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평론을 찾아서(학자, 시인)

시조,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 민병도

가산바위 2013. 11. 30. 16:19

 

시조, 이제부터가 시작이다(민병도)

 

 

시조가 민족시의 본류(本流)이자 오랜 기간 동안 민의(民意)의 검증을 거쳐오면서 민족의 운명과 애환을 함께 해온 역사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적 위상은 보기에 따라서는 다분히 불편, 부당한 자리 매김을 받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당위로나 필연으로 말하자면 의당히 현대 한국문학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차별적 잣대 위에 놓여 그 위의(威儀)를 훼손당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시조를 민족시의 중심으로부터 방기(放棄)를 조장하였을까. 물론 여러 가지로 원인이 분석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력이 다하였다거나 민의(民意)로부터의 타당한 외면이 아니라 불온한 외세의 편파성이나 왜곡에 의한 결과라는 점이다. 바로 시조야말로 일제침략자들에 의한 민족문화의 말살정책의 가장 큰 희생물이 아닐 수 없다.

한때 해방이 가까워지면서 민족정신의 자각과 함께 시조 또한 중흥을 꾀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해방이 되면서 이번에는 무차별적인 서구 지향적 풍조가 다시 한번 시조를 내몰았다. 일부 서구미학에 경도된 평론가나 시인의 입에서 “시조는 죽었다”라는 주장이 스스럼없이 내뱉어졌다.

무릇 세상의 모든 물상에는 그 생명력이 있다. 고유의 생명력이 소진되면 자연스럽게 소멸의 길을 걷게되는 것이 정리(定理)이다. 문제는 아직 살아 있는 생명을 억지로 매장시키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1970년 50명에 미치지 못하였던 시조작가협회 회원이 지금은 1200명에 이르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들은 왜, 무슨 까닭으로 버젓이 살아 있는 생명을 매장시키려고 하였을까.

물론 시조의 위상이 오늘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모든 책임이 외부로부터 비롯된다는 뜻은 아니다. 시조를 쓰는 시인들 안으로부터의 문제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민족문학이라는 당위성이나 필연성에 도취되어 새로운 민의(民意)와 새로운 시대정서를 소홀히 해온 책임이 적지 않다. ‘시조가 시조다워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고착이나 정형의 정신성을 획득하지 못한 낱말 맞추기에 자위하거나 안주한 시간 또한 없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급변해 가는 시대정신을 올곧게 진단하지 못하고 방관한다거나 새로운 형식실험을 위하여 피는 고사하고 땀조차 크게 흘려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언제나 독자들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였고 자신들끼리의 영역 지키기에 급급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투철한 시정신이 부족하다는 이야기, 소위 프로문학에로의 준비가 소홀하다는 이야기도 피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조를 쓰는 시인들은 민족을 선택하였고 국제화에 대비한 자존심을 선택하였다. 숫자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뒤늦게나마 그들의 선택을 지지하는 식자층이 늘어가고 있고 지금부터가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시조가 차지하였던 예의 그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의 판단은 현명하였고 그들의 선택은 옳았음이 드러날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처방이다. 지난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딛고 민족시의 본류(本流)로서의 새로운 자리 매김을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하여야 할 과제가 있다.

 

그 첫째는 무엇보다도 깨어 있는 시정신의 복원이다. 과거 조선조에 지녔던 아마추어 정신으로 이 시대를 이끌어나갈 시조를 창작하겠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선택은 독자가 하는 것이다. 이제는 시조를 쓰는 시인들끼리 주고받는 메시지로 문학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땀을 흘려서 안 되면 피를 흘려가면서라도 시대가 공감하는 시조를 써야할 것이다.

두 번째는 독자와 함께 하는 시조의 자리 매김이다. 문학이 경제논리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요와 공급이 조화를 잃으면 그 질서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수요에 비해 지나친 공급은 결국 도산을 막을 수 없다. 수요를 함께 창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시조가 근간(根幹)이 되는 우리 문학사의 올바른 정립이다. 여기에는 바른 비평의 눈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객관적인 잣대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조가 시조만의 영역 안에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외국어에로의 번역도 필요할 것이요, 정형시를 쓰는 문학간의 교류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문단 권력화 내지 줄 세우기 등 여러 가지 개선점을 열거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시정신의 결여나 옳은 독자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시조는 정녕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출전> 민병도,『닦을수록 눈부신 3장의 미학』, 목원예원, 2010, 295~2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