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평론을 찾아서(학자, 시인)

오늘의 시조를 진단한다-단시조 형식의 시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장경렬(서울대 영문과 교수)

가산바위 2013. 11. 30. 23:27

<시조21> 2013년 봄호(통권 24호)에서

오늘의 시조를 진단한다

-단시조 형식의 시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 장경렬(서울대 영문과 교수)

1.

어찌 보면, 연시조 형식이 선호되고 있는 현상 자체가 시대적 요청에 이한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라는 이 시대의 삶과 감수성은 단시조 형식이라는 간명한 그릇 안에 담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미묘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옛 시조 현대 시조로 변모하는 가운데 형식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가람 이병기 이후 현대의 시조 시인들이 찾은 현대적 시조 형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시조’-윤선도의「어부사시사」나 퇴계의「도산십이곡」과 같이 소재나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 여러 편의 독자적인 단시조를 차례로 나열해 놓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연시조가 아니라, 단시조 단위의 시적 진술을 차례로 또는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한 편의 작품을 이루도록 배려한 형태의 연시조-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어찌 보면, 연시조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시조 시단은 이러한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임을 증명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조는 정형시의 일종이고, 정형시란 정해진 공간과 시인 사이의 긴장 관계를 전제로 하는 시 형식이다. 즉, 시인의 시심을 구속하려는 형식과 이러한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시심 사이의 힘겨루기를 통해 양자 사이에 아슬아슬한 긴장과 균형을 이룰 것을 요구하는 것이 정형시로서의 시조다. 말하자면, 시조란 본래 형식의 제약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저항하는 시인이, 또한 형식의 제약에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받아들이는 시인이 마침내 이룩해 낸 갈등과 긴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3장 6구 4음보’라는 제약 안에서 승부를 걸 것을 요구하는 단시조 형식의 구속에서 벗어나 임의로 길이로 늘이는 연시조 형식-또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언어의 절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설시조 형식- 시조의 새로움 또는 현대화를 도모하기 위한 탈출구 가운데 하나일 수 있지만, 갈등과 긴장의 강도를 낮추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일종의 ‘일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요즈음 발표되는 연시조 형식의 작품들 가운데 시적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이 같은 ‘일탈’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자의적인 판단일 수 있으나 많은 사람들의 감성에 오늘날의 시조가 옛날의 시조에 비해 어딘가 긴장이 풀어져 있고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 정적(靜的)인 것으로 느껴진다면, 이 또한 부분적으로 이 같은 ‘일탈’이 시조 시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시대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시조의 시조다움은 단시조 형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논리는 결코 지나친 것일 수 없다. 어찌 보면, 단시조 형식은 시조의 ‘원형적 형태’(ur-form)라 할 수 있으며,이로 인해 단시조 형식이 요구하는 ‘3장 6구 4음보’라는 형식의 제약 안에서 시조의 궁극적인 정체성을 찾을 수도 있다.

2.

따지고 보면, 이 같은 형식의 제약이 시인에게 언어와의 싸움을 요구하고, 언어와의 싸움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시인이 형상화하는 시적 이미지는 그만큼 더 간명할 것이 될 것이다. 아울러, 시적 이미지가 간명한 것이 됨에 따라 시에 담기는 의미는 고도록 함축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 싹트는 것이 바로 시조 고유의 시적 긴장감이다. 시조의 본질과 정체성은 바로 이 같은 시적 긴장감에서 찾아야 하고, 이로 인해 여전히 포기될 수 없는 것이 단시조 형식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시조 시인들은 여전히 시조 창작과정에서 단시조 형식이 주는 답답함을 호소할 수도 있다. 아니, 시조의 현대화를 단시조 형식의 구속에서 벗어나 연시조 형식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시조의 전 과정에 필연적인 귀결임을 주장할 수도 있다. 이렇듯 앞서 언급한 논리-즉, 현대인의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체험과 다원적인 감수성을 담기에 단시조 형식이 제공하는 시적 공간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논리-가 좀처럼 약화될 것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시조 시단이다. (중략)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조라는 정형시를 수용하면서도 단시조의 공간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투의 논리를 펴는 시조 시인이 있다면, 또는 자신의 시심은 결코 단시조 형식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조 시인이 있다면, 그는 그만큼 시조 창작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 그 자체를 놓고 철저하게 고뇌하지 않는 시인일 수도 있다.

거듭 말하지만, 시조란 본래 형식의 제약을 견디어 낼 것을 요구하는 시 양식이다. 따라서 시인은 시적 공간의 협소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시상(詩想)이 형식의 제약에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이를 압축하려는 노력을 무엇보다도 앞세워야 한다. 따지고 보면, 시상의 압축은 단순히 시조 시인뿐만 아니라 시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과제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시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과제이자 시 창작 작업의 본질일 수 있다.

3.

이처럼 시조와 하이쿠는 형식의 제약을 견뎌 내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가운데 완성되는 정형시라는 공통점 때문에, 시조와 하이쿠를 동일한 지평에서 보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오늘날 일본의 정형시인 하이쿠가 그것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만만치 않은 데 왜 우리의 정형시인 시조가 우리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이처럼 변변히 못한가와 같은 질문도 근본적으로는 시조와 하이쿠를 동일한 지평에서 바라보려는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즉, 즉지 않은 경우 간명한 이미지를 중첩 또는 병치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하이쿠-또한 하이쿠 방식으로 쓴 파운드의 시-와는 달리, 시조는 간명한 이미지를 구축하되 적지 않은 경우 ‘기승전결’이라는 시상 전개 방법을 통해 이를 제시한다. 요컨대, 시조와 하이쿠는 추구하는 바가 엄연히 다른 시 양식이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지만, 하이쿠는 인간의 삶 너머로 언뜻 일별되는 세계에 대한 초월적 이해의 순간을 추구하는 시 양식이라면, 시조는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내재율적 이해의 순간을 추구하는 시 양식이다. 인간의 삶 너머의 세계는 말 그대로 시간의 구속을 받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이고, 따라서 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직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직관적인 세계 이해를 표현하는 방식이 하이쿠다. 반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세계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세계이고,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한 이해는 시작과 진행 과정과 끝을 아우르는 경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시조는 ‘적지 않은 경우’ 기승전결의 구조로 세계 이해를 표현한다.

물론 양자는 극도로 간명한 형식적 구조의 시 양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시 말해, 초월 세계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지향하든, 인간 세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지향하든, 양자는 모두 형식의 제약 및 절제된 언어 안에서 세계 이해에 대한 표현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하이쿠의 경우 그와 같은 형식상의 요구에 대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충실한 반면 시조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컨대, 직관적인 세계 이해를 지향하는 하이쿠는 시간 또는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경험적인 세계 이해를 지향하는 시조는 시간 또는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오늘날 확인되는 시조의 이른바 ‘연시조화’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삶과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에 대응하여, 또한 시조의 현대화라는 시대의 요구에 대응하여, 시조 형식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의 ‘연시조화’는 형식의 구속에서 시조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시조 본래의 모형-즉, 단시오 형식-과 거리를 갖게 된고, 이에 따라 오늘날 특유의 ‘연시조화’로 인해 시조 고유의 형식 논리는 위협을 받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단시조 형식에 대한 적극적인 성찰과 관심이 요구되는 것이다.

어쩌면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하이쿠만큼이나 시조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이 같은 변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시조가 자체의 선명한 형식 논리를 잃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유시오의 경계를 스스로 모호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바로 시조의 원형인 단시조 형식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일 것이다. 이에 관해 좀더 논의하자면, 우리는 먼저 시간적인 경험의 세계를 뛰어넘는 직관적인 세계 이해를 드러내는 시 양식이기 때문에 언어의 경제화가 필연적인 귀결인 하이쿠와는 달리 시조는 경험적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하이쿠처럼 언어의 경제화를 통해 이를 표현하려 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경험적 세계 이해를 지향하면서도 시조만큼 언어의 경제화를 동시에 지향한 시 양식은 정녕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바로 이 점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 다양한 시조 형식 가운데 특히 단시조 형식의 시조다. 지극히 단출한 언어로 이루어진 ‘3장 6구 4음보’의 형식 안에 인간사-그러니까 시간의 흐름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인간사-의 한 모습을 제시하되, 시작, 전개, 반전, 끝을 아우르는 극적(劇的)인 구조 안에 제시한다는 시조의 기본 원리를 등한시하거나 포기하는 경우, 시조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결코 새롭게 진작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기야 하이쿠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연시조와 같은 형태의 예를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하이쿠[俳句]는 여러 시인이 함께 모여 일종의 시회(詩會)를 통해 시 창작을 하는 렌카[連歌]에서 나온 것으로, 렌카는 최소한 두 시인이 최소한 두 개의 시구-5 ․ 7 ․ 7 음절의 시구와 7 ․ 7음절의 시구-를 서로 주고받는 형태의 아주 오랜 시 형식이다. 이 렌카를 시작하는 첫 시구인 호쿠[發句]가 독자성을 확보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하이쿠로 발전한 것이다. 물론 렌카 자체의 변모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렌카는 상당 시간 동안 전성기를 누린 끝에 진부한 것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렌카 고유의 엄격성에서 벗어난 소재와 내용의 면에서 세속화를 꾀한 렌쿠[連句] 또는 ‘하이카이-노 렌카[俳句の連歌]가 출연하게 되었다. 아무튼, 렌카든, 렌쿠든, 이는 기본적으로 일종의 공동 창작 작업의 산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하이쿠와는 엄밀하게 구분되는 시 형식이다. 요컨대, 렌카든, 렌쿠든, 이는 결코 ‘렌(連)하이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이 양식이 아니며, 이 때문에 하이쿠와 렌카 또는 하이쿠와 렌쿠 사이의 관계는 우리의 단시조와 연시조 사이의 관계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하이쿠는 렌카에서 나온 것이지 그 역(逆)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조의 경우 시조의 현대화 과정에 과거에 과거의 단시조와 연시조에 바탕을 둔 오늘날 특유의 ‘연시조 형식’의 시조가 출현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이렇듯 시조는 하이쿠와는 다른 역사를 갖는 시 양식이고,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특유의 연시조 형식의 시조는 앞서 언급했듯 일종의 역사적인 변모와 발전의 산물 가운데 하나로 이해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록 단시조 형식의 시조에 새삼스럽게 주위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연시조 자체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데 필자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의 연시조를 역사적 변모와 발전이 일환으로 받아들이되, 이러한 연시조의 모체(母體)이자 시조의 원형인 단시조에 대한 관심과 성찰의 눈길을 결코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나, 시조 시인들이 연시조 형식-경우에 따라서는 사설시조 형식-에 창작의 무게 중심을 더욱 강하게 드리우다 보니, 시조 형식의 이완이 어느 때보다 심각해진 것이 오늘날의 시조 시단이 아닌가 싶다. 바로 이때 시조 시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 때문에 시조를 창작하는가, 시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시조가 시조답기 위해 시조 시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등의 근본적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리라. 또한 이런 물음을 던지는 가운데, 시조 시인들은 시조의 원형에 해당하는 단시조 형식에 대한 성찰을 이어가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단시조 형식의 시조에 대한 창작 실험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연시조 형식의 시조를 버리지 않되 단시조 형식의 시조에 응분의 관심과 애정을 쏟을 때, 시조의 영광된 과거를 오늘날에 되살릴 수 있으리라고 필자는 믿는다. 요컨대, 시조의 변모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왔고 앞으로 이루어지든 단시조 형식이라는 시조의 원형에 대한 관심과 성찰을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필자는 단순히 단시조 형식의 시조가 시조의 원형이라는 이유로 이 형식의 시조 창작만을 시조 시인이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상의 논리를 편 것이 아니다. 시조 창작과 관련된 실험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현실에 부응하여 연시조 형태로든 또는 그밖에 다른 어떤 형태로든 다양한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어떤 형태로 또는 어떤 방향으로 시조의 현대화를 위한 실험이 이루어지더라도 시조는 원래 단시조 형식으로 출발했음을 잊지 말자는 것, 그리고 단시조 형식의 시조 창작 작업을 등한시하지 말자는 것, 그것이 바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한 마디 덧붙일 것이 허락된다면 시조 창작과 관련된 많은 실험은 단시조 형식이라는 ‘협소해 보이는’ 틀 안에서도 얼마든지 새롭고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비록 단시조 형식 안에서의 실험 자체를 답답하기도 하고 실익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단시조 형식 안에서도 얼마든지 시조의 변모와 발전과 현대화를 위한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리고 그런 실례를 시조가 처음 틀을 잡은 과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풍성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기도 한다.

 

 

 

<출처> 장경렬, ‘오늘의 시조를 진단한다’, 발행인 민병도,『시조21』, 목언예원, 2013년 봄호(통권 24호), 106~115쪽에서 발췌함.

장경렬: 인천 출생으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미국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학교 영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집으로『미로에서 길 찾기』(1997),『신비의 거울을 찾아서』(2004),『응시와 성찰』(2007), 문학연구서로『코울리지』(2006),『매혹의 저항』(2007). 번역서로는『셰익스피어』(Anthony Holden, 2005),『아픔의 기록』(John Berger,2008),『노인과 바다』(Ernest Hemingway,2012),『젊은 예술가의 초장』(James Joyce,20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