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평론을 찾아서(학자, 시인)

단장시조를 다시 생각함(현대시학 2011년 1월호 수록) / 이종문

가산바위 2013. 11. 30. 19:01

<현대시학 2011년 1월호 수록>

 

                                            단장시조를 다시 생각함

 

 

                                                                                   이종문

 

<1>

 

 

다 알다시피 시조의 기본형은 3장 6구로 이루어져 있는 평시조다. 애초에 우리 조상들은 평시조만으로도 자신들의 사상과 감정을 별다른 무리 없이 표현해왔다. 그러나 평시조가 언제나 대상 세계를 담는 최상의 그릇이라 할 수도 없고, 평시조 하나로 대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들을 죄다 담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급속도로 변화해가는 세계를 보다 적절하게 담아내기 위하여, 점진적으로 시조 형식에 변개를 가함으로써 시조의 영역을 확장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조의 영역을 확장하는 작업은 주로 기본형인 평시조보다 물리적인 분량 자체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연시조, 엇시조, 사설시조가 죄다 그렇고, 하나의 작품 속에 평시조, 연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 각종 시조 형식을 혼합하여 구사하는 이른바 옴니버스 시조의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요컨대 이 나라의 시인들은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상황의 변화를 기본형인 평시조 형식의 다채로운 확장을 통해 담아냄으로써 시조의 영역을 확대하는 데 커다란 개가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시조의 영역 확대가 반드시 시조 형식의 물리적 확장을 전제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3장 6구의 기본형을 축소함으로써 시조의 영역을 오히려 더욱더 확대하는 길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산발적이긴 하지만 오래 전에 이미 그와 같은 시도를 한 시인들도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시조 3장 가운데 초장이나 중장을 줄인 兩章時調(二章時調)를 제창했던 이은상과 종장으로만 이루어진 單章時調(節章時調)를 제창했던 이명길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조라는 그릇이 너무 작아서 담을 것을 제대로 담을 수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의문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해서는 이미 이은상이 [二章時調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시조 창작에 있어서 어느 때는 삼장의 형식도 깊은 내용을 담기에는 오히려 모자라지마는, 다시 어느 때는 삼장도 도리어 긴 때가 있다. 옛 사람들은 이른바 평시조의 삼장 형식보다 좀 더 여유 있는 엇시조니 사설시조니 하는 긴 형식을 마련하기도 했었다. 아니 시조 형식의 유래를 만일 고려가사에서 발전해진 것으로 본다면 긴 형식의 것이 차츰 줄어들다가 지금 우리가 말하는 보통시조의 3장 형식에까지 와서 그쳐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러면서도 3장 형식보다 좀 더 짧은 형식을 구상해 보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이어 온 형식에만 만족할 수는 없다. 객관성을 부여할 수 있기만 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형식을 생각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이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전통의 개척 발전을 위해서 보다 더 요청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내켜서 문화를 개척하고 창조하려는 의욕에서는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경우에 따라서는 3장도 너무 길어서 거추장스럽거나, 너무 길기 때문에 오히려 담으려고 하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을 수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극도로 짧은 시 가운데는 짧지 않고서는 대상 세계를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는 참으로 절실한 당위성 때문에 짧아지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시도 있다. 이미지즘 시의 전설적 명작이 되어 있는 에즈라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 라는 작품도 서른 줄로 써도 불가능하고, 열다섯 줄로 줄여서 써도 불가능하여, 결국 다음과 같이 단 두 줄로 고쳐서 완성하지 않았던가.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군중(群衆)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정규웅 옮김

 

 

이렇게 볼 때, 시조 3장이 너무 짧을 수도 있지만, 시조 3장이 너무 길수도 있다는 이은상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이것은 실상 시조를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필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양장이나 종장 하나만으로도 할 말을 대충 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3장을 맞추기 위하여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음으로서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경우가 여러 번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다 알다시피 시조 3장의 형식은 그 자체가 금과옥조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예술적 성취도를 극대화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에 불과한 것. 따라서 3장이 만약 너무 길어서 예술적 성취에 장애가 되는 경우라면 당연히 3장을 포기하고 그 상황에 걸 맞는 더 짧은 형식을 찾아보는 것이 마땅할 터다. 그런데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더 짧은 형식이 바로 양장시조와 단장시조이고, 따라서 이들의 출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시조사적 필연이 아닐까 싶다.

 

 

<2>

 

 

그러한 가운데 대구의 몇몇 시인들이 산발적이나마 단장시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

 

                     이정환, [서시] 전문

 

 

이정환이 자신의 시집의 첫머리에 [서시]로 쓴 작품인데, 보다시피 종장 1장으로 이루어진 단장시조다. 이 시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꽃이 붉은 이유는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말은 현상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말로써 현상 세계를 죄다 표현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말은 사물의 총체적인 면모를 표현하는 수단이면서도 사물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존재의 감옥’이기도 하다. 예컨대 ‘꽃’은 붉고 향기로운 것이지만 ‘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붉은 향기는 돌연 아득히 휘발되고 마는 것이다.

禪的 취향이 물씬 풍기는 이 시에는 아마도 언어와 존재에 대한 이와 같은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성찰 자체가 대단한 것은 아니다. 정말 대단한 것은 그러한 성찰과 관련된 기가 막힌 비유가 반어적 구문에 절묘하게 실려 있어서 ‘성찰’을 넘어서는 오묘한 神韻을 풍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작품이 한 시집의 [서시]라는 것을 고려하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언어에 매달리지 않고 지으려고 애쓴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독자들에게 수록된 시들의 언어에서 뜻을 구하지 말고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 그 도저한 공간에 깔려 있는 침묵의 의미까지를 같이 읽어달라고 주문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요컨대 이 시는 언어로 말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언어와 언어 사이에 도저하게 깔려 있는 침묵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얕다고

얕보지 마라

     내

  뿌리는

  바다다

 

  문무학, [내] 전문

 

 

문무학은 짧은 말에다 가급적 많은 내용을 담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장르인 시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추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시인이다. 시가 반드시 짧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시 가운데 짧은 것도 많고, 이 도저한 휴대폰 시대에 자판 속에 온전히 들어가는 극히 짧은 시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가 자주 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그는 거의 10 년 전부터 단장시조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고, 최근에 와서 발표의 빈도를 크게 높이고 있다.

작년에 간행된 [낱말]이란 시집에서 볼 수 있듯이 문무학은 말을 가지고 노는 말놀이를 유난히도 좋아하는 시인이다. 인용한 작품에서도 그런 그의 말놀이 솜씨가 약여하다. 우선 기사 방식에서 유별난 형태를 추구한 것도 그런 유희정신과 무관하지 않거니와, ‘얕다고 얕보지 마라’는 대목에서 ‘얕’자를 두 번 겹쳐놓은 것도 그렇다. ‘내 뿌리’의 ‘내’ 한 글자를 1행으로 독립시키고 이 낱말에다 이 시의 소재인 시내와 작중화자인 나, 곧 시내를 묘하게 겹쳐놓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물론 이런 말놀이가 자칫 잘못하면 말장난에 떨어질 위험이 있지만, 원래 시라는 것이 말장난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 시의 밑바탕에는 강물의 뿌리가 바다라는 거대한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어서, 이 시를 말장난의 세계에서 건져주고 있기도 하다.

해, 달, 별, 빛, 낮, 밤, 물, 불, 밥, 돈, 몸, 팔, 코, 입, 귀, 손.... 문무학은 특히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발견(?)을 바탕으로 하여 한 글자로 이루어진 사물들에 대한 인식의 갱신을 단장시조 속에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있으며, 이미 발표한 작품 이외에도 완성해둔 작품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오직 한 글자를 제목으로 하여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를 쓰는 이와 같은 기획적 실험은 일견 모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실험은 성공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우리가 미리부터 너무 많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돌해태

콧등에 지는,

 

 

산복사꽃

몇 잎

 

박기섭, [적멸궁] 전문

 

 

보다시피 이 시도 역시 종장 1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단장시조다. 길이도 짧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도 돌해태 콧등에 산복사꽃 몇 잎이 떨어지는 한적한 풍경이 그 전부다. 그러나 이 짤막한 시의 도처에 그 한적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숨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구현하고 싶은 주제를 창출하기 위한 창조적 행갈이다. 보다시피 시인은 종장의 첫 구인 1-2음보를 음보별로 잘게 행갈이를 하여 하나의 연으로 배치하고, 둘째 구인 3-4음보를 다시 음보별로 행갈이 하여 1연으로 배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호흡에 1행을 읽는 것이 관습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처럼 행갈이가 빈번하다보면 천천히, 그것도 아주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간에 쉼표가 하나 찍혀 있어 숨을 한 번 더 가다듬으면서 읽어야 하고, 극히 짧은 작품의 한복판에서 연을 갈고 있어서 또 다시 뜸을 들여야 한다. 맨 마지막 행을 음수율에 맞춰 3음절로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터임에도 불구하고 2음절로, 그것도 재빨리 흘러가지 않도록 가운데 뛰어 쓰기가 있고 닫힌 소리를 내는 받침을 가진 2음절로 종료하여 한 번 더 숨을 죽인 것이나, 종료 후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치밀하게 계획된 문학적 장치다. 그만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의 공간이 넓어지면서 여운이 확대될 수밖에 없으며, 그 여운 속으로 떨어지는 산복사꽃도 그저 몇 잎에 불과하고, 그것도 하필이면 적막한 돌해태의 숨도 쉬지 않는 콧등 위에 시나브로 떨어진다. 게다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궁을 제목으로 가져옴으로서 바로 그 극도의 한적을 적멸이라는 형이상학적 초월의 세계로 아득하게 승화시킨다. 짧지만 무한한 함축을 가진 이런 시야말로 언젠가 작가가 말한 바 있는 ‘할 말이 없어서 짧아진 시가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짧아진 시’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새삼스런 이야기가 되겠지만 지금까지 창작된 양장시조와 단장시조 가운데 인구에 회자되는 걸출한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앞에서 인용한 이은상의 표현을 빌리면 아직도 ‘객관성’을 부여받지 못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형식들이 근원적인 한계를 지녔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조의 정체성을 흔들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시조단의 분위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양장시조와 단장시조에 지속적으로 열정과 시간을 퍼부어본 시인이 아직까지 거의 아무도 없었고, 투자를 하지 않은 마당에 결실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연 양장시조와 단장시조가 시조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평시조만 존재하던 시대에 연시조와 사설시조가 등장했을 때도 아마 정체성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이 가져온 것은 정체성의 위기가 아니라 시조 영역의 확장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평시조의 축소형인 양장시조와 단장시조도 정체성의 위기가 아니라 영역의 확장을 가져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시조의 정체성을 흔든다고 우려부터 먼저 하는 것인지, 평시조의 확장은 인정하면서 평시조의 축소에 대해서는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지, 그것이 정말 한없이 궁금해서 싸락눈이 볼을 때리고 있으니, 아아 춥다, 잠이나 자자.

 

<약력>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저녁밥 찾는 소리}, {봄날도 환한 봄날}, {정말 꿈틀, 하지 뭐니}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