 2부로 만들고 원봉 원년(기원전 80)에는 또다시 2부를 2군으로 고쳤는데, 현도 3개현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 25개 현에 조선이 있고, 요동 18현에 안시성이 있다. 그런데 진번은 장안으로부터 7천리 떨어져 있고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리 떨어져 있어 조선의 김륜이 말한 바와 같이 이 땅들은 우리 나라 안에서는 찾아 낼 수 없을 것이고 마땅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가 됨이 옭을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아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년에 부여, 읍루, 옥저에 들어갔고 부여는 다섯 부여가 되고 옥저는 네 개 옥저가 되어 혹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말갈로, 발해로, 여진으로 차차 변하게 되었다.

발해의 무왕 대무예가 일본의 성무왕에게 회답한 글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졌다.”는 구절이 있으니 이로써 본다면 한사군은 절반은 요동에 있고 절반은 여진에 있어 본래의 우리 강토를 가로지르고 있었던 사실이 명백하다. 한나라 이래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란 일정하지 아니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 인사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을 표준으로 삼고는 저마끔 패수 자리를 찾고들 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의 왼편 강물들을 몰밀어 패수라 하고 보니, 이정이 맞지 않고, 사실이 어긋남이 모두 이 까닭이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땅을 알고자 할진대 먼저 여진의 국경을 맞추어 보아야 할 것이요, 다음으로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패수의 자리가 확정된 뒤에야 영토와 경계가 밝혀질 것이요, 영토의 경계가 밝혀진 뒤에야 고금의 사실들이 부합될 것이다.(70-72쪽)

 

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열하일기상』, 보리, 2004.

 

 

 

 

 

 

 

 

 

55. 열하일기(2)-범의 꾸중(虎叱)

 

7월 28일에서

범이란 영특하고 갸륵하고 문무가 겸전하고 자애롭고 효성 있고 어질고도 슬기롭고 용맹이 놀랍고 장하여 천하에 적수가 없건마는 비위란 짐승이 범을 잡아먹고, 죽우란 짐승이 범을 잡아먹고, 박이라는 짐승이 범을 잡아먹고, 오색사자가 큰 나무둥치 구멍에 있다가는 범을 잡아먹고, 자백이란 짐승이 범을 잡아먹고, 표견이란 짐승이 날아서 범을 잡아먹고, 황요라는 짐승은 범이라 표범의 염통을 끄집어 내 먹고, 뼈가 없는 활이라는 짐승은 범을 만나면 짓찧어서 씹어 먹고, 범이 맹용이란 짐승을 만나면 눈을 감아 감히 쳐다보지를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맹용은 무서워하지 않고 범을 무서워하고 보니 범의 위업이란 대단하지 않은가? 범은 개를 잡아먹으면 취하고, 사람을 잡아먹으면 귀신이 붙는 법이다.

범이 첫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굴각’이라는 창귀(倀鬼)가 되어 범의 겨드랑 밑에 붙어서 범을 끌어다가 남의 집 부엌으로 들어가 범이 그 집 솥전을 핥으면 그 집 주인은 그만 배가 고파지면서 그 아내에게 밥을 시키게 된다고 한다. 범이 두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이올’이란 창귀가 되어서 범의 광대뼈 위에 붙어서 높은 데 올라가 망을 보다가 덫이나 함정이 있을 때는 앞질러 가서 덫틀을 풀어 놓아 버린다고 한다. 범이 세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육혼’이란 창귀가 되어 범의 턱에 붙어 있다가 제가 아는 친구들의 이름을 죄다 주워 섬겨 바친다고 한다.

하루는 범이 창귀들더러 호령조로 말했다.

“인제는 해가 저물어 가는데 어데 가서 끼니를 치를꼬?”

굴간이 있다가

“저는 벌써 저녁 끼니를 점찍어 두었습니다. 뿔난 놈도 아니요, 깃 달린 놈도 아니요, 대가리는 새까만 놈으로 눈 가운데 걸어간 발자국으로 보아서는 조작조작 걸음이 엉성하고 꼬리는 뒤퉁수에 올려 붙어 항문도 못 가리는 놈입니다.

하고, 이올이는 있다가,

“동문께에도 먹을 차반이 있는데 이름은 의원이라고 하며 입으로는 가지각색 풀을 뜯어먹어서 살에는 향내가 풍긴답니다. 서문께에도 먹을 차반이 있는데 이름을 무당이라고 합니다. 온갖 잡귀신에게 아양을 떨기 때문에 매일같이 목욕재계를 한답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고기 차반이나 골라 잡수시지요.”

하니, 범은 수염을 떨치고 얼굴빛이 금방 달라지면서,

“의원이란 건 의심이렷다. 알지도 못하고 의심을 가진 채 병 고치기를 시험하다가는 멀쩡한 사람들을 해마다 몇만 명씩 잡거든! 무당이란 건 무함이렷다. 귀신을 속이고 사람을 호려 일년에도 몇만 명씩 예사로 사람을 죽이거든! 이러고야 못사람의 노기가 그놈의 뼈다귀에 스며들어 금잠(金蠶)으로 화했을 터이니 독해서 그놈을 어떻게 먹을 것이냐!”

하니, 이번에는 육혼이 있다가 말하였다.

“여기야말로 맛좋은 고기가 숲속에 있습니다. 간은 어질고, 열은 의롭고, 충성을 안고, 결백을 품고, 풍류를 머리에 이고, 예절을 행하고, 입으로는 온갖 글을 다 외우고 세상에는 모르는 이치가 없다고 하여 이름인즉, ‘덕이 대단한 선비’라고 한답니다. 등판은 두드러지고 몸집은 뚱뚱하여 별의별 맛을 다 갖추고 있소이다.”

이 말을 듣자 범은 눈썹을 실록거리고 침을 개개 흘리면서 고개를 젖히고는 껄걸 웃으면서,

“응 그래! 무엇이 어째?”

물으니, 창귀들은 저마끔 꼬아 바치기를,

“음 하나와 양 하나를 일러서 ‘도’라고 하는데 이 오묘한 이치를 선비가 다 뚫어 맞혔답니다. 오행이 서로 낳고 육기가 서로 퍼지는 것은 다 선비가 이끌어 내는 조화랍니다. 세상에 맛좋은 고기로서야 이 위에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다. 범이 이 말을 듣고는 그만 실쭉해지면서 내색이 달라지고 몸을 다시 도사리면서 달갑잖아한다.

“음양이란 건 원래가 한 가지 기운에서 나오는 것인데 둘로 쪼개 놓았다니 그놈의 고기가 벌써 잡되구나. 오행이란 건 원래 제자리를 잡고 있어 서로 낳고 말고가 없을 터인데 요즘에들 공연히 어머니 새끼를 만들어 놓고, 짜다니 시다니 갈라놓았다니 이러고야 그 맛이 성할 수 없으렷다.

육기란 원래 절로 돌아가는 것이지 일부러 당기고 말고 할 까닭이 있어야지. 요즘에 와서 함부로들, 이런 데 손을 대느니 돕느니 떠들어 제 생광을 쓰려고 드니 이넌 놈의 고기를 먹다나면 질기고 여물어서 삭여 낼 것 같잖구나.”

 

정나라 어떤 고을에 벼슬에 뜻이 없는 한 선비가 있어 북곽 선생이라고 불렀다. 나이 마흔에 제 손으로 교열한 책이 만 권이나 되고 사서오경의 뜻을 풀어서 다시 지은 책이 1만 5천 권이나 되었다. 이래서 천자는 북곽 선생이 이룩한 것이 놀랍다고 칭찬을 하고 제후들까지도 북곽 선생이라면 한번 찾아보기가 원이었다.

그 고을 동쪽 마을에는 일찍이 혼자된 인물로 잘난 과부가 살았는데 ‘동리자(東里子)라고 했다. 역시 천자는 동리자의 절개가 놀라운 것을 칭찬하고 제후들까지도 그가 현숙하다고 떠받들어 그 고을의 몇 리 둘레를 잡아떼어 아주 동리 과부의 마을로 정해 주었다.

동리자가 수절을 잘 한다는지마는 아들 오형제가 모두 각성바지였다. 하루는 다섯 아들이 모여,

윗 마을에는 닭이 홰를 치고, 아랫마을에는 계명성이 반짝이는 이 깊은 밤에 안방에서 도란도란 들리는 소리가 어쩌면 꼭 북곽 선생의 목청만 같구나.“

하고는, 오형제가 번갈아 문창 틈으로 들여다보노라니 동리자가 북곽 선생에게 청하여,

“오래 동안 선생님의 덕을 그리워해 오던 차에 호젓한 이 밤 선생님의 글 읽는 목청을 한번 들었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하니, 북곽 선생은 옷깃을 바로 여미면서 단정히 차리고 앉더니 시를 읊었다.

“병풍 위엔 원앙 한 쌍, 반딧불은 반짝반짝, 오롱조롱 살림 그릇, 누구누구 본떴다지, 홍야라.”

다섯 아들은 서군거리기를,

“북곽 선생은 어진 분이라 예절로 보아 설마 과부의 문간에 발길을 들여놓을 리가 만무할 터요. 내가 일찍이 들으니 정나라 성문이 무너진 데 여우굴이 있다더라. 여우가 천년을 묵으면 사람 두겁을 쓴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필시 여우가 북곽 선생의 탈을 쓰고 나온 것이 틀림없구나!”

하면서, 서로 쑥덕공론을 하기를,

“내 들은 말로는 여우 갓을 얻으면 만부자가 되고, 여우 신을 얻으면 대낮에도 제 몸이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보인다고 하고, 여우꼬리를 얻으면 남을 잘 호려 반하도록 만든다는데, 어째서 이놈의 여우를 잡아 죽여 우리끼리 나눠 가지지 않을 것인가?

하고는, 이내 다섯 아들은 안방을 둘러싸고 덤벼 들이쳤다.

북곽 선생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도망질을 치는 판인데, 행여나 제 얼굴이 탄로날까 봐 겁이 나서 한 다리를 목에다 덜고는 귀신 춤에 귀신 웃음을 웃으면서 문 밖으로 튀어나와 달아나다가 그만 들판에 파 놓은 똥구뎅이에 빠졌다. 똥이 가득 찬 구뎅이 속에서 간신히 버둥거리면서 기어올라 대가리를 내밀고 바라본즉 범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범은 얼굴을 찡그리고 구역질이 나 코를 쥐고 고개를 외로 돌리면서, “푸우”하고는,

“이놈의 선비, 에이, 구린 냄새야!”

했다. 북곽 선생은 모리를 조아리고 엉금엉금 기어 범 앞으로 나와 절을 세 번 하고는 꿇어앉아 고개를 젖히고 하는 말이,

“범님의 덕이야말로 참말 지극하오이다. 세상에 큰 인물들은 당신이 변화하는 재주를 본받고, 제왕들은 당신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사람의 자식 된 자들은 당신의 효성을 법도로 삼고, 장수들은 당신의 위엄을 취하오이다. 당신의 이름은 신령스러운 용님과 짝이 됩시와 한 분은 바람을 맡고 한 분은 비를 맡으신지라 인간 세상의 천한 이 몸은 감히 당신의 아랫자리에서 삼가 모실까 하오이다.”

하니, 범이 꾸짖는다.

“아예 가까이 오지 말라. 내 일찍이 들으며 ‘선비 유(儒)’자는 ‘아첨 유(諛)’자와 통한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어느 날에는 천하에 못된 이름은 다 끌어 모아다가 함부러 내게 가져다 붙이더니, 오늘은 정 급해맞고 보니 얼굴 간지러운 아첨을 하는구나. 그래 누가 네 말을 믿을 것이냐? 무릇 천하에 이치는 하나이어든, 범의 성품이 나쁘다면 사람의 성품도 역시 나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하다면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 것이다.

네가 주절거려 대는 천만 마디 말이 오상(五常)을 떠나지 않고 남을 훈계하거나 권고할 때는 으레 삼강(三綱)을 둘러메고 나오지마는 사람 많이 사는 대처 바닥 거리에 돌아다니는 코 떨어진 놈, 발뒤꿈치 없는 놈, 상판에 먹침을 맞은 놈들은 죄다 무지막지한 망나니놈들로서 날마다 먹을 아무리 갈아 대고 연장을 아무리 벼려 대도 그놈의 나쁜 버릇들을 막아 낼 재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범의 집안에는 이런 형벌이란 것이 본디부터 없다. 이로써 보건대 범의 성품이 역시 사람의 성품바다는 어질지 않은가!

법이야 푸성귀나 과일 따위에 입을 대지 않고, 벌레나 생선 같은 것을 먹지 않고, 잡스러운 누룩 국물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고, 새끼 가진 짐승이나 알 품은 짐승이나 하찮은 것들을 건드리지 않고는 산에 들면, 노루, 사슴이나 사냥하고 들에 내리면 마소나 잡아, 아직까지 배를 채우는 끼닛거리 때문에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송사질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 법의 도덕이 얼마나 광명정대하든가!

범이 노루, 사슴을 잡아먹을 때 너희 놈들이 범을 밉다, 곱다 끽소리 없다가도 범이 한번 마소를 잡아먹을 때는 너희 놈들이 점을 원수로만 여기니, 이것은 노루, 사슴이 사람에게 덕 되는 데가 없고 마소는 너희들이 부려 덕을 본다고 해서 그런 것이겠지. 그렇지마는 너희놈들은 마소 대접을 어떻게 하느냐? 태워 주고 부리던 고생도, 심부름하고 주인을 따르던 정성도 알아줄 까닭 없이 날마다 푸줏간이 비좁도록 몰아넣어 뿔다귀 한 개, 갈기 한 오리도 남기지 않을 뿐더러 이것도 부족하여 내 노루, 사슴에까지 손을 뻗쳐 우리들이 산에서는 배를 못 불리고 들에서는 끼니까지 건너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쯤 되고 보면 어디 하늘더러 이 사정을 한번 처리해달라고 해 보자. 네놈들은 우리가 잡어먹어야 할 것이냐, 그만두어야 할 것이냐.

무릇 제 것 아닌 물건을 가져가는 놈을 불러서 ‘도적놈’이라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고 물건을 해치는 놈을 가져다가 ‘화적놈’이라고 하느니라.

네놈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주하게 팔뚝을 뽐내고 눈을 부릅뜨고 잡아채고 훔치고 하건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심한 놈은 돈을 형님이라고까지 하고 장수가 되기 위해서는 제 계집조차 죽이는 놈이 있는 데야 삼강오륜을 더 이야기할 나위가 어데 있겠느냐. 어디 그뿐인가. 메뚜기에게서 밥을 가로채고, 누에에게서 옷을 빼앗고, 벌 떼를 쫓고는 꿀을 도덕질하고, 더 악착한 놈은 개미 새끼로 젓을 담아 제 할애비 제사를 지내는 놈까지 있으니, 잔인하고도 악착한 버릇이 네놈들을 덮을 놈이 또 어데 있단 말인가.

네가 세상 이치를 펴 늘어놓을 때는 걸핏하면 하늘을 둘러메고 나서지마는 참말 하늘이 마련한 대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 물건이어든, 천지만물이 살아나가는 어진 도리에서 본다면 범이나 메뚜기나 누에나 벌이나 개미나 다 사람과 함께 같이 살기 마련이지. 서로 등지고 지낼 터수가 아니렷다. 또 이것을 선악을 두고 따져 본다면 드러내놓고 벌과 개미집을 털어 가는 놈이 천하에 큰 도적놈이 아니고 무엇일까 보냐. 제 마음대로 메뚜기와 누에의 밑천을 훔쳐가는 놈이 의리로 보아 대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보냐.

범이 여태껏 한 번도 표범을 잡아먹지 않은 것은 제 동류에게는 차마 손을 못 대는 탓이요, 범이 노루나 사슴을 잡아먹는 수효는 사람이 잡아먹는 수효처럼 그렇게 많지 못하고, 범이 마소를 잡아먹는 수효도 사람처럼은 많지 못하니라.

그런데 지난해 관중에 큰 가물이 들었을 적에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은 수효가 수만 명이요, 몇 해 전에 산동서 큰 물이 졌을 적에도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은 수효가 역시 수만 명이나 되지 않나.

말이 났으니 말이지 사람 잡아먹은 수효가 많기로는 어디 춘추 때만큼 많았던 적이 또 언제 있었겠는가? 춘추 적 세상에는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난리가 열일곱 번이요, 원수 갚는다고 일으킨 난리가 서른 번에 피가 천리 어간에 흐르고 거꾸러진 시체가 백만이나 되겠다!

그러나 점의 집안에서는 홍수나 가물을 모르고 보니 하늘을 원망할 리 없고 덕이고 원수고 다 잊어버리는지라 세상에 미운 것이 없고, 하늘의 마련대로 따라 살다나니 무당이나 의원의 농간에 넘어갈 턱이 없고, 타고난 성품에 따라 저 생긴 대로 살다나니 더러운 세상살이 잇속에 병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범의 영특하고 갸륵하다는 내력이란 말이다.

한 가지 얼룩을 보아 열 가지 문채를 세상에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치의 병장기를 손에 대지 않고도 다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만 가지고서 위풍을 처나에 뽐내고 범의 형상을 그린 제기들로써 효성을 세상에 널리 퍼뜨려 가르친다. 하루에도 한 끼는 까마귀, 솔개미, 개미 떼가 대궁을 갈라 먹으니 우리들의 어진 행실이야 이루 다 칠 수 없을 것이고, 애매하게 남에게 먹힌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병자나 폐인을 잡아먹지 않고 상주를 잡아먹지 않으니 의로운 행실까지도 이루 다 들 수 있겠느냐?

정 모질구나. 네놈들이 잡아먹는 버릇이야말로, 덫과 함정이 부족하다 하여 새 그물, 노루 그물, 후리 그물, 반두 그물, 자 그물들을 만들었으니 대관절 맨 처음에 그물을 뜨기 시작한 놈이 화근을 세상에 퍼뜨린 놈들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뾰족 칭, 넙적 창, 긴 창, 삼지창, 도끼, 환도, 비수, 쇠꼬치가 있지 않나, 또 한 방만 떠뜨리면 소리는 산악을 무너뜨리고 불길을 번쩍번쩍 초하면서 벼락보다도 더 무서운 대항구까지 있다. 이것도 제 신대로 포악을 부리기에 부족하다고 하여 이번에는 부드러운 털을 아교풀로 붙여 길이는 한 치도 못되게 대추씨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먹물에 덤벅 찍어서는 이것으로 가르고 찌르고 모루 찌르면 굽은 놈은 갈구리창 같고, 날이 선 놈은 칼 같고, 뾰족한 놈은 검 같고, 갈라진 놈은 가장귀창 같고, 곧은 놈은 화살 같고, 둥그레한 놈은 활같이 생겨 이놈의 병기들이 한번 움직이는 곳에는 뭇 귀신들이 밤 울음을 울게 되는 판이다. 참혹하게 서로들 잡아먹는 데야 누가 너희놈들보다 더 심할 것이냐?“

북곽 선생은 자리를 옮겨서 머뭇머뭇 땅에 코를 박고 두 번씩 머리를 조아렸다.

“옛날에도 있지만 아무리 악한 놈이라도 목욕재계를 하고 나면 하느님이라도 모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 세상에 천한 이 몸이지마는 감히 당신의 아랫자리에서 삼가 모셔 받을까 하오이다.”

북곽 선생은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마는 아무런 분부가 없었다. 황송해서 조심조심 손길을 잡고 머리를 조아렸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날은 훤히 샜는데 범은 벌써 가고 말았다.

새벽에 밭일 나온 농부가,

“선생님! 이 꼭두새벽에 벌판에 대고 절은 웬 절이십니까?”

하니, 북곽 선생은,

“내 들으매 하늘이 높다 해도 머리를 맘대로 못 들고, 땅이 두텁다 해도 발을 맘대로 못 디딘다고 했거든!”

한다.

 

연암씨는 이르노라.

이 글에는 작가의 성명이 없지마는 대체로 보아 근세의 중국 사람들이 비분강개해서 지은 글로 보인다. 세상 운수가 한밤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오랑캐로부터 받은 재화가 맹수의 피해보다도 더할새, 소위 선비 나부랭이로서 염치를 못 차리는 자들이 글줄이나 꿰어 맞춰 가지고 시속 세상에 아첨을 하니, 밤도 물어 가지 않을, ‘무덤 파는 선비’보다 나을 것이 있으랴.

이 글을 읽어 본다면 이치에 당찮은 데가 많이 있고《장자》의 거협이나 도척 편 같은 글과 한 본이다. 그러나 천하에 뜻 있는 인사로야 어찌 하루라도 중국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청나라 세상이 된 지 겨우 4대에 불과하지마는 문화와 무력을 오래 부지해 왔고, 백년 동안 태평 세월로 국내, 국외가 잠잠하니 이런 세월은 한나라, 당나라 시절에도 없었다. 이런 이룩은 범연한 일이 아니라 오늘의 천자도 역시 하늘이 마련한 우두머리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하늘의 마련’을 두고 설마 하늘이 그러랴 하고는 성인에게 물어 본 적도 있었다. 이럴 적에 성인은 분명히 하늘의 뜻을 받아서 말하기를,

“하늘은 말이 없이 행동과 사실로 보여 준다.”

고 했는바, 어린 나로서는 일찍이 이 대문을 읽을 때마다 실상 의혹이 없지 않았다.

나는 묻겠다. 하늘이 행동과 사실로 보인다 치고 보면 오랑캐로써 중국을 바꾸어 놓은 사실은 천하의 큰 치욕이매 백성들의 원통함을 어떻게 하랴? 향내 나는 재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각 제물임자들이 닦은 공덕이 다를 것이매 대관절 귀신이 먹을 때는 무슨 냄새로써 짐작을 삼았을 것인가?

이러고 보니 사람의 처지에서 본다면 중국과 오랑캐는 반드시 등분이 있겠지마는 하늘이 마련한 것을 본다면 은나라의 환관이나 주나라의 면류관이나 다 각기 그 당시의 시속을 따른 것이다. 유독 오늘날 청인의 붉은 모자에만 의심을 둘 까닭이 어데 있을 것인가? 이래서 하늘이 정한 것은 사람이 어쩔 수 없다는 말과,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막나 낼 수 없다는 말이 떠돌게 되어 사람과 하늘 사이에 서로 어울리는 이치는 한 걸음 물러서게 되고, 옛날 성인의 말을 징험으로 맞추어 보아 맞지 않을 때는 대번에 천지의 운수라고 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애달프다! 이것이 어째서 한갓 운수일까 보냐.

어허! 명나라의 끄틀이 아주 없어져버린 후 중국의 선비들이 머리 깎는 풍속을 따른 지도 백년 마나 되건마는 자나깨나 가슴을 치면서 명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중국을 잊지 못하는 까닭이다.

청나라 역시 자기네를 위해서 하는 짓이 서툴렀다. 역대 오랑캐 천자들의 후손들이 중국을 본뜨다가 필경 잡혀버린 것을 경계하여 쇠비석을 만들어 파수 보는 전정(箭亭)에다 묻었는데, 그 비에 새긴 말을 보면 자기네의 의복과 모자를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오히려 강하고 약한 것을 이 의관에 붙여서 마음을 켜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물 제도와 무력이 버젓하고도 마지막 판 임금들의 잦아드는 운수를 건져 낼 도리가 없었거든 하물며 의관 나부랭이가 들어서 무슨 맥을 쓸 것인가?

의복과 모자를 정말 싸움에 편한 것으로 쳐준다면 북쪽, 서쪽 오랑캐들은 싸우기에 편한 의관이 아니던가? 그보다도 서북땅의 다른 오랑캐들로 하여금 도리어 중국의 묵은 풍속을 따르도록 할 만한 힘이 있은 뒤에야 참말 천하에서 제일 강하다고 쳐줄 것이다. 천하를 한목으로 욕을 보이는 구뎅이로 몰아넣고는 회치기를, ‘너희들은 수치를 좀 참고서 나를 따라 강해지려무나.’하니, 나는 모를 일일러라. 그 강해진다는 속을, 도적 무리들만이 눈썹을 붉게 하고 머릿수건을 누렇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령 여기서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그가 쓴 모자를 한번 벗어 땅바닥에 동댕이치는 날은 청나라 황제는 가만히 앉아서 천하를 잃어버렸다고 볼 것이다. 아까 바로 강해지는 까닭으로 믿었던 그것이 이번은 주체할 수 없이 망해 빠지는 동티가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비석까지 묻어 후손을 신척한다는 것은 어찌 좀 과한 일이 아닐까.

이 글에는 본래 제목이 없었는데 이제 글 가운데 있는 ‘범의 꾸중[虎叱]’을 제목으로 삼아 중국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열하일기상』, 보리, 2004, 367-381쪽.

 

 

 

 

 

 

 

 

 

 

 

 

 

 

 

 

 

 

 

 

 

 

 

56. 열하일기(3)

 

7월 15일에서

우리 나라의 상류 인사들 사이에서 춘추대의를 위하여 중국을 떠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한다고 떠드는 자들은 백 년을 하루같이 내려오면서 가위 장관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마는 중국을 떠받드는 것도 제 탓이요, 오랑캐도 제 탓일 것이다. 오늘의 형편을 본다면 중국의 성곽과 궁실과 인민이 다 그대로 남아 있고 도덕과 산업, 경제가 전이나 다름없고 최씨, 노씨, 왕씨, 사씨의 씨족이 없어지지 않았고 주돈이, 정호와 정이, 장재, 주희의 학문이 그대로 남아 있고 하, 은, 주 삼대 이래로 현명한 제왕과 한, 당, 송, 명의 발달된 법률과 밝은 제도라 조금도 변함이 없다.

오랑캐로 부르는 오늘의 청조는 무엇이든지 중국의 이익이 될 만하고 그것으로써 오래 누릴 수 있는 일인 줄 알기만 할 때는 억지로 빼앗아 와서라도 이를 지켜 냈고, 만약 본래부터 있던 좋은 제도가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에 유용할 때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손 치더라도 주저 없이 이것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더구나 삼대 이래 현명한 제왕들의 법도와 역대 국가들이 가졌던 고유한 원칙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옛날 성이인 ≪춘추≫를 지을 때는 그 본의가 중화를 떠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함에 있을지언정, 나는 아직 오랑캐가 중국을 손아귀에 넣었다고 분개하여 중국의 제도로써 숭앙할 만한 알맹이까지 아울러 배척하라는 ≪춘추≫를 보지 못했다. 지금 사람들이 참으로 오랑캐를 배척하려거든 중국의 발달된 법제를 알뜰하게 배울 것이요, 자기 나라의 무딘 습속을 바꿔 밭 갈고 누에 치고 질그릇 굽고 쇠 녹이는 야장이 일을 비롯하여 공업을 고루 보급하고 장사의 혜택을 넓게 하는데 이르기까지 모두가 배우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 나라 백성들의 튼튼한 준비 앞에 저들의 굳센 갑옷과 날카로운 병장기가 맥을 쓰지 못하게 될 때에야만 비로소 중국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잡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원래 삼류 인사다. 내가 본 장관을 말하리라. 깨진 기와 조각이 장관이요, 냄새나는 똥거름이 장관이더라. 왜? 깨진 기와 조각은 천하가 버리는 물건이다. 그러나 동리 집을 둘러싼 담장 어깨노리 위로는 깨진 기왓장을 두 장씩 마주 붙여 놓아 물결 무늬를 놓기도 하고 네 쪽이 안으로 합하면 동그라미 무늬가 되고 네 쪽을 밖으로 등을 대어 모아 붙이면 옛날 엽전의 구멍 모양을 이룬다. 이과 조각들은 서로 맞물려 알쏭달쏭 뚫린 구멍들이 안팎으로 마주 비치면서 별별 무늬가 다 놓이고 보니, 한번 깨진 기와 쪽을 내버리지 않아 천하의 문채는 벌써 여기 다 있지 않은가? 동리 집들의 문전 뜰에는 형세가 닿잖고 보니 벽돌은 깔 수 없고 오색 빛깔의 유리 기와 쪽과 냇가에서 둥굴고 반들반들한 조약돌을 주워다가 얼기설기 서로 맞추어 꽃 무늬, 나무 무늬, 새 무늬, 짐승 무늬를 놓아가면서 깔아 놓아 비가 와도 땅이 질 걱정이 없이 만든다. 한 번 자갈과 조약돌을 내버리지 않으니 천하의 명화는 다 여기 있지 않은가.

똥오줌이란 세상에서도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락 같이도 아끼게 된다. 길에는 버린 재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메고 말꼬리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렇게 모은 똥을 거름간에다 쌓아 두는데 혹은네모 반듯하게, 혹은 팔모가 나게, 혹은 육모가 나게, 혹은 누각 모양으로 만들고 보니 한 번 쌓아 올린 똥거름의 맵시를 보아 천하의 문물 제도는 벌써 여기 버젓이 서고 있음을 볼 수 있겠다.

그러매 나는 힘차게 말할 수 있다. 기와 조각, 조약돌이 장관이라고, 똥거름이 장관이라고. 하필 성곽과 연못과 궁실과 누각과 점포와 사찰과 목축과 광막한 벌판, 자욱한 수림의 꿈속 같은 풍광만을 장관이라고 부를 것인가? (227-229쪽)

 

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열하일기상』, 보리, 2004.

 

 

 

 

 

 

 

 

 

 

 

 

 

 

 

 

 

 

 

 

 

57. 열하일기(4)

 

성인은 일찍이 그 제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안을 물을 때 대답하면서 말로는 그럴듯하게 벌여 놓았지마는 몸소 실천을 못했다. 그러나 후세에 소위 하늘의 뜻을 받아 위에 올라서게 된 임금이란 학문으로 보아서는 반드시 성인보다 낫다고 할 수 없더라도 하루아침에 능히 들고 나서 제 손으로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필 중국 사람들만 이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랑캐의 임금으로서 중국을 정복한 자도 모두 다 이 법도를 계승하고 있다.

의식이 족한 뒤라야 예절을 알게 되는 법이라. 후세에 있어서 그 나라를 부강코저 하는 자가 때로는 각박하다. 덕이 적다는 비평이야 들을 값에 그렇다고 그들의 이룩이 자기 한 몸의 이익만 돌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위태롭고 미약할 때의 마음 쓰는 법이나 일의 공사를 분명히 따져 말한다면 유정유일의 정신을 그들에게 함부로 말할 것은 못 된다. 그러나 그 공덕과 이용에서 볼 때는 비록 그 방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장점들을 모아서 유정유일로서 표본을 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8월 1일에서(401-402쪽)

 

 

북방여행기

 

지금은 청나라가 통일을 한 후 처음으로 ‘열하’라고 이름을 붙이고 만리장성 밖에서는 요해지가 되었다. 강희 황제 시대로부터는 언제나 여름철이 되면 황제는 이곳에 두류하여 피서지로 삼았다.

거처하는 궁전은 그리 화려하지를 않고 이름도 ‘피서산장’이라고 하여 황제는 이곳에서 독서로 소일을 삼고 산수를 흥취로 여겨 세상 밖에서 한탄 평민의 생활에 취미를 두는 듯했지마는 그 실상인즉, 험악한 지세를 이용하여 몽고의 삼멱을 틀어쥐고 국경 밖으로 깊숙하게 자리를 잡아 피서에 이름을 붙이고는 숫제 천자 자신이 오랑캐들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 원나라 시대처럼 천자는 풀이 무성한 철에는 어정거리면서 장성 밖으로 나갔다가 풀이 마를 무렵에야 남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대체로 천자가 북쪽 변방에 두류하면서 자주 사냥질을 돌아다니고 본즉 오랑캐 족속들은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 방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자가 들고 나는 철은 언제나 풀이 무성했다가 마른 계절인바, 이 행차를 가져다가 ‘피서’라고 이름을 붙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금년 봄만 해도 황제는 남방을 한 바퀴 돌아서는 줄곤 북쪽으로 열하까지 돌아왔다. 열하의 성지와 궁궐은 해마다 달마다 달라 보일만큼 사치롭게 증축을 하여 그 화려하고도 우람찬 품은 창춘이나 서산의 이궁들보다도 너 낫고 산수나 경치는 연경의 고궁보다도 좋으므로 해마다 천자가 이곳에 와서 두류할 만도 하니, 소위 외적을 막을 뜻으로 되었던 땅이 도리어 놀이터가 된 셈이다.

이번에 우리 사절은 창졸간에 천자의 부름을 받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닷새 동안에 열하까지 대었으니 가만히 노정을 꼽아보면 아무래도 4백리가 아닌 것 같았다. (중략) 실상은 7백리라고 한다.

 

청나라 법에는 비록 황족들의 행차라도 여염집 민가에는 유숙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묵는 처소란 으레 점포 같은 데가 아니면 묘당 같은 절집이다.(442쪽)

 

창대는 어제 백하를 건널 때 맨발을 말발굽에 밟혀 말편자가 살에 깊이 들어가 아파서 다 죽어가게 되어 대신 견마잡이가 없고 보니 일이 아주 낭패 지경이다. 이미 촌보도 떼지 못하니 중도에 떨어뜨려 두려 해도 법이 그럴 수 없고, 보기에 정 참혹하고 딱했건만 어찌할 재주가 없으매 하는 수 없이 기어서라도 따라오라고 일러서 필경 성을 나오면서부터는 말꼬삐를 손에서 놓게 되었다.

길바닥은 폭우에 깎여 돌들이 삐죽삐죽 톱날처럼 솟은 데다가 들불은 새벽 바람에 꺼져 동북쪽으로 보이는 큼직한 별빛을 따라갔다. 앞 냇물에 닿고 보니 물은 좀 빠졌으나 아직도 말 배때기까지 잠겼다. 창대는 굶주리고 춥고 아프고 졸리고 그나마 차가운 골짝물까지 건너자니 참말 걱정스러운 일이다.(447쪽)

 

8월 7일에서

 

이로부터는 준령을 연달아 넘으면서 오르막은 많아도 내리막은 적어 지세는 차차 높아지고 강들은 물살이 더욱 거세졌다. 창대는 여기까지 와서 아픈 데가 더 심해져 부사와 서장관의 가마를 붙잡고는 울면서 호소 다고 한다. 내가 고북하에 먼저 댔을 적에 부사와 서장관이 뒤쫓아 와서 하는 말이 창대 사정이 참혹해서 차마 볼 수 없었다며 나에게 무슨 조처할 도리를 생각해 보라고 했지마는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얼마간 있으니 창대가 기듯이 해 가지고 왔다. 그간에 탈 것이 생겨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돈 2백 닢과 청심환 다섯 개를 따라온 곳까지 노래 삯으로 주었다.

 

무관들이 입는 복장을 소위 철릭이라 하여 이것을 군복으로 삼는 터인데 세상에 무슨 놈의 군복이 소매가 중의 장삼처럼 생긴 군복이 있단 말인가? 시방 꼽은 여덟 가지 위험은 어느 것이고 한삼 달린 넓은 소매 입성을 입은 채 당하는 한숨이 다 나오는구나. 이러고야 비록 백락이 오른쪽을 몰고 조보가 왼쪽을 몰더라도 만약에 이런 여뎗 가지 위험을 가진 채 몰다나면 설령 팔준마라고 하더라도 필경 죽고 말 것이다.

이일 장군이 상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멀리 숲속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는 군관 한 사람을 시켜 가 보도록 했더니 그 군관은 좌우로 쌍견마를 잡히고 어깨를 으쓱대면서 가다가 갑자기 다리 밑으로부터 왜놈 두 놈이 튀어나와 칼로 말 복통을 찌르자 군관의 머리는 벌써 달아나고 말았다.(임진왜란 때 일이다.)

서애 유성룡은 당시 어진 제상으로 《징비록》을 지으면서 이 사연을 써서 우리 나라의 말 모는 습속을 비웃은 일이 있었으나 이런 폐습을 그 어려운 난리판에서도 고치지 못했으니 풍습이란 좀처럼 고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454쪽)

 

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열하일기상』, 보리, 2004.

 

 

 

 

 

 

 

 

 

 

 

 

 

 

 

 

 

 

 

 

 

 

 

 

 

 

 

58. 『1984』(조지 오웰)

 

윈스턴의 등 뒤에 있는 텔레스크린에서는 아직도 무쇠와 제9차 3개년 계획의 초과 달성에 대해서 지껄이고 있었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더욱이 그가 이금속판의 시계(視界) 안에 들어 있는 한, 그의 일거일동은 다 보이고 들린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사상경찰이 개개인에 대한 감시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행하는지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사상경찰이 항상 모든 사람을 감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감시의 선을 꽂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는 소리가 모두 도청을 당하고, 캄캄한 때 외에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는데, 오랜 세월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 삶이 본능처럼 습관화되어 버렸다.(11~12쪽)

 

지배계급들은 언제나 자유사상에 어느 정도 물들어 있었고, 무슨 일이든 대충대충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데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중시한 나머지 백성들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중세의 가톨릭마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관대한 편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의 어떤 정권이든 시민들을 끊임없이 감시할 힘이 없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보다 쉽게 여론을 조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영화와 라디오로 인해 한층 더 용이해졌다. 특히 텔레비전의 발명으로 동일한 기계가 동시에 송수신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짐으로써 사생활은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모든 시민, 적어도 요주의 인물들을 하루 24시간 내내 경찰의 감시 아래 둘 수 있고, 다른 모든 통신망은 폐쇄시킨 채 정부 선전만 듣도록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정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게 하고 의견 통일까지 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조지 오웰․정희성 옮김,『1984』, 민음사, 2003, 287쪽.

 

-마지막 문장 :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옮긴이의 글에서>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84』는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한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다가 어떻게 파멸해 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439쪽)

 

무엇보다 오늘날의 우리는 항상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윈스턴이 하루 스물네 시간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 받으며 생활했듯이 말이다. 윈스턴의 등 뒤에 있는 텔레스크린에서는 아직도 무쇠와 제9차 3개년 계획의 초과 달성에 대해서 지껄이고 있었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더욱이 그가 이금속판의 시계(視界) 안에 들어 있는 한, 그의 일거일동은 다 보이고 들린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사상경찰이 개개인에 대한 감시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행하는지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사상경찰이 항상 모든 사람을 감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감시의 선을 꽂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는 소리가 모두 도청을 당하고, 캄캄한 때 외에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는데, 오랜 세월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 삶이 본능처럼 습관화되어 버렸다.(11-12쪽)에 나오는 텔레스크린은 누가 보아도 가공할 감시 장치이자 강력한 통제 기구이다. 송수신이 동시에 가능한 그것은 어떠한 소리나 동작도 잡아내게끔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감시를 받는 사람이 그 사실을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쓴 1940년대에는 이런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공상처럼 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이다.

잠시 우리 주위를 한번 돌아보자. 은행, 백화점, 관공서 등 어니나 할 것 없이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컨대 우리가 언제 현금을 인출하는지, 어떤 물건을 사는지, 무슨 복장을 하고 공무서를 발급받는지를 감시하고 있다. 그 같은 감시는 도로에서도 행해진다. 도로 곳곳에 설치된 유선 카메라는 우리의 사소한 교통 법규 위반까지 체크한다. 우리는 그런 카메라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심지어 지구를 도는 인공위성의 초정밀 카메라로는 우리가 안방에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찍을 수 있다. (440쪽)

오늘날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첨단의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과학 기술이나 정보화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자칫 재앙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정보화는 프라이버시의 공간을 위협함으로써 우리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 특히 고도로 권력이 집중된 상태에서의 정보화는 『1984』의 오세아니아보다 더 암울한 사회를 만든다.(441쪽)

『1984』는 결코 (이십 년 전의) 과거나 먼 미래의 상황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정보화 사회라고 일컫는 오늘날의 상황이다. 그러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 앞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 권력도 끝내는 좌절하고 만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품고 있는 한 전체주의보다 더 강력한 정치 시스템도 인간을 지재할 수 없다. 우리가『1984』를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442쪽)

조지 오웰․정희성 옮김,『1984』, 민음사.

 

 

 

 

59. 과연 농약을 사용해야 하는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드물기 때문에 농약의 그런 연구들을 통해 얻은 정보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제까지 수행된 농약의 발암성 평가 연구는 대부분 실험실에서 동물 실험을 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연구들은 하루에 커피 세 잔이나 바질 1그램을 섭취하는 것이 가장 유독한 농약을 현재의 1일 평균 섭취량으로 섭취하는 것보다 60배 이상 더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농약이 암을 유발한다는 걱정이 상당히 과장된 것이며 동물 실험을 근거로 추정할 때 농약이 암 발생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력은 거의 무시해도 될 정도라는 것을 강조해준다. 미국 전역의 암 사망자 수는 연간 56만 명에 이르는데, 농약 사용으로 인해 추가로 발생하는 암 사망자 수는 그 중 20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비료를 위해 덧붙이자면, 매년 자기 집 욕조에서 익사하는 미국인만 해도 약 300명이나 된다. (중략)

따라서 농약 사용량을 줄이는 데 비용이 그리 많이 들지 않는 수준까지는 농약 사용량을 줄이는 것이 신중한 처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농약 사용량을 그 이상 더 줄이려고 한다면 아마도 사회가 커다란

그런데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농약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가는 데 비단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농약은 작물의 수확량을 늘려 과일과 채소의 가격을 낮추는 에 일조한다. 덴마크의 위원회가 채용한 시나리오에서는 농약 사용을 완전히 금지할 경우에 수확량이 16~84% 감소해 농산물 가격은 30~120%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우선 시골의 경작지 면적이 늘어날 것이다. 더 많은 땅을 경작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새로 경작되는 땅은 기존의 농지보다 덜 비옥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과일과 채소의 값이 비싸져 사람들은 과일과 채소를 덜 먹을 것이다. 수득 중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증가할 것이다. 농약 사용을 제한하면 식비가 약 10%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약 사용을 완전히 금지한다면 현재 8~20%인 북미와 유럽 가정의 식비 비중이 2배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지출 가능한 돈의 액수가 줄어들수록 과일과 채소 섭취량 또한 줄어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저소득층 가정은 기본적인 곡물과 고기를 더 많이 구입할 것이고 그 결과 더 많은 지방을 섭취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부가해서 식품의 질도 떨어지고 겨울철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식품의 양 역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결과를 암 발생 빈도 측면에서 살펴보면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세계암연구기금의 연구에 의하면, 과일과 채소의 섭취량을 하루 평균 약 250g에서 400g으로 증가시키면 전반적인 암 발생 빈도가 약 23% 줄어들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인의 평균 과일 및 채소 섭취량은 하루에 약 297그램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과일과 채소의 값이 비싸져 소비량이 10%만 줄어도 암 총 발생 건수는 약 4.6%만큼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만 약 2만 6,000명이 추가로 암에 걸려 목숨을 잃는 셈이다. 더욱이 다른 연구 결과들은 허혈성 심장 질환과 뇌혈관계 질환처럼 암과 관련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도 크게 증가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세계암연구기금의 연구는 암 발생 빈도를 낮추기 위해 과일과 채소의 섭취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비외른 롬보르지음/홍욱희 김승욱 옮김,『회의적 환경주의자』, 에코리브르, 548~553쪽.

 

 

서문에서

나는 많은 환경단체가 무조건적인 부정이라는 충동적인 반응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그런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나라면 무조건 부정하는 대신 논의가 진행되면서 새롭게 제시된 수많은 자료들을 꼼꼼히 검토해보고 결국 환경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진정으로 저평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사람은 내 주장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만을 읽고서 내 생각이 틀렸다고 쉽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구 멸망의 날이 임박했다는 믿음을 계속 유지해도 된다고 마음 편하게 생각해버렸다. 심지어 내 친한 친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인류가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시각이 그토록 철저하게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환경단체들은 다른 모든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이익 집단이며 따라서 자기들의 대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친다. 우리가 그들이 내놓은 부정적인 소식들을 우선적으로 믿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다.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1754년 이렇게 말했다. “현재를 비난하고 과거를 찬양하는 기질은 인간의 본성 속에 강하게 뿌리 박혀 있으며, 심지어 심오한 판단력과 가장 해박한 학식을 지닌 사람들에게조차 영향을 미친다.”

 

그 어느 때보다 가격이 낮아졌다.

지구에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삭게 되면서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식량 가격은 괄목할 만하게 떨어졌다. 2000년의 식량 가격은 1957년 가격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식량 가격의 하락은 개도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 특히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도시 거주자들에게 매우 요긴한 것이었다.

식량 가격의 하락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장기적인 추세다. 밀 가격은 1800년 이후 계속 하향세를 보이고 있는데, 현재는 과거 500년 동안에 비해 10배 이상 낮다. 가격 하락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두드러졌으며, 거의 모든 주요 식량에서 똑같이 나타난다. 가격 하락세가 유일하게 깨졌던 시기는 1970년대였다. 그때는 석유 위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식량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당시의 유가 상승이 인조 비료의 가격 상승을 초래했고, 중요한 석유 수출국이었던 구소련이 자국의 육류 생산을 위해 곡물을 사들일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격은 상품의 희소성을 반영하므로 20세기에 식량은 사실상 과거보다 훨씬 덜 희소한 상품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인구가 3배 이상 늘고 식품 수요는 그보다 훨씬 더 늘었음에도 말이다.

 

60. 왕랑과 공명의 설전

 

“청컨대 적장은 나와서 대화를 나누라.”

순간 촉군의 문기가 열렸다. 관흥과 장포가 좌우로 나누어 말을 달려 나오고, 그 뒤로 일대의 용맹한 장수들이 따라 나오며 양쪽으로 벌여 섰다. 뒤를 이어 문기의 그림자를 가르며 중앙에 한 채의 사륜거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공명이 윤건을 쓰고 깃털부채를 든 채 흰 도포에 검은 띠를 두르고 표연히 앉아 있었다. 공명이 적진을 바라보니 앞에 세 개의 산개(傘蓋)가 늘어서 있고, 산개에 딸린 기(旗)에는 장수들의 이름이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는데 그중 한가운데 수염이 하얀 노장군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바로 사도 왕랑이었다. 바로 사도 왕랑이었다. 공명은 왕랑을 보며 생각한다.

‘왕랑은 필시 말솜씨로 나를 설복하려 들 터이니, 내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리라.’

곧장 수레를 몰아 앞으로 나가며 호위하는 군졸을 통해 말을 전하게 했다.

“한나라 승상께서 사도 왕랑과 대화를 나누겠다고 하신다.”

왕랑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공명이 수레 위에서 손을 맞잡아 예를 갖추자 왕랑도 말 위에서 곰을 굽혀 답례한 후 입을 열었다.

“공의 크신 이름을 들은 지 오래나 만나 뵙지 못하다가 뒤늦게나마 이렇듯 뵙게 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공께서는 이미 하늘의 뜻을 알고 시무(時務)에 밝으신 몸이거늘, 어찌하여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키셨소이까?”

공명이 대답한다.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치려 하는데 어찌하여 명분이 없다 하시오?”

“천수(天數)는 변하는 것이고 제위(帝位) 또한 바뀌는 것, 덕 있는 사람에게 돌아감이 자연의 이치일 것이오. 지난날 환제․영제 이래로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천하가 어지러워지니, 초형․건단 때에 이르러서는 동탁이 반역하고, 이각과 곽사가 포악하게 굴었으며, 원술이 수춘땅에서 황제를 자칭하기게 이르렀소. 또한 원소는 업땅에서 스스로 영웅이라 하며, 유표가 형주를 점령하고, 여포가 서주를 집어삼키는 등 그야말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간웅들이 활개치는 바람에 사직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소이다. 그때 우리 태조 무황제(武皇帝, 조조)께서는 신문성무(神文聖無, 문무에 통달함.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관용구)하시어 대통을 이어받았소. 이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합당한지라,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를 물려준 옛법을 본받아 중원에 자리잡고 만방을 다스리니, 이야말로 천심에 응함이며 인의에 따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지금귀공께서는 큰 재주와 큰 뜻을 품고 스스로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하면서, 어찌하여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인정을 배반하는 일을 행하신단 말이오? 공께서는 ‘하늘에 순종하는 자는 창성하고 하늘에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順天者昌 逆天者亡)’는 옛말도 들어보지 못하셨소이까? 지금 우리 대위(大魏)는 갑옷 입은 군사가 1백만이요 훌륭한 장수가 1천명에 달하오. 그런데 어찌 썩은 풀더미 속의 한낱 반딧불로 하늘의 밝은 달빛과 견주려 하시오? 귀공이 지금이라도 창을 거꾸로 잡고 갑옷을 벗고 항복한다면 봉후(封侯)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나라와 백성이 안락하리니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다듣고 나서 공명이 한바탕 크게 웃고는 입을 연다.

“그대는 한나라의 원로대신이라 무슨 고견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말씀이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구려. 이제 내가 말할 게 있으니, 모든 군사들은 조용히 들으라. 지난날 환제․영제 때에 한나라 법통이 흐려지니 환관의 무리가 재앙을 일으켜 나라가 어지럽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천하가 소란하였다. 또한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동탁과 이각, 곽사 등이 연이어 일어나 황제를 핍박하고 백성들에게 잔악하게 굴었다. 이는 조정에 썩은 나무 같은 관료들만 있고, 조정에서는 금수(禽獸)와 같은 자들이 녹을 받아먹으며, 이리 같은 심사와 개 같은 행실을 하는 무리들이 뒤를 이어 정사를 좌우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정권을 잡은 탓에 사직은 폐허가 되고 창생이 도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내 내의 행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다. 대대로 동해 가까이 살다가 효렴(孝廉)으로 벼슬길에 들었으면 마땅히 임금을 받들고 나랏일을 도와 한나라를 평안케 하고 유씨를 일으켜야 마땅했거늘, 그대는 오히려 역적을 도와 찬위를 도모했을 뿐이로다. 그 죄 깊고 무거워 천지가 용납하지 않으며, 천하 사람들이 네 고기 씹어 먹기를 원한다. 다행히 하늘의 밝은 뜻으로 한실이 끊기지 않았으니,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께서는 서천에서 한나라 대통을 이으셨다. 내 이제 사군(嗣君, 뒤를 이은 왕, 곧 후주 유선)의 뜻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하니, 너는 아첨하는 신하가 되었으면 그저 몸을 숨기고 머리를 숙여 구차히 목숨이나 이어갈 일이지 어찌 감히 황제의 군사 앞에 나타나 망령되이 천수를 논하느냐? 이 머리 센 필부야, 수염 푸른 늙은 도적아! 네 머지않아 황천에 갈 터인데 무슨 얼굴로 스물네 분 역대 황제를 뵈려 한단 말이냐? 네 늙은 도적은 속히 물러가고, 즉시 역적의 무리를 내보내 나와 승부를 겨루게 하라!”

공명의 말을 듣고 있던 왕랑은 그만 기가 치솟고 숨이 턱 막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나관중지음/황석영 옮김,『三國志』8, 창비, 2003, 201-203쪽.

 

 

 

 

 

 

 

 

 

 

 

 

 

 

61. 생각의 지도(1)-생태 환경이 경제․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

 

(1)-생태 환경이 경제․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

 

동서양 사고 방식 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고대 중국과 그리스의 서로 다른 생태 환경이다. 두 문화의 상이한 생태 환경은 서로 다른 경제적․사회적 체제를 초래했다.(189쪽)

 

생태 환경이 경제․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

 

중국의 자연 환경은 대체로 평탄한 농지, 낮은 산들, 항해가 가능한 강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농경에 적합하였고,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에 유리하였다. 농경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화목한 생활이었다. 특히 쌀농사의 경우에는 공동 작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사람들 간의 화목은 관계 공사의 경우에 특별히 더 중요하다. 관개 공사가 절실히 필요했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중국 북부의 황하 골짜기 지역이었다. 관개 공사는 이웃과의 화목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유도하게 되는데,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작농들은 자신들의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야 했고, 자기 부락의 연장자들이나 권력자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지역의 권력자들은 다시 왕(통일 중국 이후는 황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그들의 생태 환경으로 인해 매우 복잡한 사회적 계약 속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자연 환경은 그와 대조적이었다. 그리스는 해안까지 연결되는 산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농업보다는 사냥, 수렵, 목축, 그리고 무역(정확히는 해적)에 적합했다. 이런 일들은 농업에 비해 다른 사람들과의 협동을 덜 필요로 한다. 실제로 무역을 제외하고는 굳이 안정적인 공동체가 필요없다고 할 수 있다.

농경 정착 생활이 그리스에 도입된 것은 중국보다 거의 2,000년이나 뒤였으며, 도입된 이후에도 대규모 농경으로 빠르게 변화되었다. 실제로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렀을 때 많은 농부들은 사업가적 성격을 지닌 개인 단위의 농장주였으며, 중국에서처럼 소작농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토양과 기후는 농경보다는 포도주와 올리브유 생산에 더 유리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대 중국인들과는 달리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들과의 화목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보다 더 많은 영역에서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장이나 공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논쟁하는 습관도 기를 수 있었다.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생각의 지도』, 감영사, 2005, 190~191쪽.

 

62. 생각의 지도(2)-인권 문제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차이

 

서양인들은 개인과 국가 간에는 오직 하나의 바람직한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즉 각 개인은 독립적인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국가와 사회적 계약을 맺으며, 그 계약에는 개인의 권리, 자유, 그리고 의무가 포함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국가를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고유한 권리라는 개념은 그들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하며 그보다는 부분-전체, 개인-사회라는 관계적 측면에서의 권리가 훨씬 더 의미가 있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그들의 사회에서 마치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처럼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근거로 동양인들의 도덕관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도덕관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동양인들이 서양인의 행동을 보고 그들의 도덕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 유학 온 동양 학생들은 영어에 익숙해지고 나면, 미국의 미디어에 폭력, 섹스, 범죄들이 난무하는데 어떻게 자유라는 명목으로 그런 것들을 용인할 수 있느냐고 지적하곤 한다. 그들은 그런 것들이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크게 보면 사회 전체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양인들은 권리란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생각의 지도』, 감영사, 2005, 211쪽.

 

 

 

 

 

 

 

 

 

 

 

 

 

 

 

63. 생각의 지도(3)-개인의 ‘관계’를 중시했던 고대 중국①

 

그리스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중요했다면, 중국에서는 조화로운 인간 관계가 중요했다. 중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어떤 집단의 구성원, 특히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가장 중요한 사실로 교육 받는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이 특정 상황에 구속되어 있지 않은 독립적인 존재였다면,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은 ‘특정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연극이나 시 낭송을 관람하는 것을 특별한 일로 생각한 반면, 동시대의 중국인들은 친구나 친척을 방문하는 것을 특별한 행사로 여겼다. 철학자 헨리 로즈먼트(Henry Rosemont)는 중국 사회의 특징을 이렇게 평가했다.

 

초기 유교 신봉자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 맺음과 그 속에서 부여되는 역할들의 총체일 뿐, 결코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정체성은 역할에 따라 결정되므로 역할이 바뀌면 정체성도 당연히 바뀐다. 즉, 완전히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또한 주변 환경을 자신에 맞추어 바꾸기보다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 맞추도록 수양하는 일을 중시했다.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하여 가족과 마을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통치자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노력했다. 그리스인들에게 행복은 ‘자신의 자질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것’이었지만, 중국인들에게 행복이란 ‘화목한 인간 관계를 맺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의 꽃병이나 술잔에는 전투나 육상 경기처럼 개인들이 경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반면, 중국의 도자기나 화폭에는 가족의 일상이나 농촌의 한가로운 정경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 중국인들이 권력자나 가족의 권위에 휘둘리기만 하는 무력한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개인의 자율성보다는 ‘집단의 자율성’이 우선이었을 뿐이다. 중국의 핵심 도덕인 유교에 따르면 인간은 군주와 백성,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노인과 젊은이, 친구와 친구 등의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는 관계적 존재이다.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고, 개인은 그 유기체의 한 구성원이다. 그리고 그 유기체 내에는 서로 지켜야 하는 의무들이 존재하고, 개인들은 그 의무를 준수하는 윤리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 고대 중국인들의 사회 생활은 이처럼 사회에서 부여한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인들의 생활을 좌우했던 개인의 사적인 자유라고는 거의 없었다. 중국인의 일상에서 개인의 권리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권리 중 자신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 사회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인간 관계를 해치는 위험한 요소로 간주했다.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생각의 지도』, 감영사, 2005, 30~32쪽.

64. 생각의 지도(4)-개인의 ‘관계’를 중시했던 고대 중국②

 

중국의 음악이 대체로 단선율이라는 사실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일치’를 좋아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선율을 동시에 불렀고 악기들도 동시에 같은 선율을 연주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인들은 서로 다른 악기와 서로 다른 목소리가 동시에 다른 선율을 연주하는 다성 음악을 선호했다.

중국인들이 인간 관계의 조화를 중시했다고 해서 줏대 없이 다른 사람의 의겨을 맹목적으로 따라갔다는 의미는 아니다. 공자는 선비들이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남을 따르려는 동조 욕구와 구별했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좌전(左傳)』은 이 두 가지를 요리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륭한 요리사는 서로 다른 맛을 잘 섞어서 조화롭고 감미로운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낸다. 이때 각각의 맛들은 자신의 고유한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 더 훌륭한 맛을 만들어 낸다.

 

고대 중국인과 그리스인들은 이처럼 인간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에서 서로 달랐을 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에서도 크게 달랐다. 중국인들이 천체를 관찰한 주된 이유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면 땅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 주로 왕실과 국가와 관련된 일들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체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인간사와는 무관한 자기 나름의 규칙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천체에 대한 호기심이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고대 중국인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에 비하여 자연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은 약한 편이었지만, 실용적인 정신을 뛰어났다. 그 결과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앞서 잉크, 자기, 관개 장치, 자석 나침반, 손수레, 파스칼 삼각자, 지진계, 면역 기술, 수량적 지도제작기법, 외륜 보트, 방수선실, 등자세 등을 처음으로 또는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중국인들이 이런 것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때 그리스인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국인이 기술 분야에서 그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철학자이자 중국 연구가인 도널드 먼로(Donald Munro)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유교적 사고에 있어서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되지 않은, 즉 실용적이지 않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앎’이라는 것은 없었다.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생각의 지도』, 감영사, 2005, 32~34쪽.

 

 

65. 생각의 지도(5)-중국과 그리스의 과학과 수학

 

리스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자연계’라는 개념 자체의 발견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연계를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제외한, 우주의 나머지 부분으로 규정하였다. 이 정의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자연계와 인간계를 이렇듯 뚜렷하게 구분한 것은 오직 그리스 문화뿐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자연계에 대해 이러한 독특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부분적인 해답을 그들의 객관적인 외부 세계와 주관적인 내무 세계의 구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그리스 논쟁의 전통에서 기인한 듯하다. 즉, 논쟁을 통해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에 대해 자신이 남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에 있어서 내가 상대보다 더 정확하다는 신념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설득이 가능하다.

실제로 객관성은 주관성에서 비롯된다. 사람들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세상은 그러한 각각의 인식들과 무관한 객관적인 실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깨달음은 아마도 그리스가 무역의 중심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유 무역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다른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만났으니 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일찍부터 통일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그들과 전적으로 다른 철학적․종교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자연계’의 개념을 발견하면서 과학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중국인들이 과학을 일찍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호기심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인간계와는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자연계’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별 사물과 그것의 속성에 집착한 탓에 그리스인들은 아주 기본적인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이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은 ‘그 돌’이 ‘중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무 조각이 물 위에 뜨는 것은 그 ‘나무 조각’이 ‘부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경우 모두 주 초점은 오로지 대상 자체이며, 그 대상을 둘러싼 외부의 힘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중국인들은 우주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장(場)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과 관계를 설명할 때에도 장 전체의 복잡성에 주목했다. 그들이 어떤 일이든지 수많은 힘들이 상호 작용하는 장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들 사이에서도 힘이 작용한다.(action at a distance)’라는 사실을 갈릴레오 훨씬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석과 공명의 원리뿐만 아니라, 갈릴레오조차 깨닫지 못했던, 달의 운동과 조류 사이의 연관성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생각의 지도』, 감영사, 2005, 45~47쪽.

 

66. 생각의 지도(6)-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자기 개념

 

동양적 사고에서 바라본 개인은, 항상 어떤 구체적인 맥락 속에 있는 존재이다. 구체적인 어떤 사람과 구체적인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을 분리시켜 그의 행위나 속성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동양의 사고 방식에서는 매우 낯선 일일 수밖에 없다.

인류학자인 에드워 홀(Edward Hall)은 이러한 차이를 ‘저맥락(low context)’ 사회와 ‘고맥락(high context)’ 사회의 구분을 통해 설명하였다. 저맥락 사회인 서양에서는 사람을 맥락에서 떼어내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개인은 맥락에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이 상황에서 저 상황으로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 인간이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서 주변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철학자 도널드 먼로의 표현을 빌자면 동양인들은 인간을 “가족이나 사회 혹은 도의 원리와 같은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한다.” 인간은 ‘인간의 관계 속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독립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리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행위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조정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관계에서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 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동양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내집단에 대해서는 강한 애정을 보이지만, 외집단이나 그저 아는 사이인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거리를 둔다. 그들은 자신이 내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는 매우 유사하다고 느끼고, 그들을 외집단 구성원들보다 훨씬 신뢰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자신과 내집단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며, 내 지단원이나 외집단원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보편주의적 행동원리를 따른다.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생각의 지도』, 감영사, 2005, 54~쪽.

 

 

 

 

 

 

 

 

 

 

 

67. 시경(詩經)

 

유학(儒學)의 원조(元祖)인 공자(孔子) 역시 「시경(詩經)」을 최고의 경전으로 중요시하였다.「예기(禮記)」․「효경(孝經)」․「춘추전(春秋傳)」에 무수히 인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논어(論語)」에는 특히 그의 우월성을 상조하였다. ≪술이(術而)≫에는 “공자께서 평소에 늘 말씀하신 것은 시(詩)와 서(書) 및 예(禮)를 행하는 일이었다. [子所雅言 詩書執禮]” 하였으며, ≪태백(泰伯)≫에는 “학자(學者)들은 시(詩)에서 선(善)한 마음을 흥기(興起)시키고 예(禮)에서 행실을 확립하며 악(樂)에서 완성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말씀하셨다. ≪계씨(季氏)≫에는 그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시(詩)를 배웠는가? 사람이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學詩乎 …不學詩 無而言]”하였으며, 또한 “사람이 주남(周南) ․ 소남(召南)을 배우지 않으면 얼굴을 담장에 대고 서있는 것과 같다.[人而不爲周南召南其猶正墻面而立也與]” 하여, 이남(二南)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또《양화(陽貨) 》에는 “제자(弟子)들! 너희들은 어이하여 시(詩)를 배우지 않는가? 시(詩)는 선(善)한 마음을 흥기(興期)시키고 덕행(德行)과 정사(政事)를 관찰할 수 있으며, 여럿이 모여 화(和)하게 지낼 수 있고 완곡한 표현으로 원망스러운 심경(心境)을 토로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군주를 섬기며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물명(物名)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된다.”하여, 「시경(詩經)」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근본임을 역설하였다.

공자는 또 「시경(詩經)」은 내용이 충후(忠厚)하여 사람의 심성(心性)을 수양함을 누누이 말씀하였다. 「논어(論語)」」≪위정(爲政)≫에는 「시경(詩經)」3백 편을 한 마디 말로 요약하면 마음에 간사(부정)함이 없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하였으며,「禮記」≪경해(經解)≫에서는 육경(六經)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溫柔淳厚 詩敎也’라 하여, 詩를 배우면 사람의 마음이 온유순후해진다고 말씀하였다. 즉 「詩經」은 人心을 순화시키고 자신의 의사를 완곡히 표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므로, 인간의 윤리․도덕으로부터 정치․외교 등 폭넓은 학문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백효 역주,『시경집전(상)』, 전통문화연구회, 2008. 5쪽.

 

 

 

 

 

 

 

68. 관저(關雎)

關關雎鳩(관관저구)

在河之洲(재하지주)(로다)

窈窕淑女(요조숙녀)

君子好逑(군자호구)(로다)

관관히 우는 저구새

하수의 모래섬에 있도다.

요조한 숙녀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 새 우는 소리 관

鳩 : 비둘기 구

洲 : 섬 주

窈 : 고요할 요

窕 : 고요할 조

逑 : 짝 구

參差(치)荇采(참치행채)를

左右流之(좌우류지)로다

窈窕淑女(요조숙녀)를

寤寐求之(오매구지)로다

求之不得(구지부득)이라

寤寐思服(오매사복)하여

悠哉悠哉(유재유재)라

輾轉反側(전전반측)하노라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좌우로 물길따라 취하도다.

요조한 숙녀를

자나깨나 구하도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지라

자나깨나 생각하고 그리워하여

아득하고 아득해라

전전하며 반측하노라.

參 : 들쑥날쑥할 참 差(치) : 어긋날 치 荇 : 마름 행 菜 : 나물 채 寤 : 잠깰 오

寐 : 잠잘 매 服 : 생각할 복 愈 : 아득할 유 輾 : 구를 전 轉 : 구를 전

側 : 기울 측

 

參差(치)荇采(참치행채)를

左右采之(좌우채지)로다

窈窕淑女(요조숙녀)를

琴瑟友之(금슬우지)로다

參差(치)荇采(참치행채)를

左右芼之(좌우모지)로다

窈窕淑女(요조숙녀)를

鐘鼓樂之(종고락지)로다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좌우로 취하여 가리도다.

요조한 숙녀를

거문고와 비파로 친히 하도다.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좌우로 삶아 올리도다.

요조한 숙녀를

종과 북으로 즐겁게 하도다.

參 : 들쑥날쑥할 참 差(치) : 어긋날 치 荇 : 마름 행 菜 : 나물 채 琴 : 거문고 금

瑟 : 비파 슬 芼 : 나물 모, 삶아서 올릴 모 鼓 : 북 고

 

성백효 역주,『시경집전(상)』, 전통문화연구회, 2008. 26~27쪽.

 

 

 

69. 동화(1)-가장 아름다운 꽃/ 정호승

 

남편이 죽었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새벽에 경부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남편의 차를 들이받아 버렸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남편의 죽음을 기정 사실화했으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여름 휴가 때 첫아들을 안고 고향의 바닷가를 찾자고 하던 말만 떠올랐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도대체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망스러웠다. 가난했지만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려고 노력하던 남편이었다.

다니던 성당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 해산을 했다. 남편이 다라던 대로 아들이었다.

그녀는 아들은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았다. 동해가 보이는 산자락에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포대기를 열어 남편이 잠든 무덤을 아기에게 보여주었다. 파도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남편을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다시 원망스러웠다. 아들은 얻은 기쁨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더욱 컸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왜 성당에 가지 않느냐?”

산을 내려오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불렀다. 정이 넘치는, 햇살같이 따스한 음성이었다.

“나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예쁜 아들을 줬는데도?”

“네, 그래도 원망스러워요.”

그녀가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마당 앞 꽃밭으로 데라고 갔다. 꽃밭에는 장미와 달리아, 채송화와 맨드라미 등이 활짝 피어 있었다.

“여기에서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 보거라.”

시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다. 얘야, 이제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정호승, 『울지 말고 꽃을 보라』, 해냄, 2011,62~64쪽.

 

70. 동화(2)-기다림/ 정호승

 

제주도 만장굴 속을 걸어가다 보면 커다란 돌거북 한 마리가 나온다. 사람들은 그 돌거북의 등이 제주도의 지형과 닮았다고 해서 거북 주위에 울타리를 쳐놓고 무척 애지중지한다.

어느 날 만장굴을 구경 간 한 시인이 거북에게 왜 바다에서 살지 않고 이렇게 굴속에 혼자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거북이 슬픈 눈을 하고 시인에게 말했다.

“저는 원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바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라산에 화산이 터지는 바람에 용암에 뒤섞여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다가, 바닷물은 빠져나가고 저만 남아 이렇게 돌거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만장굴에 바닷물이 다시 흘러 들어와 제가 다시 바다로 헤엄쳐 갈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단 한 번도 그 기다림을 포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271쪽)

 

71. 동화(3)-기다림/ 정호승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하나의 전과물로써 조선인의 귀를 잘라 일본으로 가져가 매장한 무덤을 귀무덤, 즉 이총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무구에 이 무덤이 있다. 그런데 이 귀무덤에 묻힌 수많은 것 중에서 아버지 귀와 아들 귀가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 귀가 아들 귀에게 물었다.

“아들아, 넌 늘 무슨 소리를 듣느냐?”

“저는 우리가 살던 바닷가 파도소리를 들어요. 아버지는요?”

“응, 나는 어린 시절 해질 무렵에 엄마가 사립문 앞에서 ‘밥 먹으러 오너라’하고 외치던 소리를 늘 듣는단다. (282쪽)

 

정호승, 『울지 말고 꽃을 보라』, 해냄, 2011.

 

 

 

 

 

 

 

 

 

 

 

72. 우문현답(1) 실행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것이 없다

 

나는 꿈이 없고 비전이 없는 사람은 쓸모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자신의 꿈과 비전을 조금이라도 실현하기 위해 자기 행동을 바꾸는 실제적인 노력이 없다면 그 역시 쓸모없는 사람이다.-시러도어 루스벨트

 

-꿈과 비전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되니까요. 그러나 꿈과 비전을 갖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바꿔가는 노력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생각만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지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만 하고 정작 행동은,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요.

여러분이 혹시 지금 그런 사람은 아닌가요.(166쪽)

 

73. 우문현답(2) 내 삶의 이야기꾼은 나

 

당신은 당신 삶의 이야기꾼이며, 자신만의 전설을 창조할 수 있다.-이사벨 아옌데

 

-짧은 문장이지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자신만의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스스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상황에 밀려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대충 대충 하루하루를 보내버리기에는 우리 삶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소설가나 드라마작가처럼, 혹은 영화감독처럼, 자신을 주인공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며, 어떤 것을 먹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지를 기획하고 연출해 보세요. 그렇게 자신만의 이야기,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보세요.(15쪽)

 

74. 우문현답(3) 자신감을 매일 축적하라

 

자신감은 우리의 발걸음이 작고 조심스러워질지 아니면 대담해질지를 결정한다.-로바제스 모스 캔터『자신감』

 

-사람이 어떤 일을 해내느냐 해내지 못하느냐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자신감일 겁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을 작은 일도 ‘나는 못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감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자신감을 축적해 온 사람만이 필요할 때 자신감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의 작은 약속, 예를 들어 내일부터 6시에 일어나자거나 일주일에 세 번씩 꼭 운동을 하자거나 하는 약속을 꾸준히 지킨 경험들이 모이면 자신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쌓인 자신감은 어느 날 큰 힘을 발휘합니다.

어쩌면 살아가는 순간순간 자신감을 축적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축적된 자신감을 가지고 원하는 일들을 성취하는 과정일 것이고요.(21쪽)

 

공병호, 『우문현답』, 해냄, 2010.

75. 우문현답(4)-매일 좋은 습관을 가꾸어가라

 

먼저 습관을 만드세요. 그러면 습관이 당신을 만들 것입니다. 나쁜 습관을 정복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습관이 당신을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롭 길버트

 

-미국의 교육개혁가 호레이스 만은 “습관은 철사를 꼬아 만든 쇠줄과 같다. 매일 가느다란 철사를 엮다 보면 이내 끊을 수 없는 쇠줄이 된다.”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의 결심이란 얼마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더라도 그 결심을 꾸준히 행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습관이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무언가를 이룰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길 원한다면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신앙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습관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여는 것입니다. 이 습관 하나만 갖고 있다면 저는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습니다.(31쪽)

 

76. 우문현답(5)-스트레스는 자연의 계획이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스트레스는 신체를 보호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은 주변 환경을 경계하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브루스 맥웬

 

-록펠러 대학교 생물학 교수인 브루스 맥웬의 말입니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환경에 대한 인지를 강화하고 시력과 청력을 약간 향상시키며 근육이 조금 더 잘 움직이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스트레스를 더 잘 받는 신체를 타고난 사람들이 자연 선택된 인류의 조상들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것 자체도 스트레스가 되지요.

스트레스는 주로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당하는 일에서 발생합니다. 살아가면서 모든 일을 다 준비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한 미리미리 준비하는 습관을 가지세요. 그러면 스트레스 상황을 조금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42쪽)

 

77. 우문현답(6)-편하게 살고 싶으세요?

 

항구에 닻을 내리는 있는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존 셰드

 

-“저는 편하게 살고 싶은데요.”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다가 이따금 듣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과연 편안함 자체를 추구하라고 주어진 것일까요?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러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아내고, 내가 가진 것을 최대한 발휘하여 소망과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닐까요? 그리고 나아가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된다면 더욱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요?(51쪽)

 

공병호, 『우문현답』, 해냄, 2010.

 

78. 우문현답(7)-삶이란 원래 불공평하다

 

불공평한 것을 불공평할 시간에 지금 현실에 주력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원래 불공평한 것이 세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마음 편히 지금의 일을 할 수 있다.-스기야마 히로미치『회사라는 사막이 오아시스로 바뀌는 100가지 물방울』

 

-태어날 때부터 우리 삶은 불공평하지요. 우리 모두는 부모도, 집안도, 생김새도, 지능도, 재능도, 성격도, 그 모든 것이 다르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평생 불공평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불공평하거나 좌절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불평해 보아야 자신만 더 초라해지고 못나질 뿐이니까요. (60쪽)

 

79. 우문현답(8)-책을 가까이 하면 외롭지 않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다.-데카르트

 

-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독서를 생활화했다고 합니다. 레이건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마이클 디버의 『미국을 연주한 드러머, 레이건』이라는 책에 소개된 일화입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소년에게 아주 훌륭한 삶의 태도를 지니게 했고 나아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책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책을 가까이 하면 외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런 자산을 가지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의 주신이 될 수 있는 것이죠.(75쪽)

 

80. 우문현답(9)-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라

 

경청은 귀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믿음, 존경, 관심, 그리고 정보의 공유에 관한 것이다.-베버리 브리그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리는 것의 25퍼센트만 제대로 듣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75펴센트느 그냥 흘려듣고 마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 25퍼센트는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대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은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최고의 방법 가운에 하나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관심이 있으며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과정을 통해서 행간에 담긴 의미를 포착하고 그 의미 속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면 온전히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세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면 더 좋겠지요.(85쪽)

 

공병호, 『우문현답』, 해냄, 2010.

 

81. 우문현답(10)-혼자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신 혼자 있을 때도 근사하게 시간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떠나고 없을 때나, 우연히 혼자 있을 때 갖게 된 시간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자신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껴둔 시간이어야 합니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 혼자 있을 때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깊이와 그릇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다면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그리고 무리 속에 섞여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거기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제부터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세요.(100쪽)

 

82. 우문현답(11)-잠재력을 열어주는 열쇠

 

힘과 지적 능력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이 여러분의 잠재력을 열어젖히는 열쇠다.-검은 큰 사슴

 

- ‘검은 큰 사슴(헤하카사파, 1863~1950)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오그랄라수우 족의 예언자 겸 주술사로, 백인들에게 치열하게 저항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며, 삶의 지혜를 담은 주옥같은 명언을 아주 많이 남겼습니다.

아무리 지능이 뛰어나고 귀한 재능을 가졌더라도, 집요하게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도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땀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을 당해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171쪽)

 

83. 우문현답(12)-감사는 행복의 열쇠

 

감사함은 우리의 손 안에 있는 행복한 인생의 열쇠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더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늘 다른 것이나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다비드 슈타인들-라스트 수사

 

- 1926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다비드 슈타인들-라스트(David Steidl-Rast) 수사는 은둔하는 수도승의 삶과 다섯 개 대륙을 넘다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에 대해 강연을 하는 삶을 병행해 오고 있는 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할 수 있다면,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할 수 있다면 늘 겸허하게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할 수 있다면, 타인에게 도움과 위안의 손길을 내밀 수도 있지요.

언제 더시서나 감사할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255쪽)

 

공병호, 『우문현답』, 해냄, 2010.

 

84. 꽃보고 춤추는 나비와 /송이

 

꽃보고 춤추는 나비와 나비 보고 당싯 웃는 꽃과

저 둘의 사랑은 절절(節節)이 오건마는

어떻다 우리의 사랑은 가고 아니 오나니.

-송이

 

시조는 해주 유생 박준한(朴俊漢)과 기생 송이(松伊)가 나누었던 애달픈 사랑의 기록이다. 박준한이 과거 길에 강화의 객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주모가 ‘송이’라는 정절이 뛰어난 기생이 있다 하여 술자리를 같이 했다. 술이 거나해진 유생은 송이를 위해 시 한 수를 읊고 화답하라며 그에게 수작을 걸었다. 송이는 유생이 부른 노래가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라 전원 부원군 고산 류근(柳根)의 작품이라는 지적을 하고, 송이라는 제 이름에 비유 노래를 불렀다.

 

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 절벽에 낙락장송 내 귀로다

길 아래 초동의 겹낫이야 걸어볼 줄 이시랴.

 

유생은 참 머쓱해졌다. 송이의 박식에 놀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룻밤 정을 나누고 싶다고 했지만, 송이는 아무에게나 정을 줄 수 없다고 이 시로 화답한 것이다. 그리고 과거를 보러 가며 객줏집에 빠져 큰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무안을 덜어줬다. 박준한은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송이는 그때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반년이 지난 뒤 유생은 진사시에 급제하여 나타났고 송이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박준한은 송이를 데리러 오겠다는 언약을 하고 떠났는데,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일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송이가 언약을 의심하고 잇을 무렵, 시 한 수가 전달되었다. 병석에서 송이를 그리워하는 애끓는 마음을 담은 시로 서책 속에 끼여 있는 것을 노모가 발견해 보낸 것이었다.

전갈에 의하면 박준한은 급제 후 집으로 돌아와 바로 병석에 누웠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송이는 그 소식을 접하고 통곡하다가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입산한 노모가 계시다는 황해도의 작은 암자에 들어갔다. 속세를 떠나기 전 그들의 시린 사랑을 한탄하는 이 시조를 남기고…. 오! 가고 오는 사랑의 아픔이여!

 

문무학,『사랑이 어떻더니』, 학이사, 14~15쪽.

 

 

 

 

85. 오늘도 좋은 날이요 / 실명씨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 있어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놂이 좋아라.

-실명씨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창작 연대도 알기 어렵다. 그렇지만 ‘좋은’이라는 낱말 하나를 여기 놓고 저기 놓아 한 수의 시조를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아홉 번이나 나오는 ‘좋다’라는 말에, 하나 더 보태어 열 개를 채우며 그야말로 ‘좋다’하여 더 좋아지고 싶다.

“좋은 날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게 노는 것이 좋다.”고 풀이할 수 있는데,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니 어떻다는 육하원칙에 따른 것 같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며 정말 이런 날을 만날 수 있을까 싶다. 한편으로 이 작품을 역설의 기법으로 읽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좋기만 한데 그걸 억지로 역설로 읽어 다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닌 나쁜 것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작품이 억지를 부려 아주 부자연스럽거나 지나치게 꾸며낸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에 결코 가벼운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이 얼마나 편안한가. 그리고 좋지 않은 날이라도 이 시조를 자꾸 읽다 보면 그야말로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 삶에는 안타깝게도 좋은 것보다는 나쁘거나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좋고 나쁜 것이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좋게 보려는 노력을 해야 좋아지지 않겠는가. 누구나 늘 좋은 것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것을 우리는 꿈, 또는 희망이란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렇지만 좋은 것만을 좋아하다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설날은 한국인 모두에게 대체로 좋은 날인 것이다.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설 전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반가운 사람들 만나서 좋은 음식을 나누며 좋은 이야기로 좋은 밤을 새워도 좋은 날이리라.

설빔을 차려 입고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누구라도 만나 덕담을 나누면 누구 좋고 매부 좋은 그런 날이 되리라.

 

문무학,『사랑이 어떻더니』, 학이사, 106~107쪽.

 

 

86. 반중 조흥감이 / 박인로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 즉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박인로

 

어버이 받드는 일이 날 받고 달 받아 하는 것이 아니지만, 5월은 사랑 중에 으뜸인 사랑, 어버이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옛시조에 ‘효’를 노래한 작품이 많은데 그 중에서 회자되는 것이 ‘조홍시가’다.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의 작품으로 영천 도천리에 시조비(時調碑)가 서 있다.

이 시조는 ‘육적회귤(六績懷橘)’의 고사가 바탕이 되고 있다. 옛날 중국 오(吳)나라의 육적이, 여섯 살 적에 원술(袁述)의 집에서 접대로 내놓은 유자 세 개를 품안에 숨겼다가 발각되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고 싶어 그랬노라고 대답, 그 지극한 효성이 모두를 감동시켰다.

이 시조를 풀어보면 “소반에 담긴 일찍 익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가 아니라도 품안에 몇 개 집어넣고 싶지만/품어 가져간다 해도 반가워할 어머니가 없으므로 그것 때문에 슬퍼합니다.”란 뜻. 중장의 ‘유자 아니라도’가 고사와 관련된다.

지금까지 이 시조는 노계가 한음(漢陰)이 접대로 내놓은 감을 보고 ‘육적회귤’의 고사에 비추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 알려진 것.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성리학을 배우러 온 노계에게 조홍감을 대접하며 그것을 소재로 하여 시조를 짓도록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석배, 경오본『노계가집』에 대하여)

한음이 짓게 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은 한음이 ‘조홍시가’를 보고, 노계에게 단가 3장을 더 짓도록 한데서 연유된다. 노계의 ‘조홍시가’는 4수인데 첫째 수와 2~4수는 그 창작 시기가 다르다. 첫 수는 여헌이 짓게 했고, 나머니 세 수는 여헌이 짓게 한 첫 수를 보고, 한음이 노계에게 3수를 더 짓게 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조홍시가’ 첫 수는 이렇게 창작되자마자 화제를 모았다. 둘째 수는 효자들의 고사를 인용 효도하겠다는 심정을, 셋째 수는 나이 드신 부모님이 더디 늙으시기를 바라는 심정, 끝수는 현인군자들과 교유하고 있는 유자로서의 자긍심을 담고 있다.

첫 수만 많이 알려져 있는데, 효를 실천하려는 선비의 다짐이 오늘의 많은 불효자들을 얼굴 붉히게 한다.

 

문무학,『사랑이 어떻더니』, 학이사, 106~107쪽.

 

 

 

 

87. 칼의 노래-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 새 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끼니들이 시간의 수레바퀴처럼 군량 없는 수영을 밟고 지나갔다. 그해 가을에 해남, 강진, 장흥, 보성, 승주, 고흥은 수확기에 백성들이 흩어져 추수하지 못했다. 가을비가 오래 내려 물에 잠기고 잠긴 논이 썩었고 멸구가 끓었다. 사람 없는 마을마다 새떼들이 창궐해서 노을 속을 날았다.

경상 연안 쪽 추수는 적들이 몰아갔다. 적들은 여수, 순천 너머에 포진했고 전투는 소강이었다. 적들은 연안 육지의 성안에 군량을 쌓아두고 있었다. 오직 적의 군량을 빼앗기 위한 전투를 궁리해 보았으나 적의 육지 요새를 바다에서 공격할 수 없었고 수군을 육지로 돌려서 육로를 따라 적의 내륙 쪽 후방을 찌를 수도 없었다.

싸워서 먹을 수도 없었고 백성을 지키지 못한 군대가 백성들로부터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진도가 그나마 온전하게 가을에 8백 석을 보내왔다. 완도 섬 안에 농토가 좁았고 백성들은 일찍부터 바다에 기대어 살았다. 적이 닿지 않아서 완도는 온전했으나 군량은 콩 3백 석에 그쳤다. 완도에서 온 콩으로 메주를 쑤어 된장을 담갔다. 수영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관아들은 3백 석, 4백 석씩을 보내왔거니 가을이 다 가도록 아예 기별이 없었다. 종사관을 보내 다그치면 고을 수령들은 빈 창고를 열어 보여주었다.

읍진과 포구에 남겨둔 군량을 수영으로 가져다 먹었다. 읍진의 군량은 50석, 1백 석 정도였다. 만호진의 수군들을 먹이고 또 전투가 끝났을 때 가까운 포구로 들어가 먹기 위해 분산시켜 놓은 비상식량이었다. 전투가 없어도 끼니는 돌아왔고 모든 끼니는 비상한 끼니였다. 의주로 달아난 임금은 수군의 배고픔과 추위를 뼈에 사무치게 슬퍼하는 교서를 수영으로 보내왔다. 임금의 교서는 울음과도 같았다. 배고픈 장졸들을 모아놓고 임금의 교서를 읽어주던 날도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점심을 거르고, 아침과 저녁에 5홉씩 먹여도 사부와 격군들은 하루에 80석을 먹었다. 생선과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수군의 다행이었다. 생선은 어종을 구분하지 않고 한 솥에 넣어 된장을 풀고 끓였다. 둔전에서 나오는 무와 배추를 소금에 절였다. 수졸들이 된장이나 짠지를 담글 때 나는 늘 소금을 많이 넣으라고 일렀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1 초판/ 2010년 34쇄, 232~234쪽.

 

 

88. 칼의 노래-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그때 나는 한산 통제영에 부임해 있었지만 임금이 김덕령을 때려죽인 일의 전말은 바람처럼 전군에 퍼졌다. 군은 나직이 엎드렸다.

그해 봄에 충청도 부여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객기 많고 담력 좋은 건달이었다. 그의 군사는 사노, 승려, 피난민을 끌어 모은 7백석이었고 그가 부여를 장악했을 때 그의 무리는 1만이 넘었다. 그는 처음 군사를 끌어 모을 때 의병 행세를 했다. 그때 김덕령은 진주에서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 있었다. 김덕령은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토벌군을 이끌고 진주에서 남원 운봉까지 나아갔다. 그가 부여로 입성하기 직전에 이몽학은 부하의 칼에 맞아 죽고 반란군은 흩어졌다. 김덕령은 하릴없이 군사를 거두어 진주로 돌아갔다. 서울로 압송되어 간 반란 연루자들은 김덕령을 공모자로 끌어들였다. 김덕령의 진입이 늦어진 까닭은 그가 이몽학과 내통하고 운봉에서 일부러 지체했다는 혐의가 성립되어 갔다.

도원수 권율은 돌아온 김덕령을 체포해서 하옥했다. 권율은 김덕령의 혐의 내용을 수사하지 않은 채, 김덕령을 묶어서 서울로 보냈다. 그때 의병장 곽재우도 얽혀들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이몽학이 처음에 의병으로 가장했으므로, 임금에게 의병이란 뒤숭숭한 무리들이었다. 김덕령은 의금부에서 한 달 동안 여섯 번 심문을 받았다. 부러진 정강이에 거듭 주리를 틀었다. 마지막에 그는 무릎으로 기어서 형리 앞에 나아갔다. 그는 조용했고, 그의 진술은 논리가 맞았다. 그때 임금은 말했다.

-저 놈이 형장(刑杖)을 가벼이 여겨 오히려 태연하니 참으로 역적이다. 쳐 죽여라.

김덕령은 그렇게 죽었다. 임금의 사직은 끝없이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고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이 죽기 이태 전, 갑오년 가을에 나는 거제도에서 김덕령을 만난 적이 있었다. 김덕령은 진주에서 이겼고 담양에서 이겼다. 내가 보기에 그의 산발적인 승리는 전쟁의 국면을 전환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영남의 몇몇 고을을 온전히 지켜냈다. 거제도에서 만났을 때 김덕령의 풍모는 단아한 선비와도 같았다. 그이 담력과 기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때 김덕령의 육군은 섬의 안쪽 고지에 진 친 적의 주력을 해안 쪽으로 내몰았고 나는 잔문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다로 몰려난 적들을 부수었다. 기다릴 때, 나는 포구에 묶인 적들의 배를 부수지 않았다. 적들은 그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다. 잔문포에서 적들은 가루처럼 흩어져 갔다. 김덕령을 잡아들일 때, 임금은

-덕령은 삼군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다. 누가 능히 이자를 묶을 수 있겠는가?

라면서 발을 굴렀다고 한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곽재우는 거듭된 심문 끝에 겨우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풀려난 그는 한동안 군사를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은거하는 산이 구월산이라고도 했고 지리산이라고도 했다. 풍편에 그의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가 땅 위의 곡식과 채소를 일체 끊고 안개를 마시고 개울물을 퍼먹으며 연명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미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武)와 충(忠)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1 초판/ 2010년 34쇄, 79~82쪽.

89. 이삭줍기(1)

 

1. 인생의 가치는 노력이고, 노력의 극치는 성취이며, 성취의 보상은 기쁨이다.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성취의 기쁨을 한껏 맛보게 될 것이다. -제임스 앨런(1864년생, 영국)

 

2. 운명의 수레바퀴는 풍차보다 빨리 돈다.-세르반테스, 『돈키호테』

 

3. 내공이 있는 사람은 주변의 변화가 나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주변의 변화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며 관찰을 한다.

그런 사람은 사고가 열리고 변화하게 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하며 닫힌 사고에 갇힌다. 공병호,『내공』

 

4. 문학 애호가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적인 것, 생명이 있는 것, 그리고 평범한 것에 대한 저의 시민적 애정, 바로 그것이니까요. -토마스 만 Thomas Mann/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

 

5. 여럿의 윤리적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6.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개념에게도 적용된다. 교육의 반대는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고 후일 인종차별 철폐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에리비젤(Elie wiesell)의 말

 

7. 유머는 인간 두뇌 활동 중 가장 탁월한 활동이다.-창의력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에드워드 드 보노’ 박사

 

8. 작품의 의미는 이를 해석하는 독자의 주관적인 감상에 의해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다. -볼프강 이저

 

9. 학문이 있으면 산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학문이 없으면 어두운 도랑을 걷는 것처럼 더듬어 낼 수도 없으며 사람을 몹시 고생스럽게 할 것이다.-마오쩌둥

 

10.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칼 포퍼

 

 

90. 이삭줍기(2)

 

11. 이 세상 최고의 명품 옷은 바로 자신감을 입는 것입니다. -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154쪽)

 

12. 흔히 잡초라고 부르는 풀들이 그냥 잡초만은 아님을 깨닫는 소득은 있었지만, 그것은 반만의 깨우침에 지나지 않았다. 잡초가 잡초임을 깨닫는 것도 소중한 일깨움이라는 생각은 뒤늦게 떠올랐다. -윤구병, 『흙을 밟으며 살다』, 휴머니스트, 2010, 217쪽

 

13. 당신 앞에서 누구의 험담을 하는 자는 언젠가는 다른 누구 앞에서 당신 험담도 할 사람입니다.-스페인 속담

 

14.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은 경망스러운 인간이고, 그와 더불어 맞장구를 치는 사람은 비겁한 인간이며, 이것을 엿듣고 전하는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다.-주자

 

15.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는 거 아니겠어. 메스너한테 산 같은 게 누구한테나 한 가지씩은 있는 거 아니겠는가, 이 말이야. -신경숙, 단편소설 ‘멀리, 끝없는 길 위에’

* 라인홀트 메스너 : 이탈리아 남티롤 태생 등산가.1980년 높이 8,848m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을 산소호흡기 없이 혼자서 등반한 최초의 인물.

 

16.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綠之人) 하고 지불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 니라.)-명심보감(明心寶鑑)

 

17. 시는 특수한 감정의 무늬를 가질 때도 간혹 있기는 하나 그보다는 보편적 감정과 정서를 노래할 때 오히려 좋은 시 혹은 감동적인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참인 것이다.-이기철, 『시론』, 284쪽.

 

18. 새로운 제재를 노래한 시가 반드시 새로운 시는 아니다. 그 제재를 보는 눈이 새로워야 한다.(흄)

 

19. 문학은 언어로 형상화된 체험의 소통이다.-구인환 외, 『문학교육론』

 

20. 시인은 항상 시대의 사람이며 동시에 초시대의 사람인 것이다.-김기림, ‘오전의 시론’

 

 

 

91. 이삭줍기(3)

 

21. 낭독은 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시를 낭독하는 동안 시의 분위기와 리듬을 파악할 수 있고 시어(詩語)의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시의 낭독은 문자언어를 단지 음성언어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낭독 자체가 작품에 대한 구두 차원의 해석[Oral interpretation]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구인환 외, 『문학교육론』, 1998. 271쪽.

 

22.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히포크라테스

 

23. 사람이란 하늘 밑에 사는 날까진 하루라도 천리(天理)에 방심을 해선 안 되는 거다…….-이태준의 단편 ‘돌다리’ 마지막 문장.

 

24. 나는 내금강에 갔다가 만폭동 단풍 한 잎을 선물로 노산(鷺山)에게 갖다 준 일이 있다. 그는 단풍잎을 받고 아픔다운 시조를 지어 발표하였다.-피천득의 수필, ‘선물’에서

 

25.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능력 중의 하나가 아니라 언어로 해서 인간이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요, 그리하여 언어는 존재의 집이 되는 것이다. 시란 사물에 이름을 갖다 붙여 주는 일, 사물이 말하는 일, 또는 사물의 본질에 건설적으로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된다.

시는 현존재에 수반하는 한갓된 장식품도 아니고 또한 일시적인 감각도 아니며 더욱 열중이나 오락 따위는 아니다. 시는 역사를 담당하는 근거임으로 해서 또한 한낱 문화현상도 아닐 뿐더러 나아가서 문화정신의 한갓된 표현도 아니도. 시는 문화현상 이상의 것 즉 존재의 확인 기제인 것이다.-이기철, 『시학』, 28쪽.

 

26. 음보율 : 음보라는 것은 영시에서 foot, 즉 음절의 일정한 단위를 가리킨다. 대체로 어절(체언+조나나 어간+어미)을 한 음보로 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이의 계산 방법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체로 음보 분할은 기식(氣息)(breath group), 통사(syntax) 관계, 율독(scansion)에 따르는 시간의 등장성, 의미 ?또는 문맥(meaning, context)관계를 생각하면서 음보를 분할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할 원칙은 실제의 율독에서는 그리 이상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언제나 논자에 따라 자의적인 것이 되기 쉽다.-이기철,『시학』, 99쪽.

 

27. 黃雲野色賽晴佳 (황운야색새청가, 황색 구름이 들빛에 개어서 아름다운 것을 보니)

秋熟嘗新百物皆 (추숙상신백물개, 가을이 완연하매 새 것을 맛보니 만물이 다 그러하다)

但願一年平日供 (단원일년평일공, 다만 일년 중 평일에 먹을 수 있는 것을)

無加無減似嘉俳 (무가무감사가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 유만공의 歲時風謠 - 2012년 추석을 맞이하여 김대홍 교장 선생님께서 교직원들에게 보낸 시

 

 

 

92. 현대시조(1) 바람의 뼈-불일암 / 유선철

 

 

바람의 뼈

-불일암

 

유선철

 

단순한 무대는 화려하고 장엄했다.

 

오롯한 발자취, 죽음마저 연주였다

 

고요는 달빛을 풀어

그의 뜰 쓸고 갔다

 

모서리 동그마니 묵언에 든 나무 의자

 

그 아래 하얀 뼈가, 말씀이 묻혀 있다

 

망초꽃 흔들어놓은

바람이 거기 있다.

 

* 201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 하순희, 이달균

 

 

 

 

 

 

 

 

 

 

 

 

 

 

93. 현대시조(2) -꺾이는 소리 / 김우연

 

 

꺾이는 소리

 

김 우 연

 

이슬을 굴리면서

반짝이던 꽃일러니

 

바람에 밀리다가

힘없이 꺾인 이여

 

수많은 별을 헤이던 이 시대의 젊은이여.

 

정상이 비정상인

불감증 거리에서

 

타율이 자율 되어

고삐를 당길 때면

 

흐뭇한 미소 뒤에는 꽃이 지고 있는 것을.

 

깊은 산 헤집으면

풀꽃들이 서성이고

 

새 되어 날다보면

산 높이가 보이나니

 

앞길이 벼랑이라도 올라보면 하늘인 걸.

 

* 1994년 월간문학 74회 신인상 수상작

 

 

 

 

 

94. ‘흴링’은 장삿속이다 / 양선희

 

‘힐링’ 그리고 ‘복고’.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푹 빠져 있다는 트렌드다. 마음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받으려는 인구는 주로 2030세대이고, 청춘을 회고하는 복고 열풍의 회고연도는 1990년대로 주 소비층은 30대란다. 이렇게 아프고, 노쇠하고, 회고에 매달린 젊은이들이 넘치는 나라. 이런 나라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그려지지 않는다. 너무 절망적이어서. 어쩌다 2012년 대한민국 젊은이의 자화상은 이런 모습일까. 도대체 우리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아픈가. 정말 아픈 게 맞긴 맞나. 그들의 아픔에 대한 진단은 대략 이렇다. 각박한 스펙 쌓기 경쟁에 지치고, 경제성장은 꺾이고,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이 넘쳐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기회도 적고, 희망이 없어서 아프단다. 한편에선 젊은이들에게 ‘그러니 너희는 아프다’고 진단하고, 또 한편에선 이럴 때는 서로 보듬어 안아주고 위로하는 힐링이 필요하다며 힐링 상품 소비를 부추긴다. 그래서 요즘 ‘힐링 산업’은 승승장구다. 숲과 자연을 낀 ‘힐링 여행’ 상품이 나오고, 건강식품은 ‘힐링 푸드’라는 이름으로 팔린다. 힐링 강좌, 힐링 스포츠, 힐링 댄스 등 온갖 힐링 상품들이 판치면서 19만원짜리 ‘힐링 스파’, 500만원짜리 3박4일 힐링 리조트 여행도 나왔다. 힐링을 내건 브랜드 출원이 줄을 잇고, 힐링을 앞세운 책들도 100여 종이 넘게 책방에 나왔다. TV에서도 힐링을 내세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그러다 보니 최근 대선철에 젊은 표가 아쉬운 대선 주자들은 ‘힐링 캠프’라는 TV 프로그램에 나가 눈도장부터 찍는다. 또 “국민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는 힐링 대통령이 되겠다”는 둥 대선 주자마저 동정 어린 ‘따뜻한’ 표정으로 대책 없는 힐링 이미지를 팔아먹는다. 힐링은 장삿속으로 변질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힐링은 애당초 위로와 치유를 앞세워 젊은이들에게 병들었다고 최면을 거는 상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정말 이 사회가 부조리해서 아프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럼 언제 세상살이가 부조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영문도 모르고 동족 간에 죽고 죽였던 6·25, 경제개발의 미명 아래 억압당했던 유신시대, 대명천지에 군대가 탱크를 밀고 쳐들어갔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극단적 부조리가 판치던 시대에도 살았다.

 물론 90년대, 화려했었다. 홀연히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었을 때 곧 선진국이 된다며 환호했다. 97년 외환위기 전, 날마다 불야성을 이룬 거리에선 화려한 밤 생활이 펼쳐졌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이 좀 우울한 건 맞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가 불투명하고, 양극화로 인한 박탈감이 심해졌다. 그래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풍요롭고, 정부는 늘 복지를 늘릴 궁리를 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기성세대는 불쌍하다고 전전긍긍하면서 과잉보호에 여념이 없다. “엄살부리지 말라”고 따끔하게 꾸짖는 어른도 없다. 6·25로 부모·형제를 잃고, 5·18 민주화운동으로 친구를 잃은 세대, 진짜 상처투성이였던 그 세대도 아프다고 징징거리며 위로를 구하는 데 기운을 빼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벤처를 창업했고, 국민들은 금을 모았다. 진짜 위기의 그 순간엔 모두 살아보겠다고 다시 일어섰을 뿐이다. 상처는 남에게 내보이며 하소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견디고 극복해야 낫는 것이다. 풍요로웠던 90년대가 그립지 않으냐고? 기억나지도 않는다. 살기 바빠서. 바쁘지 않으니 그립고, 치열하지 않으니 아픈 거다. 미래가 불투명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는지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투지가 결정하는 것이다. 힐링과 청춘 회고는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장삿속에 휘둘려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나. 젊음이 얼마나 아까운 것인데. 무엇보다 치유해 준답시고 젊은이들을 나약하게 주저앉히려는 장삿속은 제발 이 땅에서 사라져 주기 바란다.

- 2012. 9.21. 중앙일보 / 양선희 논설위원

 

 

95. 아시아 속의 일본 -이케다 다이사쿠

 

일본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신뢰받을 수 있도록 더욱 진지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에 상호 간의 문화적 근저를 이루는 사상이나 철학에 빛을 비추며 서로 이해하고 함께 배우는 대화가 중요하다.

 

-일본이 핵 폐기를 제창하려면 극복해야 할 벽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을 더욱 분명히 하는 일이다.

 

아직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역사를 부정하는 듯한 언동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풍조에 맞서 철저히 싸우기 이해서라도 중국과 문화적, 교육적으로 교류하는 노력을 더욱 지속했으면 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정치나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정신면에서도 미쳤다. 한반도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무참히 유린했는지 모른다. 일본인이 이 역사를 결코 잊으면 안 된다.

 

일본이 아시아 각국의 신뢰를 받으며 세계평화에 공헌하기 위해서라도 ‘평화외교’와 ‘대화외교’를 기본으로 일본의 전통문화와 과학기술을 활용해 ‘문화입국’ ‘환경입국’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이케다 다이사쿠 명언 100선』, 매일경제신문사, 2011. 182~183쪽.

 

 

 

 

 

 

 

 

 

 

 

 

96. 토황소격문 / 최치원

 

도덕경에 이르기를, “갑자기 부는 회오리바람은 한나절을 지탱하기 못하고, 쏟아지는 폭우는 하루를 계속하지 못한다.” 하였다.

천지에 있어서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는 이와 같이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겠는가?

춘추전에는 이르기를, “하늘이 착하지 못한 자를 돕는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라 그 흉악함을 기르게 하여 더 큰 벌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지금 너의 흉포함이 쌓이고 쌓여 온 천지에 가득 찼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 속에서 스스로 안주하고 반성할 줄 모르니, 이는 마치 제비가 초막 위에 집을 지어 놓고도 만족해하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도 즐거워하며 헤엄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눈앞에 닥친 삶겨 죽을 운명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나는 지금 현명하고 신기로운 계획으로 온 나라의 군대를 규합하니 용맹스런 장수가 구름처럼 몰려들고,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용사들이 소나기처럼 몰려온다. 진격하는 깃대를 높이 세워 남쪽 초(楚) 나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잠재우고, 전함(戰艦)과 누선(樓腺)을 띄워 오(吳) 나라 강(江)의 풍랑을 막으려고 한다.

도 태위 같은 장군은 적군을 무찌르는데 용맹하고, 양 사공 같은 이는 귀신도 두려워할 만한 위엄을 가졌다. 온 세상을 널리 살펴보고 만 리 길을 거침없이 횡행함에 너와 같은 좀도둑은 마치 활활 타는 용광로 속에 기러기 털을 넣는 것과 같고, 높이 솟은 태산 밑에 참새 알이 깔린 것과 같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때는 마침 가을이다. 물의 귀신이 우리의 수군(水軍)을 맞이하며 가을바람은 생물을 죽음의 시련으로 몰아넣으려고 한다. 새벽이슬은 어둡고 미련스러운 기운을 씻어버린다. 파도가 진정되고 도로가 뚫리면, 석두성(石頭城)에서 닻을 올려 최후로 남은 손권(孫權)의 군대에게서 항복을 받던 두예(杜預)와 같이, 나는 경도(京都)를 순식간에 수복할 것이다. 그 기간은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람 죽이기를 싫어하는 우리 황제의 인자한 뜻을 받들어 엄한 법을 적용하지 않고 덕으로써 포용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황제께서는 조정에 영을 내려, “역적을 토벌하는 자는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고, 무지하여 방향을 잃은 자를 깨우치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이 격문을 보내 너의 눈앞에 닥친 위급한 상황을 한 번 더 알려 주는 것이니. 너의 고집을 버리고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최치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에서

 

 

 

 

 

97. 가야를 지도에 되살려내자

 

미술학자라면 정치역사를 감식의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해야지 거기에 감식안이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고대사가 부산 부근에 미마나라 불리던 식민지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4세기 이후 발전한 스에키(須惠器) 토기가 한국 가야토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 때문에 이 주제는 언제나 건드리지 못하는 사안으로 비켜나 있었다.

제4국, 가야가 한국의 교과서에서 취급되지 않은 이유는 일본이 한때 가야를 소위 ‘지배’했다고 하는 황당한 일본역사 기록 때문이다. 이 주장은 물론 진짜 사실을 180도 뒤집어놓은 것이다. 미국 칼럼비아 대학 개리 레저드(Gari Ledyard)교수의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하고 369년부터 505년까지 100년 이상 일본의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 가야를 지배한 것은 부여족이었다. 부여족들은 일본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인 360년경 부산 부근을 일종의 기지로서 활용한 것이다.

이때는 정확하게 가야토기에서 보이는 것 같은 가야의 미의식이 일본으로 옮겨져 당시 보잘 것 없는 수준의 일본 하지키(土師器) 토기를 밀어내고 그곳의 궁중토기로 쓰여진 시기였다. 두말할 것 없이 가야의 부여족들은 일본 정벌길에 말과 함께 가야 도공도 데리고 갔으며, 거대한 무덤을 조성할 때 쓸 노비는 전쟁 포로들로 충당했다. 가야 부여족은 그 당시 무서운 전사들이었다.

일본의 지배층이 된 부여족들은 부산에 일종의 분실 왕가로서 남겨두고 온 가야의 귀족층과 국제결혼을 했다. 일본이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면서 그들이 한반도 남동지역 한 부분을 다스렸다고 하는 주장은 완전히 그 반대인 것이다. 그런데 근대 들어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로 인해 이 사실은 매우 미묘하면서도 긴장된 사안이 되었다.

가야고분에서 나오는 토기는 일본에서 4-7세기에 걸쳐 성행한 하니와(埴輪) 토기의 근원이 되었다. 발굴된 하니와 토기에는 배 모양, 집 모양도 있고 무녀상도 있다. 이는 부여족이 신봉하던 무속이 일본에 와서 신도(神道)로 변형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는 공통적으로 바위(岩)를 중히는 현상이 있다. 이 사실은 가야토기에서 비롯돼 지금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일본역사 초기의 수많은 사건들을 시사한다.

<일본서기>가 그렇듯, 거짓말이 기록된 역사도 있다. 그러나 예술사는 종종 그릇된 역사를 수정하기도 한다. 고고학 유물은 사실을 밝히는 보다 확실한 증거 자료이다. 여기에는 정치적 왜곡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이로써 가야토기와 스에키 토기 혹은 초기 야오이 토기를 보노라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영향이 가해졌음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다. 무릇 제반 영향이 대륙에서 불기 사작해 선진문화를 갈구하는 외로운 섬나라를 향해 흘러내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다.

가야를 지도에 되살려내자. 그것은 한국의 자랑이요 기쁨이다. 가야의 근원은 멀리 2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존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엮어 옮김,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학고재, 1999, 21~24쪽.

 

 

 

98. 생각한다는 것

 

처음에 저는 철학을 ‘잘 사는 기술’이라고 불렀어요. 잘 산다는 것은 행복하게 산다는 말이겠지요? 철학은 삶을 잘 가꾸는 기술, 즉 행복하게 사는 기술이지요. 그런데 행복한 삶을 위해서 철학이 제시한 기술은 무엇이었는지요? 네, 맞습니다. 바로 생각하는 것이었지요. 철학은 잘 살기 위해서 ‘생각을 하자’고 말합니다.

그럼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었는지요? 네, 그래요. 그것은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 없이 그저 관성대로, 습관대로 살지 않는 것이지요. 남들이 한다고 그냥 무턱대고 따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켰다고 무조건 복종하는 것도 아니고요. 물론 책이나 신문에 나왔다고 무조건 복종하는 것도 아니고요. 잠자면서 걸어 다니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은 습관이나 관습, 통념, 편견 등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새로운 생각을 낳을 때 우리는 그때 ‘생각한다’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새로운 삶을 낳을 때, 우리는 예전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 그때 우리는 무언가를 배운 것이고요. 그것이 공부입니다.

여러분, 공부는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공부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놀지 말고 만날 책만 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놀이도 공부가 될 수 있지요. 우리에게 다른 색각, 다른 삶을 만들어 준다면요.

“이만큼이나 공부했으니 이제 공부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걸을 때도, 이야기할 때도, 놀 때도 배울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 더 이상 공부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고집쟁이가 될 뿐입니다.

공부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자유란 공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지요. 편견이나 습관, 통념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자유를 느낍니다.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너머학교, 2012, 121~122쪽.(2012년 ‘한책하나구미 운동’ 지정 도서

 

 

 

 

 

 

 

 

 

 

99. 1천년이 넘는 단군 수명의 비밀

 

민족마다 전해 내려오는 신화나 구전되는 전승들이 인류가 지닌 가장 오래된 사료임은 세계의 여러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다. 신화와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가 고고학적 발굴로 그 진실성이 증명된 사례는 얼마든지 있으며, 트로이의 목마와 티티카카 호수의 티우아나코 유적, 잉카의 유적인 마추피추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아시리아의 도읍지 니느베 유적 등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신화와 역사의 관계에 대해 러시아의 학자 알렉산더 고르보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신화의 형식으로 전해진 이야기의 껍데기 속에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대의 경전에서 몇 년 몇 월에 입에서 불을 뿜는 용이 하늘에 나타났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선택 앞에 서게 된다.

①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어린 아이가 이 방식으로 이해한다.)

② 철저하게 허구라로 생각한다.(아주 손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과학적이라 할 수 없다.)

③ 신화와 종교로 덮인 베일 속에서 기록의 재료가 된 사실을 찾는다. 예를 들면 혜성이나 유성, 또는 그 외 사물의 출현을 찾아내려고 한다.(바로 이것이 진정한 학자와 연구자가 선택해야 하는 길이다.) -《잃어버린 고대문명》 중에서』

 

고르포프스키의 이러한 설명은 신화로 오인될 수 있는 내용은 고사하고 정확하게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조차 뚜렷한 검증이나 논증 없이 무조건 배격하고 있는 한국 사학자들에 귀감이 될 만한 이야기이다.

환단시대의 역사 중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단국조선)의 역사를 신화적으로 해석하게끔 만든 가정 큰 요인은 바로 단군의 수명이 1천년 이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수도 끝에 이른바 득도를 했다 할지라고 천 년 이상을 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을 비현실적이라 하여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결코 성실한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인정하자는 것도 아니며, 단지 조금만 우회해서 생각하면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후손들이 대대로 제위를 이어가면ㅅ허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의 존속 연수가 천 년이 넘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쉽게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이일봉 지음, 『실증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3~14쪽.

 

100. 단군신화 / 제왕운기(帝王韻紀) -이승휴

 

제왕운기는 상하 두 권의 역사책으로 상권은 중국, 하권은 우리 나라의 역대의 사실(史實)을 운어화(韻語化)화 歷代歌(역대가)인 바 특히 하권에 수록된 전조선기(前朝鮮紀) 곧 단군기(檀君紀)는 가장 귀중한 문헌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제왕운기는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때 곧 충렬왕 십 삼년(1287~AD)에 찬(撰)한 것이다. 특히 제왕운기에 실린 단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단군기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단군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로 되어 있다.

 

뉘 처음 나라를 열어 풍운조화를 열었는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

본기(本紀)에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어 웅(雄)이라 했다. 운운(云云)」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크게 인간을 이롭게 하겠는가?」

했다. 그러므로 웅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아 가지고 귀신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오니 이 분이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 운운, 손녀로 하여금 액을 마시어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박달나무의 신(神)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의 지역(地域)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시라(尸羅) ‧ 고례(高禮) ‧ 남북옥저(南北沃沮) ‧ 동북부여(東北夫餘) ‧ 예(穢) ‧ 맥(貊)이 모두 단군 후손이다. 다스린 지 일천 삼십 팔 년 만에,

나라 누리기 일천 이십 팔년

변화가 환인부터 전해짐을 어이하리?

그 뒤에 일백 육십 사 년 만에

어진 사람이 다시 군신(君臣)을 열었다.

혹은 < 이 뒤 일백 육십 사년에는 비록 부자(父子)는 있었으나 군신(君臣)은 없었다.>고 했다.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 되었다 하였으니 죽지 않은 때문이다.

제요(帝堯)와 함께 무진년에 일어나 우(虞) ‧ 하(夏)를 거쳐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왕 팔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구월산이다. 궁홀(弓忽)이라고도 이름하고 삼위(三危)라고고도 한다. 사당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단군신화의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제)는 제왕운기, (유)는 삼국유사의 약칭이다.

1. 단군:檀君(제) 壇君(유) 2. 단군천왕(檀君天王)(제), 환웅천왕(桓雄天王)(유), 3. 上帝(釋帝) 桓因(제), 釋帝 桓因(유) 4. 本紀(제), 古記(유) 5. 鬼三千(제), 徒三千(유) 6. 太白山(제), 太伯山(유) 7. 神檀樹(제), 神壇樹(유) 8.(1)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하여 사람의 몸이 되어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음.(제) (2) 곰이 신웅(神雄)께 빌어 여자의 몸이 되고, 환웅이 일시 화(化)하여 이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음.(유) 9. 理 一千 三十 八年 亨기 一千 二十 八(제) 御國 一千 五百年(유)

 

황순구 편저, 『해동운기』, 청록출판사, 1970, 340~345쪽.

<편집후기>

 

좋은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새 벗을 얻는 것 같고, 이미 정독한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 스미드는 말했습니다. 바쁜 속에서도 점심 시간에 틈틈이 독서를 생활화하기 위해 모인 사제동행독서동아리 회원님들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책읽기는 글쓰기를 통해 더욱 비옥해지고, 완결성을 지니게 된다고 합니다. 독후 글쓰기를 함으로써 독서 활동의 의의는 폭이 넓어지고 사고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독후감이란 독후에 남기는 모든 글입니다. 읽은 글을 발췌하여 정리하는 것도 넓은 의미의 독후감인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이나 한 작품을 읽은 후에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를 실천해봅시다. 그리고 실제의 감상의 글을 분량에 관계없이 써보는 습관을 기르도록 합시다. 그냥 기억의 강물 속으로 흘러가버리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교는 교육과학지식부 지정 ‘사교육절감형 창의경영학교’를 3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실무담당자인 정현희 부장님께서 독서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예산을 배정해주시고, 박병구 교감 선생님과 김대홍 교장 선생님께서도 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학기에 독서자료집 1집을 발간하였으며, 2학기에 2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금년에는 경상북도교육청으로부터 문집발간비 150만원 지원금을 받았습니다. 이중에서 50만원은 독서자료집(2집), 1백만원은 문집발간에 사용할 예정입니다.

이 독서자료집이 사제동행독서동아리 회원님들의 독서생활화에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바쁜 중에도 사제동행독서동아리에 열심히 활동 중인 1학년 임유진, 송혜지, 원혜진, 임채린, 백소현, 남수민, 박선영, 김슬기, 권미정, 박선미, 2학년 김지은 노규선 등의 회원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지도교사 김우연>

 

2012‧ 독서동아리 ‘여울’ 독서자료

발 행 일 / 2012년 10월 20일

발 행 인 / 김 대 홍

발 행 처 / 사곡고등학교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95번지

☎(054)713-2540 (교무실) (054) 713-2500(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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