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조 읽기>
선운사에서
민병도
때늦은 꽃맞이에 대웅전이 헛간이네
부처 보기 민망한 시자侍子마저 꽃구경 가고
절 마당 홀로 뒹구는 오금저린 풍경소리
무시로 생목 꺾어 투신하는 동백꽃 앞에
너도 나도 돌아앉아 왁자하던 말을 버리네
짓다 만 바람집 한 채 그마저도 버리네
비루한 과거 따윈 더 이상 묻지도 않네
저마다 집을 떠나 그리움에 닿을 동안
오던 길 돌려보내고 나도 잠시 헛간이네
-《가람시학》11호(202))
<김우연 해설> 이 작품의 핵심어는 ‘헛간’이다. 첫 수 초장에서 ‘헛간이네’가 마지막 수 종장에서 다시 반복되어 끝난다. 첫 수에서는 상춘객과 함께 시자도 동백꽃을 보러 나가고 대웅전은 ‘헛간’이 되었다. 텅 빈 ‘헛간’은 바로 가장 고요한 상태, 바로 부처만이 존재하는 ‘적멸’의 상태가 된다. 둘째 수에서는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 앞에 그만 모두가 말을 잃어버리는 상태가 된다. 생명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가 된다. 그래서 화자도 셋째 수에선 “오던 길 돌려보내고 나도 잠시 헛간이네”라고 조용히 말하고 있다. 화자 역시 적멸의 상태에 든다는 것이다. 「선운사에서」“생목 꺾어 투신하는 동백꽃”을 보면서 우주 생멸의 진여를 보게 된 것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은 평소에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우주의 실상을 끊임없이 관찰해 왔으며, 삼라만상이 불법이 아님이 없음을 노래한 것이다. 즉 동백꽃의 낙화를 통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은 것을 담담하게 읊고 있다. 영원이라고 착각하는 우리의 삶을 동백꽃 지는 것과 같은 찰나에 불과한 것임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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