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집(시집) 읽기

5. 민병찬-산 좋고 물빛 고와서(2002)

가산바위 2021. 5. 4. 21:45

민병찬 시조집, 산 좋고 물빛 고와서, 알토란, 2002.

 

 

밤사이 눈이 내렸네

내려서 덮이었네

 

내 마음 열린 뜰에도

포슬포슬 부푸는 눈꽃

 

조금씩 하얗게하얗게

내 영혼이 눈을 뜨네.

 

버리고 싶은 것들

모두 다 덮어 버리고

 

오늘은 이 지상 첫날에

그려지는 하얀 지도

 

한 그루 비자나무처럼

푸르고 곧게 서고 싶네.

-밤사이 눈이전문

 

 

 

고양이로 다가와서

하마(河馬)처럼 가더니만

 

고라니 눈망울 속

놀빛으로

타오르다

 

이윽고

하얀 여우 하나

벼랑 끝에 섰구나.

-둔갑술

-계절전문

 

 

무심코 떼 놓은 발이

새움 하날 뭉갰고나

긴 겨울 다 견디고

뽀시시 내미는 촉을

아서라 봄땅 밟을 적엔

골라 골라 딛소서.

 

풀씨 하나 묻히는 데야

점 하나면 족하지만

우주가 뒤척여야

촉 하나가 트는 것을

죄로다 그 가녀린 생명

꺾어버린 이 업보.

-무심코 떼 놓은 발이전문

 

 

 

백목련(白木蓮) 여린 그늘에

오월이 앉아 쉰다

 

잎새 더 어우러지면

유월도

칠월도

와 앉으리

 

내 이순(耳順) 나무 아래는

뉘 찾아와

서늘해 하랴

-그늘전문

 

 

산새들 떠난 뒤에

나무

쓸쓸히 흔들리고

 

아이들 다 떠나간

그림자만 길게 누워

 

명치끝

아슬한 난간에

폭포

길게 걸린다

-적막 · 2전문

 

 

 

내 가슴은 구워서 만든 조그만한 질그릇

한 때는 바다조차 다 담고도 남았지만

이제는 말씀 한 마디로 차 넘치곤 한답니다.

 

가슴이 비좁은 줄 알아버린 지금에사

한 켠에 조금씩은 빈자리를 남겨두고

은은한 달빛도 한 줄기 와 머물게 한답니다.

-내 가슴은전문

 

 

<둘째 딸의 영()편지 중에서>

아버지의 딸이기에 저도 소설 습작을 하고 시를 암송하던 문학소녀 시절이 있었지만,(중략) 사업가로서의 아버지, 불자(佛者)로서의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아버지...

 

 

작품해설

리강룡(시조시인), 생활의 시, 시의 생활

 

릴게는 시는 체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릴케의 이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우리는 상상력 역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가 감동을 불러일으키자면, 감동을 주는 시를 쓰자면 시인의 체험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더 절실한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이 시집을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한다면 시인의 거짓없는 생각과 생활과 인격이 일치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각시봉 허리춤에/ 띠를 두른 새벽안개

찼다가 기운 달이/ 산머리에 아직 남아

빈 들녘 남새밭 사이로/ 마을 하나 걸어오고.

 

희부연 안개처럼/ 아련하게 잊혀지자

가을 거둔 들판처럼/ 듬성하게 비워지자

귀엣말 나지막하게 / 앞 강물이 말을 건다.

-백자리의 새벽전문

 

프롤로그에서 언급하였듯이 시인은 지금 속세의 일터를 떠나 경기도 여주 땅의 한적한 시골 백자리(柏子里)에 자리를 잡아 은둔하고 있다. 지난해 몇몇 지인들과 함께 그의 보금자리를 찾은 적이 있다. 멀리 않은 곳에 남한강이 흐르고 시인의 서재에서 바라보던 지금 머리 속에 아련하기는 하지만 위의 작품에 각시봉이라 이름 지은 봉우리가 예쁘게, 참 예쁘게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대칭을 이룬 산과 산 사이에 새악시의 젖무덤처럼 동실하게 떠 있다. 그때 우리는 저 봉우리 하나 둘러두고 매일 보는 것만 해도 이 집이 백만금에 버금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부러워했던 일을 기억한다.

 

배당 받은 이 하루 / 복에 겨운 휴식의 날은

꿀배 먹듯 조금씩 / 조금씩만 베어 물어도

가을날 은행잎이 지듯 / 안타까이 저무누나

 

흐르는 여울에서 / 사금(砂金)을 건져내듯

눈부신 말씀일랑 / 꼭히 아니어도 이 저녁

간절한 엽서나 한 장 / 쓰여지게 합소서

-일요일 2전문

 

생각해 보라. 자신에게 허여된 삶의 한 모롱이를 이토록 안타깝고 소중하게 가꾸는 이가 우리 주위에 몇이나 되는가를. 더욱이 그 안타까움을 이토록 여실하게 표현한 작품이 얼마나 되는가를. 우리는 하루하루를 신()으로부터 배당 받아 살면서도 그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찡그리고 헐뜯고 괴로워하고 눈 부라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이 짧은 시 한 수를 읽으면서 시인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 자기의 현실에 대한 수락(受諾), 나아가 주어진 현실에서 사금을 건져 올리듯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자세 앞에 고개 숙이게 되는 것이다. 이 시집의 곳곳에서 적절한 비유들이 반짝이며 빛을 발하고 있지마는 이 짧은 작품 안에서 꿀배 먹듯하루를 달디 달게 아끼는 모습, ‘가을날 은행잎이 지듯그렇게 안타까이 저무는 하루, ‘흐르는 여울에서 사금을 건져내듯그런 엽서 한 장 등, 짧은 시편 한 수 안에서도 도사리고 있는 기막힌 비유들이 독자로 하여금 무릎을 치며 공감의 버스에 함께 오르게 하고 있다.

 

각설하고, 먼저 외딴섬이다. 이 시를 읽으면 역설로서의 언어- The Wellwrought Urn-라는 논문에서 역설은 시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타당성을 지닌 것이다. 역설적 언어를 추방해버린 언어를 요구하는 사람은 과학자인데 시인이 말하는 진리는 실히 역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지적한 브룩수(Cleanth Brooks)’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황홀한 이 건망증’(외딴섬중장 후구)

 

 

 

 

<민병찬> 경북 문경 출생. 시조집으로 사모곡(1978), 가을비 그 뒤(1996), 산 좋고 물빛 고와서(2002)

연락처 : 경기 여주군 산북면 백자리 42(031-881-1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