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평론을 찾아서(학자, 시인)

시조 형식의 현대적 변용 / 권갑하(월간문학 2013년 12월호, 시조 월평)

가산바위 2013. 11. 30. 21:16

시조 형식의 현대적 변용 / 권갑하(월간문학 2013년 12월호, 시조 월평)

 

10월호에는 ‘감동’이 우러나는 시조 창작을, 11월 호에는 ‘현대성의 수용’을 강조했다. 이번 호에서는 시조 형식의 현대적 변용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고민해 볼까 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모든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는 시조에도 적용된다. 시조 생성 초기는 유교이념의 영향으로 안정과 균형의 미의식을 지닌 단시조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유교 질서가 해체되는 조선 후기에는 장시조 중심으로 형식적 일탈을 보여 주었다. 시조가 핵심 유전자를 바탕으로 파격 혹은 변격으로 변화해 온 이러한 시조 형식의 변이과정은 바로 시대성 수용과정이다. “시조 형식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헤겔식 논리를 이렇게 시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는 시대성을 수용하지 못하면 존속이 될 수 없음을 또한 강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조는 정격으로 출발하여 조선 후기 변격 혹은 파격을 거쳐 현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떤 정체성을 지닌 시대인가. ‘현대’ 시조로의 길목 초입엔 가람 이병기의 ‘시조는 혁신하자’라는 글이 펄럭인다. 혁신하지 않으면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어렵다는 구호에 다름이 아니다.

시조가 생성될 무렵엔 우리말을 표기할 우리글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말을 한자로 변환하거나 이두문자 등으로 표기해야 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말로 읊조린 것은 기억과 노래라는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옛시조는 이런 환경 속에서 탄생하여 이어졌다. 한마디로 시조는 말로 구성되는 ‘말시’라 할 수 있다. 그 후 한글이 창제되고 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한글 전용시대가 되면서 시조는 ‘말’이나 ‘노래’가 아닌 눈으로 읽는 ‘문자시’로 변신하게 되었다. 활자매체의 대중화에 따른 혁명적인 변화를 맞은 것이다. 여기에 서구에서 자유시까지 유입되어 상호 길항하는 관계가 형성되면서 숙명적으로 시조는 문자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서구시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말’과 ‘노래’ 시에서 ‘문자’ 시로 바뀌면서 시조 창작과 향유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현대의 시대적 특징을 평등성과 자유성으로 압축된다. 그 중 자유성은 문자시로 변환 시조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시조가 현대에 주 장르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이러한 자유성을 외면할 수 없다. 이러한 현대의 자유성은 시조 형식에 다양한 변용을 불러오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자유성의 시대에 정형시로서 시조가 지켜 나가야 할 최소한의 형식적 요소가 무엇인지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논란이 되는 몇 가지를 간단히 짚어보면, 우선 ‘기사방식’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는 활자매체의 대중화와 함께 한자시대에서 한글시대로,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눈으로 읽는 문자시로 변신한 이상 기사방식의 현대적 변화는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기사 방식문제는 시조의 정형성과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기사방식으로 자유시와의 변별성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4음보 율격체계’는 어떤가. 이는 조선 후기 장(엇, 사설)시조를 통해 4음보 체계의 확장을 경험했다. 노래를 버린 현대에 와서도 장시조는 여전히 창작되고 있다. 중장이 조금 늘어나든 많이 늘어나든 4음보 체계가 깨진 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문제 또한 정형의 틀에 굳이 가둘 필요 없이 보다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형식적 관점보다는 문학적 예술적 측면에서 시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다음은 ‘3장 구조’를 살펴보자. 한 글이 3개의 핵심 모음 천(․), 지(ㅡ), 인(ㅣ)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듯이, 시조 또한 천(초장), 지(중장), 인(종장)의 결합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옛시조에서도 3장 구조만은 허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3장 구조’는 시조의 정형성을 담보하는 핵심적이고 바탕이 되는 유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3장 구조면 모두 시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그렇지가 않다. 시조 형식의 또 다른 중요한 DNA로 종장에서 차원 변화를 가져오는 의미 구조상 전환의 형식미학이 요구된다. 그러니까 초․중․종장에서 시상의 전환을 통하여 미학을 창출하는 원리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필자는 시조 형식미학을 정형성(3장 구조), 유연성(각장은 4음보 율격을 기본으로 확장)으로 요약한다. 이 세가지 형식 장치를 바탕으로 창작자의 역량에 따라 다양한 현대적 변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시대가 바뀌어도 지켜 나가야 할 시조의 핵심 유전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조의 형식 변용은 결국 ‘감동’의 문제로 귀착된다. 형식이 아무리 시조 같다 해도 문학적 예술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시조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학성 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우리 시문학사의 발전 흐름상 앞으로는 짧고 품격 있는 시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했다. 기층민중의 문화성향에 의존해 온 자유로운 시 장르에 대한 반동으로 정격의 짧은 시양식을 지닌 고급 장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자리를 시조, 그것도 단시조가 차지할 가능성이 큼을 암시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월간문학』11호에는 단시조가 한 편도 발표되지 않았다. 앞으로는 매호 단시조를 최소 몇 편은 싣는 편집 방향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장희구의「말없이 말하다」는 ‘매난국죽’ 소제목의 단시조로 구성된 연시조이다. 사군자의 ‘梅’는 ‘시절 났다’고, ‘蘭’은 ‘부끄럽다’고, ‘菊’은 ‘간지럽다’고, ‘죽’은 ‘이제 되었다’고 말없이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시편이다. 시조의 형식을 잘 살리고는 있지만 종장 마지막 구에 나타나는 각운 형태는 다소 작위적이고 단조롭다는 느낌을 준다.

호수에 갇힌 물은 오히려 맑고 푸르다/ 체념의 순간들을 그대로 안고 누우니/ 지나는 구름을 보면 나도 구름이 되는구나.

-지성찬,「가을 일산호수공원에서」부분

‘정발산 가을이 오면 물드는 건 호수공원’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문장으로 시작되는 위 시편은 셋째 수에 이르러 시적화자가 호수가 되는 물아일체의 선경을 펼쳐 보인다. ‘호수에 갇힌 물은 오히려 맑고 푸르다’는 셋째 수 초장도 ‘갇혀 오히려 맑고 푸르다’는 역설이 빛나는 구절이다. ‘호수의 갇힌 물’에서 연결되는 중장의 ‘체념’이란 관념어가 좀 걸리긴 하지만 그러한 갇힘의 체념마저도 안고 누우니 나도 구름이 된다고 하는 대상의 내면화는 높은 시적 경지를 보여 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되는구나’라는 고투의 종결어미가 다소 맥을 빠지게 함에도 이 시편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와 감각의 색채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대상과 풍경에서 뽑아올린 발견의 새로움과 사유는 그만큼 시에 신선함과 감동의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출처> 월간문학 2013년 12월호, 시조 월평, 323~325쪽)전문.

*밑줄은 옮긴자가 그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