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연의 동인지, 시집 평론

자기 확인으로서의 사랑의 고백록 -이정원의 『얼레와 어금니』(김우연)

가산바위 2015. 1. 21. 17:11

 

 

 

사랑의 고백록(이정원-얼레와 어금니 해설)-김우연해설.hwp

 

자기 확인으로서의 사랑의 고백록

-이정원의 『얼레와 어금니』

김우연

 

 

 

 

1. 서정의 원리와 속성 구현

 

희수(喜壽)의 기념으로 세상에 드러낸 이정원 시인의 제3시조집『얼레와 어금니』(책만드는 집, 2015)는 “아내, 어머니, 그리고 마음속에 묻은 이름 석 자로 이렇게 가득 출렁이는 이번 시집은, 그 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기 확인으로서의 사랑의 고백록이라 할 것이다.”고 유성호 교수는 해설에서 밝히고 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 또한 가장 크게 공감한 지적이다.

자유시뿐만 아니라 시조에 대해서도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는 유성호 교수님의 해설은 시조의 격조와 나아갈 길을 밝히고 있는 점에서 이 시집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시집은 지난날의 구체적 경험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그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형 양식만이 담아낼 수 있는 서정의 원리와 속성을 높은 수준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다. 이것은 이정원 시인이 투철한 창작의식으로써 시조를 갈고 닦은 결과일 것이다.

이번 시들을 읽어보면 모두 단아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정형률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에는 수식어를 남발하면서 시조의 정형인 장(章)의 기능을 해체한 시들이 별 의미 없이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의미 전달도 잘 안 될뿐더러 감동의 폭도 가질 수 없는 작품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는 “시조는 초·중·종장이 각각 독자적인 의미 체계를 지니면서도 주제를 향한 연계 고리를 형성하여 응집력을 보여야 한다.”는 이광녕(『현대시조의 창작기법』)의 지적처럼 이번 시들은 짜임새 있는 의미와 통사구조를 보이고 있어 견고한 결속력을 보이

이와 아울러 이정원 시인은 시의 대상을 바라볼 때 관조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정형시의 격조를 한층 높게 한 것이다. 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이든 개인의 아픈 사연이든 감정을 절제하여 우아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시조의 격조를 높이고 있다.

이정원 시인은 시조에 대해선 비록 늦게 시작하였지만 이미 학창시절 <고대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이력으로 보면 글을 쓰는 바탕이 이미 오래전부터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기철님이 주창하고 있는 ‘인간주의 비평’을 위해서는 시인에 대해 아는 바가 많다면 좀더 시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원 시인에 대해서는 이 시집 말고는 직접 뵌 적이 없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그의 시에 나타난 인품의 향기를 느끼면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받은 느낌을 전하고자 한다. 이번 시집에서는 우리 역사의 아픈 현실을 비롯하여, 현실 사회 문제, 생태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불교에 바탕을 두면서도 시적으로 승화하여 종교적인 냄새를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도 삶의 높은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으며 가족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 중에서 그의 가족에 얽힌 향기를 중심으로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아내

 

서정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자신의 지난날의 경험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정원의 시 세계는 가을날의 맑은 호수와 같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거창한 목소리로 외치거나 높은 위치에서 설교하거나 하지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는 고백의 어조로 조용히 말하며 감동을 주고 있다. 이것은 서정시의 그가 정통적인 서정시의 보법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철님은 그의『시학』에서 “시는 특수한 감정의 무늬를 가질 때도 간혹 있기는 하나 그보다는 보편적 감정과 정서를 노래할 때 오히려 좋은 시 혹은 감동적인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참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정원의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사랑의 고백록’ 역시 보편적인 감정과 정서를 노래하면서 한없는 감동을 주고 있다.

먼저 부부에 관한 시들을 살펴본다.

 

부부의 연 맺는 것은 남은 반쪽 채우는 일 //

첫눈에 담은 잔상 조리개로 조여놓고 //

눈꺼풀 추켜올리며 몇 번이고 올려 봤다//

 

두 몸이 하나 되어 서리꽃 필 때까지 //

비익조 한쪽 날개 분신인 양 매어 달고 //

한 박자 낮춰 온 긴장 외다리는 비켜 갔다.

-「초심별곡(初心別曲)」전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초심별곡(初心別曲)’에서는 아내를 사랑하여 선택하였으며 앞으로도 그 마음을 변치 안겠다는 자신에 대한 약속이자 영원한 사랑의 노래이다. ‘첫눈에 잠은 잔상’이란 처음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하도록 마음을 일으킨 첫인상 또는 내적인 설렘 같은 것이다. 결국은 비익조(比翼鳥)가 되어 ‘서리꽃 필 때까지’ 살아온 현재를 돌아보면서 “한 박자 낮춰 온 긴장 외다리는 비켜 갔다.”고 하였다. 비익조는 반쪽이 모여서 한 쌍을 이루어서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전설상의 새이다. 아내가 있어. 외다리를 면하고 두 다리를 가진 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고마움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이 첫 마음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사랑의 노래이기에 ‘별곡(別曲)’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곡(曲)에 이 노래를 얹는다면 훌륭한 사랑의 노래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변 사물을 보더라도 아내를 연상하는 삶을 보이고 있다. “퇴근길 기다리던 분단장 당신 모습”(「분꽃,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그에게도 부부 간에 어찌 사소한 갈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단칼에 무를 베듯 연민을 뚝뚝 잘라

다시는 안 볼 듯이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식탁 위 오가는 눈싸움 인두처럼 벌겋다

 

비익조 고운 인연 남은 생도 동행인데

손잡아도 아쉬운 삶 등 돌리고 살 것인가

그래도 화가 안 풀려 컴퓨터만 두들겼다

 

부부 십계명 중 맴맴 도는 열 번째 구절

“처음 연애하던 그때처럼 살아가라”

살며시 안방 문 열자 아내도 눈을 떴다.

-「부부」전문

 

첫째 수에서는 갈등으로 인하여 “식탁 위 오가는 눈싸움 인두처럼 벌겋다”며 실감나고도 참신하게 표현하였다. 둘째 수에서는 화해할까 내적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결국은 화가 안 풀린 상태를 묘사하였다. 그러나 “컴퓨터만 두들겼다”는 말은 글을 쓴다는 것이요 자신과의 대화를 하였다는 것이다. 자아성찰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결국 셋째 수에는 연애하던 시절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먼저 다가간다. 그러자 “살며시 안방 문 열자 아내도 눈을 떴다.”며 둘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원래의 잔잔하고도 맑은 호수로 돌아간 것이다. 독자들에게 잔잔한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둘의 싸움은 일종의 사랑싸움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내외분의 돈독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부부 싸움을 칼로 물 베기라고도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더 상처가 크기 마련이다. 이 두 분은 서로 서로 애틋하게 아끼고 서로 무한히 사랑해 온 분들이라 느껴진다.

이정원 시인은 그리하여 마지막 날이 오더라도 아내를 배려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허공에 줄 올린다, 누가 먼저 손을 놀까

남은 빈칸 채우기엔 한 소절이 너무 길어

내 먼저

전조등 되어

오는 길 밝히리다

 

창밖에 여무는 달빛 단장의 아픔일레

얄팍한 허리춤에 밀서 한 장 남겨 놓고

한 발짝

앞서 가리니

두 발짝 뒤 오시게

 

자다 깨어 설핏 본 연리지 당신 얼굴

주름살 언저리에 웃는 내가 앉아 있다

잊힐라,

함께 한 세월

등이 마냥 시리다.

-「붉은 눈빛」전문

 

불교에서 삶과 죽음은 깨달은 자에 있어서는 한 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구름 조각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범부 중생들은 늙어갈수록 죽음의 그림자를 가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정원 시인은 “누가 먼저 손을 놀까”라며 부부 중 한 사람이 언젠가는 죽을 것인데, 그럴 때 남은 시간은 찰나도 영원처럼 느껴질 것이라며 “남은 빈 칸 채우기엔 한 소절도 너무 길어”라고 노래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내가 넘어질까, 어두울까 걱정하는 모습이 “내 먼저/ 전조등 되어/ 오는 길 밝히리다”며 아내에게 사랑을 베풀고 싶다는 마음을 보이고 있다. 둘째 수에서도 아내보다 한 발짝 앞서서 길을 인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셋째 수에서는 비익조(比翼鳥)요 연리지(連理枝)인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행복했던 날들을 떠올리면서 “주름살 언저리에 웃는 내가 앉아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두 사람이 둘이면서 한 사람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행복한 사랑을 나눈 임과는 오래 오래 있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잊힐라, 함께한 세월/ 등이 마냥 시리다.”라고 하였다. 이 행복한 사랑이 잊혀진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등이 시리며 몸이 오싹하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이 오더라고 그 순간까지. 처음처럼 앞으로도 오래 오래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노부부의 사랑의 노래로 절창(絶唱)이다. 이런 노래를 누가 쉽게 부를 수 있겠는가.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한 부부만이 부를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곡(曲)에 얹어서 널리 여러 사람이 부르는 날들이 왔으면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는 아내이지만 시어른들께는 며느리다. 그래서 야생화를 보더라도 며느리로서의 고달픈 삶을 살아온 우리 조선의 며느리들을 생각한다.

 

 

무심코 뱉은 말이 대못으로 박혀 와서

행주치마 감아쥔 손 멀리로 아찔할 제

가슴을 달랠 길 없어 퍼 올리는 눈물 한 줌

 

한 번쯤 생각하고 두 번쯤 참는다면

갈등도 묽어져서 새순으로 돋는 것을

입술 위 밥풀 두 알이 눈 뜬 채로 굳었다.

-「며느리밥풀꽃」세 수 중, 둘째와 셋째 수

 

가난하던 시절에 시어머니의 미움을 받던 며느리가 있었다. 밥알이 익었는가 미리 맛보다가 어른들보다 먼저 먹는다는 누명을 쓰고 시어머니께 맞아죽었다. 환생하여 며느리밥풀꽃이 되었는데 미처 넘기지 못한 밥알 두 알이 꽃에 맺혀 있다는 슬픈 전설을 가진 꽃이다. 아무리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잘 대해준 부모님이 계신다 하더라도 어찌 “눈물 한 줌” 없는 며느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시인은 생각하고 또 참으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이정원 시인은 겸손을 바탕에 깔고 있어서 쉽사리 남에게 높은 위치에서 설교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부간의 갈등이 있을 때 우선 며느리가 참으라고 하고 있다. 어른 공경에 대한 마음을 깔고 있다. 아내는 남편이 달래주는 것이 현실적인 순리라는 것을 터득한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가족이든 남남끼리는 참는 것이 부족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럴 때 고전적인 이 작품을 한 번쯤 음미한다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내가 그동안 어른들을 모시느라 마음으로 고생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위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본다면 이것도 일종의 사랑의 노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3. 참척(慘慽)의 고통과 그 승화

 

삶을 고해(苦海)라고도 한다. 아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아픔 중에서도 참척(慘慽)만큼 큰 것은 없으리라.

 

팽팽한 너의 끈을 풀어내는 마지막 밤 //

꼭 잡은 손일랑은 이제 놓고 살펴가라 //

해마다 찾아온 눈빛 이쯤에서 접으련다 //

 

생전에 못 따라준 술 한잔 받고 가라 //

대못으로 박혀 있는 숱한 그 시간들 //

내생에 다시 만나거든 술 한잔 따라주련.

-「마지막 2월」전문

“2013.2. 23. 아들의 마지막 제사를 마치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연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지만 아들의 제사를 올려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누가 무엇으로 위로하겠는가?

석가 당시에도 어린 아들을 잃은 여인이 실성할 정도가 되어 부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부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단 마을로 내려가서 아무도 사람이 죽지 않는 집을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발견할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죽음이라는 것은 자신만의 일만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첫째 수에서는 너와 잡은 인연의 끈을 “이제 놓고 살펴가라”고 하며 이승과 저승의 삶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둘째 수에서는 생전에 주지 못한 술 한 잔을 주면서 내생에서 만날 때는 나에게 술 한 잔 달라고 한다. 아무리 살펴가라고 했더라도 가슴속에는 영원히 “대못으로 박혀 이는 숱한 그 시간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며 그래야 그 응어리진 가슴이 풀리기 때문이다.

대못이 박혀 있는 가슴은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 “춘래불춘래(春來不春來)”(「백약로를 지나며」), 피울음만이 흐를 뿐이다.

그러나 영원히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즐겨 쳤다는 피아노곡 ‘엘리제를 생각하면서’ 생각하면서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네 손때 가득 묻은 마란츠 고쳐 오던 날 //

속으로 불러본다 가슴에 묻은 이름 석자 //

행여나 하늘에 닿을까 남쪽 문 열어놓고//

 

삼십 년 된 고물이라 내장(內臟) 모두 꺼내 갈고 //

마음속 사포질로 닦아보는 이 저녁 //

영원히 이십팔 세인 엘리제를 위하여.

-「엘리제를 위하여」전문

 

‘마란츠’는 독일제 앰프이다. “속으로 불러본다 가슴에 묻은 이름 석자 / 행여나 하늘에 닿을까 남쪽 문 열어놓고”라며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행여나 들릴까란 심정이 애틋함을 느끼게 한다. “영원히 이십팔 세인 엘리제를 위하여.”라며 영원한 엘리제로 승화시킨다. 내생에서 보기를 바라면서 될수록 담담한 마음을 가지고자 한다. 관조적인 자세로 시적 승화를 시키는 것이 이번 시집에 나타난 특징이다.

그렇다고 어찌 그 아픔을 잊을 것인가? 그래서 “질기디 질긴 인연 그래서 분신인가”라며 “잊자 하면 잊힐까 봐 못 보리는 아픈 잔상(殘像)”(「바람으로 눕고 싶다」)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별똥별을 바라보면서도 “이승을 하직하는 누군가의 눈물인가”(「별똥별」)라고 보게 된 것이다.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할까. “보내면 안 될 것을 서둘러 보낸 죄로 // 하루에 한 두 번씩 가슴이 휑해진다 // 뻘 가슴 열어 놓으니 어서 오렴, 내 새끼야.”(「썰물」전문, 현대시조 121호(2014 가을호)) 짧은 시속에서 시적자아의 안타까움 마음이 직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애절한 모성을 잘 표현하였다. 서둘러 보내었지만 “뻘 가슴 열어 놓으니 어서 오렴”이라며 기다리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어찌 잊는다고 하지만 잊을 있겠는가. 차라리 기다리고자 한 것이다. 시란 꼭 뛰어난 비유로서만 훌륭한 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간절한 말은 짧게, 직서적인 표현 속에서 감동이 더 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두 내외분이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시로 잘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아픈 감동을 느끼게 한다.

 

 

4. 어머니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머니 앞에 서면 어린아이가 된다.

 

옥색 치마 받쳐 입던

어머니 자색 저고리

 

저처럼 고왔다는

생각에도 찡한 눈물

 

새색시

붉은 자태가

서녘에 아롱지다.

-「노을 지다」전문

 

저녁놀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서 옥색 치마 받쳐 입으시던 아름답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그러나 고왔다는 생각에도 시인은 찡한 눈물이 맺힌다. 하물며 고생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 아픈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지금 젊은이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보릿고개를 우리는 넘어왔다. 불과 한 세대 전의 이야기이다. 양극화 현상으로 힘들어 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생존의 벼랑에 있어본 사람들에게는 한 끼의 식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필리리, 보리 피리 저물녘을 물질할 때

때맞춰 찾아오는 공복을 달래준다

가늘던 허리를 펴면 눈에 선한 고봉밥

 

입술과 입술 사이 허기를 세워놓고

기나긴 하루해를 주린 배로 보내는 일

고달픈 아버지 어깨가 자꾸만 낮아지던

 

가난을 절구에 넣고 허물을 벗기느라

어머니 긴긴 여름 옹이 박힌 손바닥에

청보리 대궁을 올려 꿈이 익던 보리밭.

-「보릿고개」전문

 

첫째 수에서 풀피리 불면서 허기를 달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둘째 수에서는 주린 배를 채워주기에도 역부족인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으며 셋째 수에서는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보리를 절구에 찧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가난을 절구에 넣고 허물을 벗기느라”고 표현한 것은 참신한 표현이며 어머니의 손바닥에 옹이가 박힌 것을 묘사한 것으로 가난하던 시절의 고달픈 모습을 잘 형상화하였다. 그런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도 “청보리 대궁을 올려 꿈이 익던 보리밭.”이라고 하여 희망을 간직하였다. 「보릿고개」는 전체적으로도 의미 구성이 단단하며 시적 형상화가 뛰어난 작품이다.

시인은 어머니를 생각하니 고생 속에서도 자식을 사랑하였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지극한 효성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평생 내리사랑 속으로만 보듬으신 //

여섯 폭 치맛단에 굽이굽이 서린 설움 //

한 많고 고달픈 참회록 몰래 쓰던 어머니.

-「정월에」전문

 

그런데 부모님은 오래 사실 것만 같았지만 때가 되면 떠나신다. 그래서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님을 생각할 때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특히 어릴 때는 커서 효도하겠다고 결심도 하고, 또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정원 시인은 옥잠화를 보면서 어릴 때 어머님께 은비녀를 옥비녀로 바꿔드리겠다고 했지만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한 회한을 노래한 작품이 「옥잠화 단상」이다.

 

 

철부지 어렸을 적 어머니의 은비녀를

옥비녀로 바꿔드린다 호기를 부렸을 때

그때도 귀를 세우고 내 말을 엿들었지?

 

효자 노릇하겠다던 어린 날 그 약속을

처자식 돌보느라 어머니를 밀어낸 죄

가슴에 옹이가 되어 해마다 꽃사태다

 

바위틈에 대궁 올린 순백의 내리사랑

한 떨기 꽃으로 핀 어머니 흰 가르마

넌지시 나를 보신다, 은비녀 쪽진 머리로.

-「옥잠화 단상」전문

 

“처자식 돌보느라 어머니를 밀어낸 죄”라며 어머니 앞에 사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자식에게 섭섭하게 보다 장하다고 볼 것이다. 그래서 ‘너가 옥비녀 해주지 않아도 내가 이렇게 옥잠화로 피어났잖아’하고 시인에게 다고 오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환생한 것이다. 그러나 옥잠화를 바라보는 시인은 어머니의 내리사랑을 생각하며 눈물에 젖을 것이다. 독자들에게도 자기를 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돌아가신 어머니께 회한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제는 그 회한을 입장을 바뀌어서 자식들에게 ‘내리사랑’을 실천하리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심성을 가지셨기에 자녀분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였을 것 같다. 이번 시집은 아들 내외분이 출판비를 부담해주었다니 더욱 이 시집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 시를 아들내외분께 선물하는 것만으로도 그보다 더한 축복을 그들은 받으리라 믿는다.

 

 

5. 할아버지

 

하루해를 놓아주고 저녁놀을 친구 삼아 //

귀갓길 지게 가득 달을 지고 돌아올 때 //

구수한 소여물 냄새 향내처럼 달여지고 //

 

할아버지 달밤에도 자갈밭 일구시다 //

달 한쪽 베어 물고 허기 조금 채우시던 //

행여나 그런 일 있던 줄 누가 알까 숨기셨지.

-「할아버지의 달」전문

 

농업 위주의 시대에서는 땅은 바로 생명줄이었다. 그래서 달이 뜨도록 자갈밭을 일구시다 돌아오시던 당시의 삶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남에게 숨기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며 고된 삶이었지만 “귀갓길 지게 가득 달을 지고 돌아올 때”라고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여간 순수한 것이 아니다. 이정원 시인은 이미 시인의 심성을 타고 난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묘사가 잘 되었고 시각적, 후각적 이미지 처리로 시적 형상화가 뛰어난 작품이다. 절창이다. “달 한쪽 베어 물로 허기 조금 채우시던”이란 표현도 누가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요즘은 상대적 박탈감에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시대에 『얼레와 어금니』에 나오는 작품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치유하는 힘도 있다고 본다. 널리 읽히기 바라는 마음이다.

할아버지에 대해서 “한 뼘 땅도 아껴 쓰던 60년 전 그 세월에”(「낫과 하현달」)라고 회상하면서 “서녘에 무쇠 낫 하나 하현달로 걸려 있다.”(「낫과 하현달」)고 하였다. 하현달은 무쇠 낫이라는 이정원 시인의 특허품이 탄생한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기에 시인 내외가 있고 또 아들 내외로 이어가고 있으니 우리의 삶은 강물처럼 유장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우리의 삶을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니 번창하지 못하고 황폐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도 돌아보게 하는 시집이다.

 

 

6. 시인의 남매들

 

자서전적인 시가 있다. 이정원 시인 남매들의 어릴 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산들이 내려와서 울타리로 둘러앉아

모락모락 연기 나는 하늘 아래 집이 한 채

어머니 부지깽이 소리에 귀를 여는 동구 밖

 

날마다 부산하게 별을 이고 집 나서고

여명 속에 밝아오는 고갯길을 오르내리며

괴춤을 추켜올리던 등하굣길 오십리

 

여섯 해를 하루같이 푸른 꿈을 꿰어 차고

뉘라 먼저 할 것 없이 걷고 뛰던 우리 남매

어머니, 환히 부르며 다시 갈 수 있다면….

-「고향집 생각」

 

어릴 땐 궁산벽촌(窮山壁村)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등하교 길 오십리”를 남매들이 “걷고 뛰고”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것도 어린 초등학교 시절 6년 동안을 말이다. 그것은 푸른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둑해서 집에 돌아올 때 어머니 하고 부르며 달려갈 수 있는 부모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부모님의 기대와 푸른 꿈을 가졌기에 훌륭한 꿈을 이루신 것 같다. 다른 것은 두고라도 ‘등하굣길 오십리’를 걷고 뛰어다녔다고 하면 요즘 학생들에게는 전설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이 작품은 편하면 더 편하려고 하는 요즘 학생들에게 좀더 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본다. 시 치료라는 것이 얼마 전부터 떠오르고 있는데 추천할 작품이다. 좋은 시란 것은 감동을 주는 시일 것이다. 우리 시조단에서는 일부 시인들이 형식을 파괴하거나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동이 없는 작품은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특히 시조는. 이 작품 역시 이 시집 전체에 흐르고 있는 정형시조의 보법을 당당하게 걸으면서 시적 형상화가 잘 된 것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치 독자들에게 잘 통하면서 감동을 주면서 시적 형상화가 잘 되었기에 좋은 작품인 것이다. 내용은 별로 없는 것을 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로 꾸며 보아도 수식어가 많을수록 시조의 의미구성은 느슨하게 될 뿐이다. 좋은 시조의 한 전범이 되는 작품이다. 세 수 모두 초장, 중장, 종장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귀납법적인 구성으로 종장에 강조하는 의미를 두고 있다.

 

 

7. 딸

 

참척(慘慽)의 아픔을 겪은 마당이라 딸에 대한 노래는 이번 시집에는 달빛처럼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다.

 

 

홀로서기 외로워서 눈물 찔끔 글썽이며 //

화두를 놓친 자리 들어 올린 꽃잎인가 //

딸아이 면사포처럼 애련하다, 뒷모습//

첫날밤 간직했던 야래향을 피우는가 //

 

꽃무덤 여무는 밤에 탯줄을 자르더니 //

볌가웃 낮은 곳에서 보름달로 앉았다.

-「박꽃」전문

 

물론 박꽃이 훤히 핀 것을 “보름달로 앉았다”고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자신의 삶이 알게 모르게 시 속에 녹아 들게 마련이다. ‘인간주의 비평’에서 눈 여겨 보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딸아이 면사포처럼 애련하다, 뒷모습”이라고 하였다. 곱게 키운 딸아이를 혼인 시키는 것은 정말 가장 큰 기쁨이요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돌아서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도 부모의 심정이요, 특히 아빠의 심정일 것이다. 그러니 시인도 얼마나 애련한 마음을 가졌을 것인가를 느낄 수 있다.

 

 

8. 강남에 사십니까?

 

테헤란로 한복판에 장승처럼 우뚝 서면 //

처음 본 서울인 양 눈높이가 달라진다 //

가벼운 주머니 사정 혼자서 헤아리며//

 

나도 잊고 너도 잊고 잠시 모두 잊어면서 //

내 핏줄 소중한 걸 모여 사니 알 것 같아 //

새하얀 젖니가 돋듯 집 한 채가 윤을 낸다/

-「강남에 사십니까」전문

 

서울에 살기만도 평범한 사람들은 버거운 곳이다. 그런데 서울에 살다가 자식들과 함께 또는 가까이 살기 위해서 강남으로 이사를 간 것을 첫째 수에서 진솔하게 나타내고 있다. 강남에 와보니 처음 본 서울처럼 눈높이가 달라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벼운 주머니’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둘째 수에서는 그 모든 물질적인 것을 지불하면서도 그런 것은 잊게 된다. “내 핏줄 소중한 걸 모여 사니 알 것 같아”라며 그 고통을 승화시킨다. 자녀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웃고 있는 곳에서 진정한 삶이 꽃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새하얀 젖니가 돋듯 집 한 채가 윤을 낸다며” 새로운 삶에 행복해하고 만족하게 된 것을 은유하면서 ‘집’에 감정이입하고 있다. 그래서 강남에 산다면 물질적인 부자만이 부자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당당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말한다. ‘강남에 사십니까?’라고. 물질이전에 이제 정신적으로 새로운 삶에 접어든 것이다. 희수(喜壽)라면 요즘의 나이로 보면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식들 입장에서 보면 병이 든 부모임을 멀리 두고 보는 것도 여간 힘 쓰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식들 입장을 생각하는 것도 효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공자는 맹의자의 아들, 맹무백이 효를 물었을 때 군말 없이 다름과 같이만 대답했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이다.“ 효를 묻는데 자식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입장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효(孝)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식의 마음이라기보다는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 있기에 거기에 감응하여 발하는 것이 자식의 마음인 것이다.”(김용옥, 『중용-인간의 맛, 통나무, 2012, 224쪽』)고 하였다. 이정원 시인 역시 자식을 먼저 헤아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9. 높은 수준의 정형시

 

이정원의 『얼레와 어금니』에 나타난 다양한 관심 중에서 가족과 관련한 시들만 살펴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살펴본 것이 아니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에 나타난 무한한 감동에 대한 독후감이다. 시에 대한 해설은 유성호 교수님이 각 방면에 걸쳐 간결하고도 핵심적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성호 교수님이 해설에서 “이정원 시인의 시편들은 이러한 서정의 원리를 두루 담아내면서, 우리에게 그리움과 따뜻함을 주조로 하는 중용과 위안의 언어를 던져주는 미학적 성과라 할 것이다. 특별히 이번 시집은 지난날의 구체적 경험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그 경험을 표현하는 선명한 감각을 통해 깊은 자의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형 양식만이 담아낼 수 있는 서정의 원리와 속성을 높은 수준에서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란 말을 다시 한번 곱씹고 싶다.

이제 시집 세 권이나 수준 높게 낸 시인으로서 지나친 겸손은 사양하시고 소망인 5권의 시집 발간의 소망이 이루어지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의 고백록(이정원-얼레와 어금니 해설)-김우연해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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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고백록(이정원-얼레와 어금니 )-김우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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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_고백록(이정원-얼레와_어금니_)-김우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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