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평론을 찾아서(학자, 시인)

시조와 자유시의 어울림을 생각함 / 이종문

가산바위 2013. 11. 30. 18:48

시조와 자유시의 어울림을 생각함

 

                                                                            이 종 문

 

‘자유시’라니? 자유시가 추구하고 싶은 ‘자유’는 어떤 자유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운율로부터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운율로부터 너무 지나치게 자유롭게 되면 시의 괘도를 이탈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시와 산문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요소가 운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시가 추구하고 싶은 자유는 운율 그 자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그야말로 무진장의 자유가 아니라,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정형률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매우 제한적 자유일 터다. 그러나 자유 속에는 언제나 방종이 숨어 있기 마련이고, 그 방종이 자칫 잘못 발동을 하게 되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남의 집 보리밭까지 엉망진창으로 짓밟아버리기 마련이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의 자유시가 전반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에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산문화의 수준을 넘어서서 작품에 따라 창조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최소한의 내재율마저도 무시함으로써, 시의 괘도에서 이탈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자유시에게 주어져 있는, 아니 자유시에게 주어져 있다고 오해되고 있는 그 무진장한 자유가 서서히 문제가 되는 상황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자유시가 이처럼 시의 본질적인 괘도를 이탈하려는 원심력 때문에 우려가 되면 우려가 될수록 이탈 방지를 위한 구심력을 키울 필요가 있고, 그러한 점에서 구심력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시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지적은 구심력의 울타리에 꽁꽁 묶여서 형식 그 자체를 항구불변의 고정적 실체로 인식하고 있는 시조의 경우에도 물론 적용된다. 분방한 원심력을 가진 자유시가 가진 移越的 가치를 끊임없이 탐색하여 자양분으로 삼을 때, 시조도 보다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유시가 가진 원심력과 시조가 가진 구심력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면서 상호간에 끊임없는 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 시문학은 보다 풍후하고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시조는 그 자체로서도 존립해야 할 역사적 필연성과 당위성이 엄존하고 있는 갈래이지만, 그의 친구인 자유시를 위해서도 면면하게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시를 쓰는 시인들도 친구인 시조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자신들이 쓰는 자유시를 위해서도 시조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정형시인 시조와 자유시의 관계는 배타적이고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相須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시단에서 이 양자의 관계는 대체로 보아 철저히 분리된 고립적 관계다. 우선 문예지부터가 그렇다. 적지 않은 문예지들이 시조를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으므로 시조시인들은 시조전문 문예지를 별도로 만들 수밖에 없다. 자유시를 쓰는 시인 가운데 시조전문 문예지에 실린 시조를 찾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시조시인들도 시조를 아예 취급조차 해주지 않는 문예지들을 구독하여 읽을 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유시를 쓰는 시인들은 자유시만 읽고 자유시만 쓰며, 시조시인들은 시조만 읽고 시조만을 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시조 시인들과 자유시를 쓰는 시인들은 각각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고립적으로 활동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시인들 사이에 교류의 기회도 거의 없다. 분위기가 이처럼 배타적이므로 시조와 자유시를 함께 창작함으로써 이 양자가 지닌 相須的 효과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시인들은 양다리 걸치기로 오해받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시조와 자유시를 함께 쓰기는 정말 어려울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몇몇 시인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종인은 1996년 {문예중앙}의 시 부문 신인상을 받아 이미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고,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와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하여 시조시인으로 다시 등단했다. 그 동안 유종인은 저명 출판사에서 여러 권의 시집을 낼 정도로 자유시 쪽에서 일정한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기도 없는 시조를 아울러 창작해 왔다. 그것은 아직도 그가 “시에 대한 外道로서가 아니라 시에 대한 本道로서의 시조의 품격을 생각(동아일보 당선소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 이 자리에서 다루고자 하는 [비질소리]도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의 소산일 터이다.

 

아파트 육층까지 비질소리 올라온다

 

귀뚜리가

 

지구 위에 두 줄 수염을 내려놓고,

 

뭘 쓸까

 

고민하다가

 

빈 마당에

 

소스라친다

 

상상력의 방향 여하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밑그림이 그려지는 작품이다. 다음은 바로 그 가운데 하나. 비질소리가 6층까지 들려올 정도로 누군가가 힘껏 아파트 마당을 쓸고 있고, 바로 그 언저리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무엇을 쓸까를 고민하고 있다. 여기서 비상하게 주목되는 것은 귀뚜라미가 취하고 있는 자세다. 보다시피 귀뚜라미가 엎드리고 있는 곳은 지구이고, 그 지구 위에다 그는 두 줄 수염을 내려놓고 있다. 거대한 지구와 왜소하기 짝이 없는 귀뚜라미의 대비, 그것 자체가 바로 우주적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한편의 의미심장한 시다. 게다가 지구 위에 내려놓고 있는 귀뚜라미의 두 줄 수염은 저 광활한 세계의 비의를 포착하는 안테나와도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까 지금 귀뚜라미는 누군가가 옆에서 마당을 쓸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고 저 우주의 비의를 담은 엄청난 작품을 골똘하게 구상 중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의 몸을 쓸어내는 강퍅하기 짝이 없는 빗자루 소리에 놀라서 뒤로 나자빠지며, 뒤로 나자빠진 귀뚜라미의 얼굴에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낭패를 당하고 있는 시인의 얼굴이 불현듯이 확, 겹쳐진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은 자아와 세계의 괴리와 분열을 노래한 것이 되겠지만, 이 시조를 이렇게 이해하고 말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무엇을 한없이 채우려는 욕망에 집착하기 보다는 비워냄의 미학을 노래했다고 볼 수도 있고, 이 경우 귀뚜라미는 우리의 삶이나 문학에서 쓸어내야 할 쓸데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골똘하게 고민하는 시인이 된다. 무엇을 쓸어낼까를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훤하게 쓸려진 마당을 보며 시원적 평화와 ‘텅 빈 충만’을 느끼는 시인!

그러나 이와 같이 다의적이고 중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주제보다도 더욱더 관심이 가는 것은 표현형식이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3장 6구 12음보로 이루어져 있는 평시조다. 하지만 시조단에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평시조의 행갈이 방식과는 달리 초장을 1연, 중장을 2연, 종장을 4연으로 한 연갈이 방식이 아주 독특하고 새롭게 느껴진다. 더구나 중장의 제 3음보인 ‘두 줄 수염을’과 종장의 제 4음보인 ‘소스라친다’는 5음절로 이루어져 있어 음수율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율격적 파격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얼핏보면 이 작품이 자유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율독의 리듬과 호흡이 분명히 시조다. 요컨대 이 시조는 시조의 기본 형식은 물론이고 리듬과 호흡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면서도 정형의 답답한 틀을 벗어난 듯한 자유롭고 활달한 형식 속에다 우주의 시학을 담아내고 있는 셈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그것은 “시에 대한 外道로서가 아니라 시에 대한 本道로서의 시조의 품격을 생각”하면서 시조와 자유시를 함께 써왔던 시인의 경험이 시적 용광로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르녹은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대시학 11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