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 제76회 수필신인상(박태원-외삼촌과 외조모 외1).hwp
새한국문학회, 『한국문인』201212·1월호(통권 제77호)(발행일:2012.12.1)
제76회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박태원-외삼촌과 외조모 외 1편
외삼촌과 외조모 외 1편
박태원
들판에 가을걷이가 갈무리되고 추워지던 4년 전 초겨울, 대구 어머니한테 전화하니 받지 않았다. 오후에 다시 해도 받지 않았다. 밤늦게야 전화를 받았다.
“오늘 종일 어디 다녀소셨느냐?”고 물으니,
“하루 종일 동산병원에 있다가 방금 왔다”고 하셨다.
“병원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 그제야 어머니는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네 외삼촌이 진작부터 몸이 안 좋아 하면서도, 1년 농사 가을걷이까지 다 해놓고
어제 병원에서 종합검진 받았는데, 오늘 말기 암으로 결과가 나왔구나.”
어머니는 6남매 중 첫째이지만 일찍 출가외인이 되었고, 외할아보지도 일찍 세상을 떠나서 외삼촌이 외가의 맏이 일을 다 했다. 농사와 마을동장 일을 보면서 특히 17년 간 중풍이었던 외할머니를 수발들며 힘든 내색 않으면서 잘 모셨다. 그렇게 고맙고 착한 남동생을 먼저 보내야할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며, 나 또한 외삼촌한테 받았던 많은 사랑을 생각하니, 망연자실 잠이 오지 않았다.
외삼촌은 병원에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외갓집 뒷산에 장사되었다. 화로와 같이 따뜻함을 주던 외삼촌이 영하였으니 그날 겨울은 더 추웠다. 그날 눈물이 마중물 되어 외갓집을 통해 받았던 따뜻한 사랑들이 일렁이었다.
나는 외갓집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여건 속에 태어났다. 외할머니가 38세 이었을 때, 18살 나이의 어머니가 외가에서 나를 낳았고, 외할머니가 그 핏덩이를 받으셨다. 외할머니 황씨는 본래 다정하신데다, 이런 내 출생의 사연까지 더하여 외손자 이상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 고향 뒷산으로 산을 넘어 비탈길 꼬부랑길 고개에 이르면 산 아래 들판 너머 외갓집이 보인다. 꼬부랑길을 내려가면 어느새 외할머니가 들판을 달려오고 계셨다. 외할머니는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셨다. 외할머니께 사랑받은 기억의 편린들은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었고,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노력하게 했다. 참으로 외할머니가 고마웠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려지셨고, 백약이 무효였다.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외할머니를 한번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싫다고 하셨고 외삼촌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계시는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 외갓집으로 가끔씩 찾아뵈었다. 외삼촌은 들에 일 나가고 외할머니가 혼자 방에서 소일하다가 나를 보며 반가워하셨다. 외할머니가 중풍으로 말이 어눌했지만, 한참동안 놀다가 집으로 오곤 했다. 그때마다 들에 계시는 외삼촌한테는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올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휠체어를 사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외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동네와 들판으로 바람을 쐬면서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니, 스스로 자랑스러웠고 빨리 휠체어를 구입해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께 칭찬도 받을 겸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칭찬은커녕 단호한 어조로 “휠체어를 사 주면 절대 안 된다.”며 만류하셨다. 너무 좋은 일인데 왜 반대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휠체어 구입하는 일은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11년 전 외조무가 세상을 떠났다. 문상 온 사람들이 외삼촌의 한결같은 효성에 대해 말씀했다. 17년 동안 매일 밤 외숙모 대신 외할머니와 주무셨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외삼촌을 생각하며 미안함을 가졌다. 특히 휠체어를 사려 했던 잘못을 깨들으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외할머니에 대한 외아재의 효성은 지극했는데도 나는 백면서생이었다. 더 이상 여력이 없을 만큼 외조모를 모셨는데, 내가 휠체어를 사드리면 외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동네와 들로 다니게 하는 일을 더하게 하는 짐을 지우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머니가 못마땅해 하시면서, 나를 꾸중하며 당장 그것을 도로 갖고 가라고 하셨을 것이다. 당신 때문에 고생하는 착한 아들을 안타까워했을 어머니의 마음, 외할머니의 마음을 읽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외할머니는 17년 중풍 든 몸이었지만 여생을 그렇게라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착한 외삼촌 때문이었다. 외삼촌의 효성과 헌신은 뿌리같이 숨겨지고 설탕물같이 녹아진 것이었다. 외할머니께 문병 갈 때마다 외아재 외숙모를 더 잘 해 드려야 했다. 그런데 근시안적 사랑에 매여서 원시안적 사랑을 하지 못했다. 독서망양(讀書亡羊) 같이 외조모께 받은 사랑의 빚만 생각하다가, 중풍 외조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외삼촌과 외숙모에 대한 사랑의 빚은 생각하지 못했다.
외삼촌의 장사를 마치고 하산하는데 찬바람이 불었다. 외가 마을과 산야 모습은 그대로 인데, 외조모와 외삼촌이 없으니 숯불이 꺼진 화로와 같이 적막했다.
가족 친지의 죽음이 병가상사지만, 자격지심과 만시지탄으로 인해 슬픔이 더했다. 추운 산에 외삼촌의 묘를 만들고 귀가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외삼촌! 이곳저곳에 아직 하실 일이 많은데, 왜 그렇게 빨리 가셨어요?”
“외삼촌! 거동 불편할 때까지 살아서, 외삼촌을 휠체어에 태워 밀어드리게 해서, 무거운 제 마음을 가볍게 해 주고 가시지, 왜 그렇게 빨리 가셨어요?”
나도 모르게 울먹여졌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불쏘시게 되어 눈물이 글썽이었다. 먼저 가신 외조모에 대한 사랑의 빚까지 오버랩 되어, 외삼촌과 외조모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했던 날을 반추하니 글썽이는 눈물로 차를 운전할 수 있었다.
찬바람 부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50대 후반 남자가 따뜻했던 큰 사랑을 그리워하며, 오매불망하던 외할머니와 외삼촌을 부르며 한참 동안 흐느끼며 울었다.
베틀산과 베틀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 약속된 시간과 장소로 빨리 달려왔다. 그러다보니 가고 오는 길에 산재해 있는 많은 보화들을 지나쳤다. 이제는 천천히 달리며, 그 동안 주마간산으로 지나쳤던 명승지들을 보고 만지고 밟고자 한다.
해평을 지나는데 길옆에 “해은 문영 선생 묘소”란 낡은 간판이 보였다. 별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초라해도 별은 별이듯, 안내판이 허름해도 위인은 위인일 것이라 생각하며 문영(文英)은 붓대에 목화씨를 갖고 와서 의복 혁명을 가져온 문익점의 손자이며, 선산군수 격인 선산부사를 지냈다. 문영의 형 문래(文來)는 조부 문익점이 보급한 목화를 실로 뽑아내는 틀을 발명했는데, 문래 이름을 따서 물레로 명명되었다.
서울 문래동에 문래동원이 있고 그곳에 물레 조형물이 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이 5.16혁명을 단행할 당시 모습인 육군 소장 박정희 흉상이 있다. 박정희장군 당시 주소는 선산군 구미면이었으니, 문래공원은 견강부회하여 선산과 물레, 목화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문영은 조부 문익점선생이 보급한 목화와, 형 문래가 고안한 물레로 뽑아낸 실로 베(布)를 짤 수 있는 틀을 구상했지만 암담했다. 그러던 중 선산군 해평면 들판을 거닐다가 한 산을 보고, 그 모습을 본 따 베틀을 만들었다.
문영이 고안한 베틀로 베가 만들어졌고 그 베를 문영포(文英布)라 했고 후에는 무명으로 불렀다. 그리고 베틀 형태의 디자인 원형이 된 산을 베틀산이라 불렀다.
문영을 공부하면서 가까운 곳에 유서 깊은 베틀산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지만, 알고 나니 꿈결처럼 아련한 그 산에 가고 싶어 해평면으로 달렸다.
해평면에 가니 베틀산에 대한 안내판이 없었다. 한 주민에게 물으니 세 봉우리가 베틀 모습을 하였다. 흥분된 마음으로 더 들어가니 한 마을에 베틀산에 대한 이정표가 있고, 산 밑에 베틀산 등산 안내판이 있었다. 베틀의 이름을 가진 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이산가족을 만남같이 반가웠다.
베틀이란 귀한 이름의 산임에도 찾는 이가 적은 것 같다. 참된 스승은 없는 것이 아니라, 찾지 않아서 없음 같이, 베틀산은 홍보와 상업성을 초월한 참된 명산이어서 무명의 산으로 있었다. 등산길이 개발되지 않고 옛 자연모습 그대로 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 소 먹이러 다녔던 고향 산길 같아서 정겨웠고, 베틀로 베를 짜 옷을 해 입던 모습들이 오버랩 되었다.
베틀산은 외딴 곳에 있었고, 낮으면서도 높다 할 수 있는 해발 369m의 산이며, 등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수목이 울창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주위 산들이 낮아서, 정상에 오르니 구미의 넓은 들판과 공단,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멀리 높은 금오산이 한 눈에 보였다. 점입가경이었다. 산바람이 부니 마음에 구멍이 펑 뚫린 것같이 몸과 세포까지 시원하였다. 고향 산에서 즐겨 불렀던 동요를 불렀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바람은 좋은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베틀산은 구미시 해평면 금산리에 위치하며, 구미시와 군위군 경계선이 되었다. 산 정상에서 반대쪽을 보니 초등하굑 때까지 자랐던 고향 군위군 지역이 보였다. 베틀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추억이 쓰나미 같이 밀려왔다.
산 정상에 누웠으니, 산 위를 지나서 군위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에 실려 옛날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물속에 잉크 한 방울이 퍼지듯 어린 시절 기억들이 온 몸을 적시며 퍼져 나갔다. 묵은 사진첩에서 빛바랜 사진들을 보듯,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옛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베틀이란 이름의 산에 누웠으니, 베틀이란 말이 마중물이 되어 어릴 때 익히 들었던 베틀소리가 달각달각 들려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목화밭과 삼밭이 많았던 고향 마을 곳곳을 다니며 어릴 때 추억에 빠졌다. 그때 기억의 편린들이 떠올랐다. 시골 초가집 호롱불 아내서 밤이 맞도록, 발과 손과 온 몸을 움직이고 바디를 조절해서 북의 통로를 만들고, 북을 좌로 우로 이동시키면서 달각달각 베틀을 운전한다.
그러면서 날씰 씨실이 엮어져서 한필 두필 베를 뽑아내던 여인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베틀로 베를 짜던 그들은 근면 실했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현모양처이었다. 베틀 위에서 일하던 젊은 여인들 모습이 또렷한데, 숱한 세월이 흘러서 그들은 거개가 고인이 되었거나 늙으셨다. 베틀은 직기(織機) 발명과 섬유산업의 발달로 좌고우면의 겨를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니 베틀과 함께 힘든 시집살이를 하셨던 어머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잘 모셔야겠다.
현대사회에서 베틀이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하루가 멀다하며 변화되고 헤어지고 촐싹거리고 변덕이 심한 세상이니, 베틀의 정신은 더 절실하다. 베틀산은 한결같은 베틀의 모습으로 변치 않고 있으니, 그 산과 같이 베틀의 정신도 한결같아야 한다.
산을 내려와 해평과 고아 사이 낙동강을 이어주는 숭선대교를 건넜다. 베틀산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강 건너 산을 보니 아름다운 공주가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베틀산이 여인 모습 같다하여 처녀봉으로도 불렀다.
베틀과 여인이 함께 밤새도록 작업하여 토닥토닥 씨줄 날줄 엮고 엮어서 무명베를 토해냈다. 그래서 베틀은 곧 여인이었고, 베틀산은 여인 산이었다. 베틀산이 개발되지 않고 자연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면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오르내리며 성찰하고, 몸과 마음을 담금질하며 온고지신의 유익을 얻는 산이 되었으면 한다.
<당선소감>
만산홍엽의 만추를 즐기면서 대구로 차운전을 하고 있는데, “한국문인 신인문학상 당선 축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내가 집을 나온 뒤 우체부가 전해 준 등기우편을 보고, 집에 있던 아내가 그 소식을 확인하고 알려 준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을 이겨낸 오곡백과가 가들들판에 가득했고, 풍요로운 논밭에서 가을걷이에 여염 없는 농부들 모습이 정겨웠습니다. 그 가을 속에서 당선 소실을 들은 나도 마냥 기뻤습니다.
그냥 혼자서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이렇게 인정을 받으니 기뻤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모저모로 지도해 주신 선주문학회 회원님들게 감사드립니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 낮은 자세로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박태원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계명대학교 졸업
·선주문학회·한국문인협회 구미지부 회원
·제25, 26, 27회 구미문학예술공모전 수필 입상
·(전)구미여상 교사
·(현)선산순복음교회 목사
'등단작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남희 신인작품상-시조시학 2014 겨울호(권53호) (0) | 2017.05.06 |
|---|---|
| 1. 2011겨울 시조시학 신인작품상(조한일,최화수, 최미향) (1) | 2017.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