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현대시조의 다양한 주제의식
개화기에 시조를 노래로 인식한 육당의 고정관념이 현대시에서 시조가 분리된 발단이 되었다. 이후 자유시의 대명사가 시가 되었다. 예를 들면, 낭만시는 낭만주의 자유시란 뜻이고, 프로시는 프롤레타리아 자유시란 의미이다. 이렇게 자유시의 준말로 시가 사용되었다.
시단도 시․시조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시가 자유시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장르상 모순이다. 그 영향으로 현대시 연구자들은 시조를 고대시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고전연구자들은 현대에 쓰였다는 이유로 시조를 외면한다. 따라서 고전․현대 양분에서 시조 연구가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현대시 연구자들이 우리 전통시를 외면하고, 서구 시론의 관점에서 한글시를 연구한다면, 궁극적으로 한글시의 장점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민족시인 시조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시조를 구시대의 노래로 인식하여, 현대화를 외면한 현상은 이본 유학파들의 오류였다.
그들이 서구화만이 우리 시가 발전하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하여, 추상적 표현미의 개성화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이후 그 영향으로 현대시 경향이 더욱 난해해졌다. 따라서 현대시에서 서정적 감동력과 애독성이 소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육당에서 시작된 이후 일본 유학파들로 인해 고착 심화되었다. 하지만 과거 지향적인 고정관념을 탈피하지 못해, 지금도 시조의 퇴조가 시문학 진화의 자연스런 과정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시조의 형식적 제약과 단조로운 기교에 반발하여, 현대적 감수성과 다양한 주제의식을 수용하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자유시가 등장하여 자연스럽게 현대시의 중심을 차지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대시조의 주제는 자유시와 구별되지 않는다. 시조의 주제나 내용이 제한적이고 단조롭다는 인식이 바로 고정관념의 오류에 속한다. 그 오류를 반증(反證)하기 위해, 현대시조의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제시할 필요가 있다.
의붓어미 그늘에서 풀물 든 설움이야
떫은 보릿고개 도토리랑 삼켰다마는
民籍에
퍼렇게 앉은
식민의 피는 못 지웠다.
-박재두,「쑥물 드는 신록」첫 수
초장 ‘의붓어미’는 개인보다 민족적 의미를 띠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식민의 피’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니 “의붓의미 그늘”은 일제의 지배를 의미한다. 그 식민지 통치에서 비롯된 우리 민족의 비극성을 강조하려고 박 시인은 ‘의붓어미 그늘’(일제 지배)을 이 시편의 맨 앞에다 강조했다.
또 ‘풀물 든 설움’이나 ‘보릿고개 도토리’는 당시 극빈한 굶주림을 의미한다. 농촌에서 식량이 떨어지면 풀뿌리를 캐먹거나 도토리를 주워 먹는다. 식량이 동나는 고비가 보릿고개이다. 그 허기(虛飢)의 절정기 ‘설움’을 ‘삼켰다’는 것은 견딜만 했다. 그러나 못견딘 사연이 종장에 나온다.
종장 ‘民籍에/ 퍼렇게 앉은/ 식민의 피’는 일제시대 호적에 기록된 창씨개명된 부친의 이름을 의미한다. 박재도 부친의 개명된 이름이 지워진 흔적이 호적에 남아있는 사실을 김동열이 밝혔다. 이 체험적인 표현에 담긴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 ‘피’의 내포적 의미는 희생이다. 일제 탄압으로 받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피해를 ‘못 지웠다’라고 표현했다. 정신적 상처는 보릿고개의 배고픔보다 더 치유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이는 일제의 물질적 약탈보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상처와 민족문화의 손실이 훨씬 더 심각함을 뜻한다.
뼈마디 물러앉고도 못 벗은 징용살이
동자 깊이 박고 간 황토빛 타는 산천
풀꾹새
뭉개진 울음
쑥빛으로 물드나.
-쑥물 드는 신록」둘째 수
둘째 수 초장 “뼈마디 물러앉고도 못 벗은 징용살이”에 담긴 뜻이 깊다. 2차 대전 중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징용이다. 당시 젊은이들이 징용에 끌려가 죽거나 아니면 동물 취급당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강제로 노역을 했다. 징용살이보다 더한 것이 중장의 “동자에 깊이 박고 간 황토빛 타는 산천”이다.
여기서 일제에 의한 징용살이보다 더 고통스러워, 화자가 잊을 수 없는 것이 ‘황토빗이다. 그 빛은 단풍 같은 아름다운 붉은 빛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핏빛 같은 붉은 빛이다. 즉 “황토빛 타는 산천”은 “핏빛으로 타는 산천” 즉 “피로 물든 산하”를 의미하낟. 따라서 중장의 의미는 수많은 청년들의 선혈(鮮血)로 물들었던 6․25의 처참한 광경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그 의미가 다음 종장과 잘 연결된다.
“풀꾹새/ 뭉개진 울음/ 쑥빛으로 물드나.”에서 ‘풀꾹새’는 ‘뻐꾹새’의 속어이다. 그것은 단순한 뻐꾸기 울음소리가 아니다. 중장의 의미가 종장으로 이어지니, 전쟁 중에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상징한다. 무수한 병사들의 비극적 죽음이 ‘뭉개진 울음’에 반영되어 있다. ‘쑥빛’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쑥물이 든 울음’은 영영 잊을 수 없는 슬픔을 뜻한다. 전쟁의 피해와 후유증이 오래감을, 박 시인은 ‘쑥물’로 강조했다. 그 영원성을 ‘동자 깊이 박고 간’으로 박 시인은 표현했다. 풀물이나 쑥물처럼 지워지지 않는 속성을 내세워 전쟁의 상처가 쉽게 치유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뻐꾸기 울음 같은 흔한 새소리로 전쟁이 우리 민족 전체의 국민적 수난임을 강조했다.
시인은 단시조 두 수에 20세기 한국인들이 겪은 양대 전쟁의 비극을 반영했다. 그의 시적 성공은 전쟁의 참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점에서 돋보인다. 식민지 수탈과 탄압정책이나 양대 전쟁의 수난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 이 시편의 장점이다. 그 희생을 슬픔을 ‘황토빛 타는 산천’과 ‘풀꾹새/ 뭉개진 울음’처럼 상징적으로 표현한 점에서 시의 우수성이 돋보인다. 한국인들이 겪은 양대 전쟁의 비극적 희생을 시조 2수에 반영한 시인의 현대 사회적 주제의식이 탁월하다.
상징적으로 표현된 보편적 주제 의식과 시인의 독창적 표현이 조화를 이룬 것이 이 시편의 장점이다. 즉 20세기 전기 한국 청년들이 겪은 비극적 희생이란 사회적인 주제와 박 시인 특유의 기발한 표현이 잘 조화된 점에서, 이 시조는 현대시로 보기 드문 절창이다. 그처럼 좋은 시편이 발표될 당시 현대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시조에 대한 시문학 평론가나 연구자들의 관심 부족으로, 한국인들에게 널리 애송되어야 마땅한 이 시편이 시단이나 현대시 연구자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시편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대표작으로 많이 연구되기를 기대하며, 필자는 이 책에 다시 분석하여 재수록을 했다.
국가나 사회의 문제도 시의 주제로 중요하지만 개인의 서정성도 또한 중요하다.
내 오늘
서울에 돠
萬坪 寂寞을 산(買)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부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名啣
-서벌,「서울 1」
위 시편의 화자는 “내 오늘/ 서울에 와” 있는 여행객‘이다. 그의 가슴에 가득찬 적막감을, 시인이 ‘만평’이라는 공간 이미지로 구체화시킨 표현이 참신하다. 객지에서 느끼는 화자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잘 담긴 그 첫 연이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충분한 표현이다. ‘적막을 산다’는 표현에서 고독 자체를 즐기는 화자의 선비정신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화자의 외로운 심정은 중장에서 더욱 고조된다. 그 적막감을 “안개처럼” 흩어지고, “가랑비처럼” 뿌려져, 사방으로 점점 확대된다. 즉 고독감을 ‘만평(萬坪)’이나 ‘안개’나 ‘가랑비’라는 구체적 이미지들로 참신하게 시각화시킨 시인의 표현력이 탁월하다. 적막이라는 원개념이 참신한 사물들의 이미지로 발전시킨 시인의 표현미가 더욱 빛난다.
중장과 종장 사이에 많은 비약이 있어, 시의 구조미가 한결 살아난다. 비록 상황 설명은 행간에 생략되었지만, 숨은 의미를 독자들이 유추할 수 있다. 화자는 외로움을 달래려 친구들을 찾아간다. 그들의 술이나 식사 대접을, 화자는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비정하게 단지 명함만 건넨다. 냉정한 거절의 뜻이 담긴 명함의 이미지로, 화자의 외로움은 더욱 심화된다.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 빈털터리 화자를 내세워, 시인은 현대인의 고독을 잘 표현했다. 화자의 외로움은 1연에서 시각화되고, 2연에서 확대되고, 3연에서 심화된다. 이처럼 도시의 비정함과 현대인의 고독감이 구체적 이미지로 간결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이 시조편의 특징이며 장점이다.
20세기 우리 민족사의 비극이란 사회적인 문제가 시조「쑥물 드는 신록」의 주제이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서울에서 방황하는 화자의 외로운 심정이 담긴 서정 시조가 「서울 1」이다. 이렇게 서정적인 것과 대조적으로 현대 한국 민족사의 비극을 다룬 사회적 주제의식이 반영된 시조 편들도 있다. 따라서 시조의 쇠퇴 원인이 주제의 단조로움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 시편들로 확실하게 드러난다.
다음으로 시조 형식의 제약성으로 시조가 퇴조했다는 문제가 있다. 시조 형식의 기본은 3장구조이다. 3장 구조의 형식론은 구수․음보․자수론 셋으로 구분된다. 시조 한 장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를 2구로 보면 구수론이요, 4음보로 보면 음보론이요, 15자 정도로 보면 자수론이다. 하지만 그 셋의 기본단위가 확실하지 않다. 즉 한 장을 이루는 자수․음보․구수를 이루는 기본단위가 모호하다.
2구는 4음보와 일치하니, 2구수율은 4음보율로 통합될 수 있다. 한 장을 4음보율로 보는 음보론과 종장 자수율이 결합된 것이 시조 형식론의 일반적 개념이다. 따라서 시조 형식은 4음보율의 3장과 종장 자수율이다. 하지만 시조의 자수와 구수와 음보의 기본단위 기준이 모두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시조의 형식론 셋은 모두 유동적이다. 그 때문에 동일한 내용이 자유시나 시조에 담길 수 있고, 또 그 양자 중에 어느 하나로 구분되기 어려운「문둥이」같은 시편들도 있다.
앞에서 많은 자유시 편들을 분석해, 필자는 그 속에 내재한 시조형의 존재 가치를 지적했다. 그 존재는 시․시조의 양분법이 모순임을 반증하는 객관적 자료가 된다. 필자가 많은 자유시 편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저명한 시인들이 쓴 명시 편일수록 그 속에 시조형에 속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욱이 그 시조형들이 원래 자유시 편들보다 애송성이 높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시조형의 가치가 드러날수록 시와 시조의 통합으로 이어져 현대시 발전의 밝은 미래가 열린다. 시조형과 시조의 통합은 우리 민족시인 시조가 현대에 부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시조형들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해외에 시조로 널리 알려지면, 일본의 하이쿠보다 애송성이 더 높아질 수 있다. 그 이유는 시조형의 특징인 4음보율의 장점에 있다. 하이쿠의 엄격한 자수율보다 융통성이 많은 시조형의 음보율이 현대인의 감수성에 더 적합하다. 그 근거는 음소문자인 한글이 음절(음수)문자인 일본어 보다 우수한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복잡미묘한 현대인의 감정을 표출하기에 음절문자보다 음소문자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그 근거이다.
※굵은 글씨 : 발췌자가 임의로 한 것.
민병기,『현대시․시조 통합 이론』,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16. (113~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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