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조

조선 9대 성종과 유호인의 이별 시조

가산바위 2014. 2. 2. 10:20

성종과 유호인의 이별 시조.hwp

조선 제9대 임금 성종(成宗, 1451∼1494)이 남긴 시조다.

 

이시렴 부디 갈따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無端)이 슬튼야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도래라 가는 뜻을 일러라

 

성종은 재위 25년, 문학적인 치적이 많았다. 우리의 어문․역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인「악학궤범「두시언해「동문선「둥국여지승람「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는 이 시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의 집은 남녘에 있었다. 그는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들어 벼슬길에서 물러나기를 빌었다. 성종은 듣지 않았다. 하루는 굳이 돌아가기를 빌자 성종은 술상부터 내오도록 하여 몸소 전별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있으렴. 부디 가겠는가. 아니가든 못하겠는가’하는 초장부터 신하에 대한 정이 뚝뚝 듣는다. 사랑하는 정은 중장과 종장으로 번지어 스민다. ‘아무 까닭없이 싫어졌느냐. 남의 말을 궂이 들었느냐. 그래도 자꾸만 가겠다니, 퍽이나 애닯구나. 꼭 가야만 하는 뜻을 속 시원히 말해다오.’ 이러한 정이 임금으로부터 신하에게 내려진 것이다. 신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임금의 지극하고도 아름다운 정을 읽을 수 있다. 성종의 총애를 받은 유호인은 이때 사헌부 장령(掌令)의 벼슬에 있었다. 충호와 시문․필력(筆力)이 뛰어나 당대 3절(三絶)로 불리기도 했다.

유호인의 고향인 선산(善山)1)으로 돌아가자, 성종은 뒤이어 이웃고을인 합천(陜川)의 군수로 임명하고, 또한 그 늙은 어머니에겐 쌀과 곡식을 내리기도 하였다. 유호인이 합천군수에서도 물러나 함양(咸陽)에 우거하던 때에는2) 저술한 바를 베껴 바치라는 성종의 명도 있었다.

유호인은 묘하게도 성종과 같은 해에 작고하였다. 사후에 그는 장수군(長水郡)의 창계서원(蒼溪書院)에 모셔졌다.3)

 

1)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유호인의 고향이 선산(善山)임을 확인할 수가 없다. 공의 휘는 호인(好仁)이고, 자는 극기(克己)이며, 본관은 고령(高齡) 사람이다. 선공(先公) 휘 음(蔭)은 호남(湖南) 장수현(長水縣)에 거주하면서 함양(咸陽)에 사는 장사량(長仕良) 이절(李節)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집안 사정으로 벼슬하지 않았다. (중략) 그 뒤에 합천군수를 얻어서 부임한 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관(官)에서 졸(卒)하니, 그때 나이가 50세였다.(정래혁 다음 블로그), 장수군 창계서원에 위패가 모셔진 것이나 함양 사람과 결혼 한 것 등으로 보아 선산(善山)이 고향이란 설은 믿기가 어려움.

2) 합천군수로 부임한 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졸한 것으로 되어있다. 함양에 거주할 때는 처가가 있는 거곳이니 벼슬하지 전에 우거하던 곳으로 보임. 최승법님의 자료가 확실하지 않은 것 같음.

3) 최승범,「어진 임금과 신하가 주고 받은 정」,『계간 현대시조』, 2013년 겨울호(통권 118호),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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