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벌 신작시집, 『휘파람새나무에휘파람으로부는바람』, 신원문화사, 1991.
-머리말
<먼저 놓아보는 말>
땔감은 아궁이로 들어가 불로 변한다. 불기운은 방고래를 지나 굴뚝으로 빠지게 되어 있다.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 시대나 사회의 변화·변동·변혁 또한 아무리 다변·급변의 성향이라 해도 그런 작용이리라.
나의 경우, 시도 그같은 내면 작용이었으며, 한 시대와 사회를 번갈면서 감당·대처해 낸 해당 경로의 과정, 그 집합들이었다. 부분집합, 교집합, 합집합들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다.
여기에 실린 시편은 모두 사설시조의 방편에 의거되어 있다.(중략) 휴전선 아래쪽을 디딘 시인들 중에 쓸수록 모를 것이 시라고하는 분들이 많아져 가고 있다. 나도 어느새 그런 편에 속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용을 써볼 일 아닐는지…….
1991년 5월에
서벌
못 이룬 꿈들, 알 수 없는 애틋한 꿈들, 땅속 꿈들이 얼기설기 뿌리 얽어 터널 내고는 직진하는 열차들을 대량 생산하여 바깥으로 내보낸 것이었구나.
저들 열차들은 하늘 가는 열차들, 가지들을 바퀴로 달고, 그리움의 바퀴로 달고 새파랗게 달리는 죽림선(竹林線) 열차들. 중간역 없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들. 달리고 달리는 동안 사계(四季)는 잎으로 모여들어 다도해(多島海) 이루고는 끌리고 있구나. 햇살들은 물론이고, 달빛 별빛들도 내리는 쪽쪽 몸들을 씻고, 바람은 오는 대로 수영선수 되는구나. 검은 배낭 지고 가던 구름이 빗줄기 좌악 쏟으며 묻는다. 이룰 꿈이 무어냐고 달리는 열차들에게 묻는다. 열차들은 그저 달리고, 열차들에게 끌리는 다도해 새파란 목소리로 귀띔해 준다. 깜깜한 땅속에도 하늘 수입해 들여 해 뜨게 하고, 달 뜨게 하고, 별밭 깔리게 하고, 바람 불게 하고, 비 내리게 하여 일곱 빛깔 무지개도 걸어보는 게 꿈이라고. 그 하늘 실어오려고 열차들 간다고.
그렇군, 달리는 열차 모두 그 때문에 하나같이 속 빈 찻간(車間)들이구나.
-서벌, 「대숲 환상곡」 전문
밤마다, 가슴안에다
등불 들여 겁니다.
말씀은 별빛으로 닿고, 짝사랑보다 간절한 홍시빛 바람 소리는 기다리자 기다려 보자 합니다. 눈은 어떻게 내리 쌓였겠습니까. 또 어떻게 녹아갔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에겐 일용할 양식과 드나들 자기 집을, 분단 수십 년의 땅엔 금 지울 지우개를, 야비다리 치는 졸부(猝富)와 정상배(政商輩)에겐 아무래도 깨달음을, 그리고 변동 심한 세계를 끝까지 대처해 보려는 사람들에겐 긍지와 자부심을 더욱 갖추어 지니라고 눈은 쌓였겠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쌓였겠습니다.
쌓였다가, 혀 끌끌 차고는 녹아갔겠습니다.
그래도 등불은 걸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게 짝사랑으로 끝날지라도.
-서벌, 「설야심서(雪夜心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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