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강시조

이호우 산문(청마를 말한다, 첫설움, 춘한-개화4호(1995)

가산바위 2018. 11. 28. 19:43

 

이호우문학기념회, 開花(4, 1995)

 

다시 읽는 글/ 이호우의 글

 

청마를 말한다

-고 유치환 시인을 추모하며 / 이호우(시인)

 

 

청마형! 형이 죽다니! 형이 죽고 내가 고인으로의 형으로 말하게 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인간사요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시키려 해도 도시 납득이 가질 않는구료. 채 열흘도 되지 않았다. 서울을 다녀오겠다면서 나를 다방으로 찾아왔던 그날 형은 나이를 더할수록 젊어져만 가니 이거 어디 셈이나서 견딜 수가 있느냐고 농반 진반의 말을 했더니 그 건강하고 어진 얼굴로 그저 웃기만 하던 그 형이 불러도 울어도 속절없는 그 먼 타계의 사람이 되었다니 생각할수록 실감이 나질 않는 일이기만 하다. 청마를 말하라! 그절 어리둥절 하기만 무엇에 갑자기 얻어맞은 것만 같아 도무지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다. 청마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그러니까 8·15 광복후 두어달 지났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그때 청마형은 향리인 통영에서 그곳 문학 예술인들을 모아 문화협회를 만들고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이 땅에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내 누님과 누이동생이 모두 그때 통영에 있었으므로 그곳엘 들렀다가 처음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그 다음해 어느 봄날 부산에서 형을 만난 몇몇 문우들과 술자리를 가졌었다. 그때 조국의 장래에 대한 제나름의 전망과 청사진을 펼쳐 서로들 흥분들을 해댔는데 청마형은 앞날을 밝게만 내다보는 주장이었고 나는 아주 비관적인 정세판단을 하면서 꼬락스니들을 보니 이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란 말을 했기 때문에 형과 나는 심각한 격론을 하고 헤어졌다. 내가 대구로 돌아와서 곧 통영으로 돌아가는 선상에서 써붙인 청마형의 뜻밖의 엽서를 받았는데 돌아가는 선상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형()이 나(청마)보다 몇 배나 더 이나라 이겨레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에 이 엽서를 쓴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청마는 우리나라 대시인이요 또 누구보다도 뜨거운 애국자였으면서도 이렇게 겸허하고 무구할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이었다. 이를 계기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 다음부터 우리는 남달리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청마하면 제일먼저 부각되는 것이 시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질로나 양산으로나 초특급 시인이다. 10수권의 시집과 수권의 수상집을 내고도 아직 몇 권의 원고가 남아 있고 어느 달에나 잡지들에 청마의 글이 얼굴을 내지 않는 일이 없으리만큼 다작하는 시인으로 그는 우리가 소변이라도 보듯 그렇게 수월하게 시를 쓰는 줄로 안다면 그야말로 청마를 모른다는 말이 된다. 청마는 시를 쓰는 줄로 안다면 그야말로 청마를 모른다는 말이 된다. 청마는 시를 글을 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같다. 그가 술을 마시다가도 잡답을 하가가도 잠깐 딴전을 파듯 우두머니 있을 땐 문득 머릿속에 오가는 시상을 다듬고 있은 거라고 알면 틀림없다.

차나 배를 탈 때는 물론이요 정거장에서 여럿이 잠간 기차를 기다릴 때도 청마는 시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 편의 시상을 10년 이상 간직하고 다루어도 아직 시가 되지 않는 것이 많아서 때때로 그것을 되씹어 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청마의 시는 청마의 종교라하리만큼 몰입적이다. 요즘 마치 요술사가 손재주를 부리듯 시를 쓰는 친구들로는 그야말로 상상 부지의 자세이다.

다음으론 주호청마다. 술에 한해선느 청마의 뱃속은 그야말로 밑없는 독이다. 흔히들 술을 섞어 먹어선 안된다고들 하는데 청마는 청탁불문이다. 광복 이듬해 늦봄이었던가 거년에 작고한 마산의 김수돈 시인과 내 집에서 며칠 지난일이 있었는데 두분 모두 청탁불문의 무량주호로서 아침식전에 청주를 몇 되나 마시고 조반 후 청주가 떨어지니 소주를 통음한 다음 야외로 나가서는 또 주막에서 탁주를 무량경음하고도 밤에 들어와서는 다시 청주를 밤새워 마심으로 내가 질색을 한 일이 있었을 정도다. 그 다음은 혈압이 어떻다면서 절주를 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옛날엔 누구를 만나면 곧 술집으로 가자는 것이 일쑤였다. 왜 술만 마시러 가자느냐면 데데한 이야기가 하기 싫고 술을 마시는 것이 제일 마음편하다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하기 싫다는 말이 났으니 말인데 청마는 말주변이 없기로도 이름이었다. 글을 그렇게 잘 쓰면서 왜 말주변이 없을가본가 싶지만 사실 말주변이 없고 그러므로 말하기를 싫어한다. 어쩌다가 좀 이야기가 까다로워지면 그래 안다, 안다. 그만 술이나 먹자한다. 통영고녀에 재직해 있을 때 여학생들 사이에 <갈매기>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는데 청마 음석이 가만히 들어보면 <갈매기> 소리 같기도 하다. 청마가 말주변이 없고 또 얘기하기를 싫어하니까 여학생들이 서로 짜고는 수업시간에 자꾸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르니까 그 갈매기같은 음석으로 한 이야기가 참말 생각할수록 청마다운 이야기였다. 그 하나를 소개하면

 

내가 하루는 낮잠이 몹시 졸려 꿀밤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는데 잠결에 무엇이 따끔 얼굴을 때리기에 깜짝 놀라서 일어나 보니 꿀밤이 한 개 떨어지면서 얼굴을 때렸더군. 그래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신의 섭리와 은혜로움에 감사하고 그 오묘함에 경탄했어. 왜냐하면 큰 나무엔 큰 열매가 적은 나무엔 적은 열매가 열려야 옳을 것 같은데 우리가 그 그늘에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크낙한 꿀밤나무엔 나무에 비해 너무나 작은 열매를 열 개 해 주고 우리가 그 밑에서 놀거나 잘 수 없는 호박덩굴 같은데는 그렇게도 큰 열매가 열리게끔 한 하늘의 섭리가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만약에 큰 꿀밤나무에 호박같은 큰 열매가 열렸더라면 그 아래서 자던 내 머리통이 어찌 됐겠는가 말이다. 하늘은 만물을 이렇게 깊은 배려로써 마련했다는 말이다.

 

여학생들이 선생님 그게 다 이야기입니까하니 청마가 눈을 금뻑금뻑하다 허허 웃더라는 것이다. 허허웃고 들어버릴 이야기같지만 청마가 얼마나 자연의 섭리에 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을 읽어보면 알겠듯이 그는 시인에 앞서 한 철인이었다. 또한 청마는 뜨거운 애국자였다. 그의 절규는 그만두고라도 그의 분노야말로 그의 피나는 애국의 울부짖음이었다. 내 눈을 빼어 삼각산 위에 높이 걸라. 내 너의 망함을 끝내 보고야 말리라이 얼마나 뜨거운 애국의 절규인가? 이 시구 앞에 우리는 경건히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애린은 정말 눈물겨웁게 애틋했엇다. 청마는 봄철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싹트는 새싹을 보면 자신의 몸을 움츠리며 아파했고 일목일초에도 그는 하늘을 섬기는 마음가짐으로 대했었다. 중앙선 연변이 경치가 좋다면서 서울길을 곧잘 중앙선을 택하던 그가 영주역두에 쌓인 장작더미를 보고는 그것이 싫어서 중앙선 기차타기를 버렸고 자기방을 (연탄이 일반화되지 않고 온돌에 장작을 집히던 때) 일본식 돗자리로 대체하던 그였다. 얼핀 생각하긴 대수롭지 않은 일같지만 이런 행위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서울살기를 싫어했다. 그것은 서울의 차가운 생리도 싫었겠지만 유명행세가 싫어서였다. 그가 대구나 부산서 문화단체의 장자리를 앉게되는 것은 그가 장이 좋아서가 아니다. 청마만큼 속칭 감투를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 그것은 서울살기를 싫어하는 마음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장자리에 앉는가?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청마가 장자리에 앉도록 무한히 설득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무래기들의 소음들을 예방하는데 연유한 것이었다. 대구서 부산으로 가서 또 그가 문화단체의 장을 하였지만 그 역시 그곳의 소음을 막기 위해서 강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서로들 그 자리에 앉으려고 야단들을 하기 때문에 부득이 청마가 본의아니나마 강요되는 것이다. 청마가 그 자리에 앉아야만 서로 다투던 작자들이 다 물러나고 잠잠해짐으로써이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문단적 위치가 높다는 말도 되지만 그보다 그의 덕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봄바람같은 인품의 소요자였다. 그는 또 너무도 물욕이 없다. 자유당 시대에 이독재에 저항한다고 해서 직장을 물러나게 된 일이 있었는데 나오자 당장 식량걱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무욕한 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유족이라야 그 부인 한 분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청마로 미루어 보아 그가 가고난 이젠 그 유족의 생계의 길로 몹시 궁금키만 한 일이다.

나는 잠간 만약에 대통령이 륜화를 입었다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소정된 몇 년마다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만 청마같은 대시인과 인품은 한 세기에 한 분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만약에 청마가 이 나라에서가 아니고 구미에서 출생했더라면 그 호흡으로나 역량으로나 세계적인 시인이 됐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그는 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메마른 땅에 하늘이 베푸신 은혜로운 보배였다. 그가 가도, 무참히 가고 이 나라에선 그저그렇구나. 통곡도 다 못할 이 기막힌 상실에 너무나 무심한 표정이요, 덧없는 마음들이다. 청마! 너무나 할 말이 많음에 도리어 말을 할 수 없구나. 형의 그 맑은 눈망울은 영원히 살아남아 삼각산 높이 걸려서 이 나라 이 겨레를 지켜볼지라도 백골은 부디 형이 그처럼 열애하던 대지의 은혜로운 곳에 가려 묻혀서 날로 고와지길 빌 뿐이다.

형은 가고, 시와 추억만이 길이 남아 나를, 벗들을 울릴건가!

(1967217일자 대구일보에서)

 

 

 

 

 

 

 

 

 

가장 아끼고 싶은 그 작품

-첫 설 움

 

날로 落日을 보고

앉았던 少女가 있어

오늘도 지나는 길

쳐다보는

유리만 알알이 탈뿐

열려있지 앉았다

 

 

나에게 주어진 내가 가장 아끼는 作品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아낄만한 作品이라곤 없다. 다만 三十年동안을 마음속에 자리잡고 떠나지 않으려면서도 아직껏 作品을 이루지도 못하고 또한 참아 내버릴 수도 없는 마치 무슨 주어진 宿題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내가 스무한살의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三十一年이나 의 일이 된다. 그때 나는 日本 東京神田이란 마을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朝夕을 무슨 慈善協會에선가 經營하는 아주 값이 싼 食堂엘 다니며 사먹고 있었는데 그 食堂으로 가자면 駿河台라는 언덕빼기를 지나가야만 되기에 저녁땐 대개 廣野에서처럼 붉게 타는 都城落照를 멀리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날마다 다니면서도 恒常 視野가 트인 西편 쪽만 눈이 가기 일쑤였는데 하루는 무심히 로 무심히 當時 文化家宅들이 늘어선 反對편을 바라보았더니 少女二層의 열린 가에 앉아 멀리 落日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 浪漫的인 꿈이 짙던 때라였던지 퍽 印象的이었다.

그러나 그것뿐 별다른 생각이 있을 리 없었다. 다음날도 그 時刻쯤 그곳을 지나가게 되므로 쳐다 보았더니 전날처럼 그 少女落照를 안고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처음엔 意識的으로 쳐다보았지만 나중엔 나도 모르게 버릇이 되어 버린 듯 그곳을 지나게되면 절로 쳐다보게끔 되어벼렸고 그때마다 그 少女는 으레히 그 모양으로 앉아 있었고 나는 그저 한번 쳐다보곤 또 있군!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던 것이 하루는 언제나처럼 쳐다보는데 아아 은 닫혀 버리고 落日을 받은 유리들만 알알이 타고 있을 뿐 그 少女의 못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少女가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 똔느 그 생김이 어떤지조차도 모를뿐더러 그때까지 정말 女子란 친구로도 한 사람 사귀어 본 일이 없는 나였던지라 戀慕心情같은 것은 아예 있을 리 만무커늘 이 무슨 일인가? 駿河台의 언덕이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무너져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人生이 비로소 맛본 最初空虛! 눈을 감으면 아직도 나의 網膜에 그날의 알알이 타던 그 유릿장들의 붉은 빛깔이 찌지는듯 따갑다.

첫설움은 그때 적어둔 時調. 지금까지 三十年을 두고두고 그때의 心情表現해 보려고 애써왔으나 지금껏 영 되질 않는다. 平生 버리지 못하는 宿題, 앞으로 多幸히 이 宿題가 마련된다면 내 정말 눈감아 서럽지 않을 것 같다.

<19637월 어느 일간지에서>

 

春恨

 

은밀히 오솔길로 봄을 달래서 梅花송이들이 잔뜩 물기를 배고 微笑짓고 있다. 노고지리들도 이내 잠들을 깨어 하늘높이 봄길을 티우리라. 비록 넉넉지 못한 뜰이나마 나는 봄만은 남먼저 만져 보려고 손질을 하기로 했다.

겨울동안 얼어 붙었던 泉地에 물을 넣어 睡蓮을 담구고 목련, 장미, 모란, 연산홍, 수국, 라일락, 치자들의 북흙을 까주고, 溫室을 마련하지 못한 나의 가난의 소치를 억울하게도 저들이 짊어지고는 온돌방 긴긴 음달속에서 살이를 치룬 화분들을 양지바른 테라스에 옮겨 함뿍 물을 먹인 다음, 아직껏 썩어지지 못한 낙엽들이 지저분한 잔디밭을 말끔히 쓸고 보니, 마치 봄의 밀물이라도 밀려온 듯 온 집안이 갑자기 활짝 밝아지고 내 녹슬고 가난하던 마음속도 무슨 크리닝이나 한 것처럼 사뭇 가볍고, 長子나처럼 넉넉하여, 잠간 나이를 잊고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고 절로 휘파람이 나올듯한 그런 심정이 든다. 六十年來 처음이었다는 올겨울의 모진 추위에도 오직 地熱를 믿고 그 가늘한 뿌리들이 地心으로 파고들어 또다시 이 봄을 이렇게 피어나는 생명의 소망, 이 얼마나 뼈저린 愛隣인가. 나는 한아름 自然恩惠를 안고 앉아 아리아리 물기가 서린 먼 들을 바라본다.

넘어 아물아물 이어졌을 祖國山河! 아득한 太古의 새벽, 먼먼 祖上들의 횃불 높이든 그 푸픈 목숨들이 이 아름다운 땅에 비로소 자라집고 하늘에 祭祀하여 子孫들을 심으신지 五千年, 疆土가 허리를 짤리고, 이렇게도 脈脈히 피로 이어진 겨레들이 서로 등지고 살고 살아가야 함은 이 무슨 까닭이며 어이된 연유인가. 차라리 새와 짐승들은 막힘없이 오가고 꽃가루마저 바람결 따라 서로를 나돌고 있으련만 오직 이 血緣의 끼리 앞에서 차가운 얼음벽! 도리어 우리의 疆土歷史를 짓밟고 간 잊지못할 그 원수와는 한자리 웃음의 술잔을 나누는 이날에 아아 三八線이여! 피는 오히려 물보다는 연하다는 말인가.

 

× ×

두견이 운 자국가 피로 타는 진달래들

藥山 東台에도 이봄따리 피었으리

꽃가룬 나들연마는 촉보다 먼 한금

× ×

잊지 못할 원수와는 어느덧 한자리 술잔

종달이 봄을 티워 하늘도 물이 도는데

물보다 진하단 핏줄을 갈라 막은 얼음 벽

<19633대구대학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