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론
-생명의 환희
김우연
1. 자연은 불멸의 경전
김병래 시인의 시․시조집『자갈의 노래』(2016.10)에는 시조 50편, 자유시 58편을 싣고 있다. 오랫동안 수필을 써 왔으며, 자유시에도 창작은 물론 평론에도 조예가 깊다. 이제 시조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선 보인 50편을 대상으로 그의 시 세계를 일별하고자 한다.
시집 전체에는 생명의 환희로 충만하다. 그래서 행복으로 노래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삶에 대한 긍정심을 갖게 한다. 이런 시를 쓰게 된 배경에선 시집「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류도 자연의 일부일진대, 인간사의 모든 문제도 자연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연이야말로 오류나 왜곡이 없는 불멸의 교과서요 경전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듯이 그에게 자연은 ‘경전’이다. 자연은 가장 완벽한 것이고 진실한 것이기에 자연을 본받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은 행복을 얻을 것이요 사회를 평화를 얻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삶이란 끊임없는 타자와의 교섭이고, 시(詩)란 가장 좋은 교감과 소통의 언어”라고 「후기」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김병래 시인은 지나친 인위적인 물질문명보다는 자연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실제의 삶 속에서 나온 시들이기에 조용한 목소리 속에서 그 울려오는 생명의 환히는 그 울림이 크다.
2. 신비와 기적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누구는 도시로 가서 높다란 빌딩이 되고
더러는 수석이라 장식품도 된다지만
나는야, 내가 태어난 냇바닥이 좋아라
낮에는 햇빛 받고 밤에는 별빛 달빛
철 따라 눈비 오고 꽃향기와 새소리…
나는야, 이름이 없는 자갈이라서 좋아라
-「자갈의 노래」전문
이번 시집의 표제가 된 시이다. 자갈은 우리 인간의 대유로 쓰고 있다. ‘높은 빌딩’이나 ‘장식품’으로 쓰이는 자갈(돌, 수석)이란 고향을 떠난 것이요, 자연을 벗어나 그 본성을 잃은 것을 말한다. 자갈에게는 ‘냇바닥’에 있을 때 참된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 본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낮에는 햇빛 받고 밤에는 별빛 달빛/ 철 따라 눈비 오고 꽃향기와 새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 그 자체이다.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삶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삶이요 행복의 길이라는 것이다. ‘무소유’라는 말조차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실제 시인의 삶 자체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느니「자갈의 노래」는 김병래 시인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난 작품이다.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되고, 대도시로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수록 물질 숭배가 강해지고 있다. 성장 위주의 경제구조는 또한 양극화라는 빛과 어둠을 낳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은 단순한 현실도피도 아니고,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성직자의 외침보다도 몸소 실천하면서 행복의 길을 추구하는 삶을 보임으로써, 사회가 건강하고 다 함께 잘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자갈을 통하여 삶을 깨달은 작품으로「자갈의 말」이 있다. “물 마른 곡강천을 걷다가 깨닫는다/ 드러난 냇바닥의 무수한 돌멩이들이/ 하나도 똑같은 모양이 없다는 사실을”이라며 모두 모양이 다른 것을 “신비와 기적”이라고 하면서 “칠십 억 인구가 모두 제각각 다른 것이/ 바로 그 존재의 이유이자 의미란 걸/ 냇바닥 돌멩이들이 입을 모아 깨우친다”라고 하고 있다. 자신의 부여받은 생명과 모습 자체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생명의 외경 사상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으로 살아가지만 자신만의 모습으로 생명이 충만한 모습이야말로 생명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작은 것에도 신비의 눈길을 돌리게 된다.
3. 생명의 환희
골목길 담장 밑
흙먼지 쌓은 틈에
명주실 같은 겨울 햇살 간신히 부여잡고
꺼질 듯 가냘픈 숨결,
냉이 꽃이 피었다.
함부로 남 해치고
제 목숨도 내던지는
흉흉한 소문들이 황사 바람 부는 골목
냉이 꽃, 모질게 피어
삶의 뜻을 묻는다.
-「냉이 꽃」전문
‘냉이 꽃’을 소재를 한 시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생명의 강인함에 대한 노래들이 대분이다. 작은 꽃이 겨울을 견디고 피어나는 모습이 무한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요, 어려운 시절엔 봄나물로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게 한 나물이라서 친근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오늘날 시멘트로 흙을 다 덮어버리는 마당이나 도로, 담장 밑에서도 피어나는 냉이 꽃을 바라볼 때 어찌 생명의 신비와 강인함을 감동 없이 볼 것인가. 이런 소재를 가지고 자신의 안목으로 새로운 의미를 찾거나 새로운 표현으로 신선감을 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김병래 시인은 첫째 수에서는 “명주실 같은 겨울 햇살을 간신히 부여잡고”라며 참신한 표현을 하였으며, 냉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안타까움과 격려를 보내는 것에서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둘째 수에서는 물질숭배의 현실에서 ‘돈’으로 인하여 살인 사건들을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일어나기도 한다. 또 세계적으로는 테러가 끊임이 없다. 어떠한 이유로도 전쟁은 합리화 될 수 없으며 인류의 가장 큰 죄라고 토인비는 말 했지만 어떠한 명분으로도 물질 때문에 살인한다는 것은 가장 큰 죄일 것이다. 시인은 “냉이 꽃, 모질게 피어/ 삶의 뜻을 묻는다”며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느냐고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냉이 꽃’이라는 작은 소재를 가지고, 생명의 강인함이라는 보통의 시상을 넘어서서, 생명의 존중함과 이 사회의 물질숭배로 인한 살인이라는 병든 사회를 진단하고 비판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시적 형상화를 함으로써 행간에 숨은 많은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여 감동을 주고 있다. 평범한 소재이지만 시인의 깊은 사상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이런 시가 탄생한 것이다. 생명을 직접 언급한 것으로는 “생명이란 무얼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시시각각 그 자체로 목적이고 충만이라고/ 연약한 무 싹이 번쩍, 나를 들어 올린다”(「무 싹이 나왔다」세 수 중 셋째 수)라며 ‘생명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고 충만’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 활동의 핵심 동인은 생존이다.”라고 하였지만 어찌 인간뿐이겠는가. 모든 생명체는 위의 ‘무’처럼 그 자체가 목적이며 생명의 환희로 충만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도시의 아파트 놀이터는 좋은 시설이지만 늘 조용하다. 어릴 때부터 학원에 배우러 다니기 바쁘기 때문이다. 어릴 때일수록 자연과 접하면서 살아간다면 인성 교육이 저절로 될 것이다. 예전에는 ‘동치미’를 담그고 남은 무 밑동을 잘라내어서 파릇한 싹이 돋아나는 경험들을 해보았을 것이다. 요즘 애들도 집에서 체험이 가능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연과 친해서 생명의 신비를 체험한다는 것은 개인은 물론 사회를 위해서도 행복과 평화로 가는 길일 것이다.
4. 보릿고개 넘던 시절
함지박 가득히 쌀밥을 퍼담은 듯
보릿고개 언덕에 흐드러지게 피던 꽃,
전란이 휩쓴 초토에
나를 키운 건 허기였다
철없는 다섯 남매 밑 빠진 식욕 앞에
입맛이 없다며 술을 놓고 들일 나가던
울 엄마, 마알간 허기가
나를 키웠으므로
보릿고개 밀어낸 아스팔트 신작로에
득세한 밥의 논리가 아무리 횡행해도
허기 꽃, 환하게 피어
편승할 수 없었다
-「이팝 꽃」전문
한국전 중에서도 전투가 가장 치열한 4곳으로는 안강 지구와 포항 지구 전투를 들 수 있다. 김병래 시인의 고향인 흥해도 전란이 치열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일부를 빼놓고 초토가 되지 않은 곳이 있었겠는가마는 첫째 수에서 “전란이 휩쓴 초토에/ 나를 키운 건 허기였다”며 보릿고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이팝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요즘도 그 꽃을 보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을 떠올리게 된다.
둘째 수에서는 “철없는 다섯 남매 밑 빠진 식욕 앞에/ 입맛이 없다며 술을 놓고 들일 나가던/ 울 엄마”를 떠올린다. 석가는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였지만 배고픔의 고통은 그보다도 앞선 것이다.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기에 요즘은 배가 불러도 양극화니 어쩌니 하면서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하고 덜 가진 자는 더 빼앗기 위해서 혈안이 되고 있다. 진정으로 이 사회의 양극화의 그늘에서 진정 신음하고 있는 자들을 외면하면서 더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닌가 돌아봐야 할 때이다. 내가 더 빼앗기 위해서 목소리 높이기 전에 정말 생존에 허덕이는 약한 자가 없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은 그래서 셋째 수에서 “보릿고개 밀어낸 아스팔트 신작로에”라며 ‘아스팔트 신작로’는 보릿고개를 넘어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비유한 것이다. “득세한 밥의 논리가 아무리 횡횡해도”라며 물질적으로 더 가지기 위해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한다. “허기 꽃, 환하게 피어/ 편승할 수 없었다.”라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허기 꽃’이란 ‘이팝 꽃’을 말하는 것으로 보릿고개를 연상하는 매개체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팝 꽃’ 때문이라고 짐짓 말하고 있지만 물질추구의 삶이 지나치면 결국 인간성을 상실하고 불행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더불어 욕심을 덜 내면서 안분자족하는 삶을 택하는 것이다.
보릿고개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으로 요즘은 전설로 들릴 것 같은 현실이 있다. 작품을 통하여 소통하고 작품을 통하여 세대 간의 단절을 정신적으로 이어주게 하는 것이 문학일 것이다. 이런 시절을 노래한 작품으로 “노루 꼬리 겨울 해도/ 허기는 너무 길어// 곱은 손 불어가며/ 누이와 따먹었던// 초가집 처마에 달린/ 아이스케끼 얼음과자”(「고드름」전문)라며 고드름으로 허기를 달래는 추억도 노래하고 있다.
월사금 내지 못해 조회시간에 쫓겨가면
보리밭 김매는 엄마 먼발치로 보이는
냇가에 숨어 앉아서 버들피리나 만들었다
엄마 가슴 에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버들피리 불며 가는 시오리 보리밭길
말갛게 뜬 낮달처럼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버들피리」전문
국가전체가 가난하던 시절이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 불과 45달러였던 1인당 국민 소득이 1988년에는 100배에 가까운 4,435달러에까지 다다랐으니 세계사에서 그 일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지요. 2000년대에 이르면서 한국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김봉중,『이만큼 가까운 미국』,창비, 2016년. 278쪽.), 1964년에야 남한이 북한 경제의 절반이었으며, 1970년대 초에 통일벼가 생산되면서 북한과 비슷하게 된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 이론가였고 권력의 주역이었던 황장엽도 이제는 “남북한의 체제 경쟁은 끝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젊은이들은 “월사금 내지 못해 조회시간에 쫓겨가면”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때 쫓겨나던 학생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다는 학교나 선생님이나 국가를 먼저 욕하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 전체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시적 화자가 시인이라고 보이는데, 일하시는 엄마를 먼발치로 보면서 엄마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쫒겨온 모습을 감추는 모습이 애절하면서도 대견스럽다. 몰래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말갛게 뜬 낮달처럼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자식이 월사금을 못 내어서 쫓겨난 모습을 본다면 그 부모의 가슴에는 피멍울이 들 것이고 피눈물을 흘리실 것을 알았기에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는 개인의 시이면서 우리의 역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홍보자료 한 권 읽기보다 이 한 작품을 읽는 것이 더 큰 공감과 감동을 줄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는 어찌 이런 작품을 볼 수 있겠는가.
이런 보릿고개를 넘긴 시인이기에 아름다움 속에도 아픔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사꽃을 보더라도 아름다움에 먼저 그 아픔을 느끼고 있다.
가슴에
피멍울
복사꽃 다시 피어
아지랑이
먼 산기슭
온종일 서성이는
연분홍
잠옷 바람의
넋 놓은 여자 하나
-「복사꽃」전문
유미적(唯美的)인 작품이다. 그러나 “가슴에/ 피멍울”, “넋놓은 여자” 등으로 볼 때 단순한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찬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꽃가마 타고 시집가던 영자누나 생각나네.”(「영자 누나」에서)와 자유시「찔레꽃」에서 “찔레꽃 핀 길을 누나는 떠났네/ 동생들 남들처럼 공부시키겠다고(중략) 누나가 묻혀있는 뒷산 언덕에/ 해마다 오월이면 꿈결처럼 새하얗게/ 분 화장한 얼굴로 찔레꽃이 피어”와 관련해 보면 애절한 그리움이나 애절한 사연이 ‘복사꽃’을 통하여 ‘피멍울’을 떠올린 것이리라. 삶이란 슬픔만으로도 기쁨만으로도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5. 자족의 삶
어릴 때 전란도 겪고 또 보릿고개도 겪으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시인은 터득하였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의 풍요로움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 물질은 가질 만큼 가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에서도 오욕(五慾) 중에서 ‘재물’을 첫째로 들고 있듯이 물질추구는 인간에게 가장 큰 욕심이요 그것은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기 어려운 것이다.
(1)
곡강천 둑길 따라 꽃잔치 한창이다
바람 편에 사방으로 향기 전단 뿌리고
뻐꾸기 악사가 벌써 흥을 돋우고 있다
삶이란 한바탕 축제가 아니냐고
벌 나비 모여들어 무르익은 잔치 마당
눈부신 생의 축제에, 나도 나를 초청한다
-「찔레꽃 잔치」전문
(2)
길가에 코스모스
영접 나온 소녀들 같다
소들이나 돌보는
목부 일이 고작인데
아 글쎄, 나는 날마다
귀빈 대접 받는다니까
-「자족」전문
(1)에서는 “찔레꽃”이라는 정적인 소재를 가지고 ‘꽃잔치’, ‘향기 전단’, ‘뻐꾸기 악사’, ‘벌 나비’ 등의 동적인 내용으로 충만하게 한 작품이다. 둘째 수에서 “삶이란 한바탕 축제”라고 하고 있듯이 “무르익은 잔치 마당”의 흥겨움을 느끼며 끝내는 “눈부신 생의 축제에, 나도 나를 초청한다”며 자연에 합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력의 물결로 가득차고 출렁거리고 있어 눈부신 모습이다. 이런 자연에 묻혀 산다는 것이 행복하며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이 시집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1)이 봄이라면 (2)는 여름이다. 가을과 겨울을 노래한 작품도 있다. 일 년 내내 자연가 일체를 이루면서 충만한 생의 물결에 동참하면서 자족(自足)하면서 산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김병래 시인은 행복한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자족한 삶을 살아가기에 가을 단풍을 보면서 그 흥취에 자신도 단풍이 되고 싶어한다.
가을 볕에 불콰하게 산자락이 취했다
석양 하늘 지나가던 구름도 취했다
그 취기 따라가려고 술잔 거푸 기울인다
-「단풍」전문
초장에서 지상에서 단풍 든 모습을, 중장에서는 하늘의 구름도 석양에 붉게 타는 모습을 보면서, 종장에서는 화자도 자연과 일체를 이루고자 술을 마시며 얼굴이 붉어진다는 것이다. 단풍을 닮은 그 모습은 여유가 아니고 무엇인가.
6. 사회 현실
자식들 키워 보내고 홀로 남은 할머니와
손자들 제 발로 걸으면서 버려진 유모차
용도가 폐기된 처지, 서로 의지해 길을 간다.
-「귀로(歸路)」전문
시인의 눈길은 자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추구하기 때문에 주변에도 눈길을 돌린다.「귀로(歸路)」는 농촌이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의 모습이다. 지금의 80-90대 노인들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헌신해왔으며 노후 대책은 없는 분들이 많다. 자신도 어른들을 모시면서 자식들을 위해 가진 것 다 내놓았지만 도시화, 핵가족화로 자본주의의 불길 속에서 물질의 노예가 되고 부모마저 내팽개치는 것이 다반사의 현실이 되었다. 사회구조의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하지만 어떠한 것으로도 변명은 될 수 없는 것이다. 60-70대는 자식들에게 같이 살 생각도, 재산을 다 물려줄 생각도 없다는 것이 대세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물질 앞에선 인간성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젊은 사람은 아프다고 외친다. 물질의 노예가 되는 한 부모 자식 간에도 이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용도가 폐기된 처지, 서로 의지해 길을 간다.”는 시인의 담담한 말 속에는 촌철살인의 비판과 반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결국 시인이 해결하는 길은 욕심을 좀 버리는 길이라고 말하게 된다.
갈바람에 우수수 상수리 잎이 진다
덕지덕지 껴입은 욕망의 옷가지도
저렇듯 벗어버리고
빈 맘으로 서고 싶어라
누더기 한 벌로 평생을 산 고승이
육신마저 훌훌 벗고 이승을 떠났는데
미망을 못 벗은 인심
재를 뒤져 사리를 찾네
-「낙엽이 지듯이」전문
고승의 뜻을 모르고 사리를 뒤지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시인은 겨울 나무처럼 “저렇듯 벗어버리고/ 빈 맘으로 서고 싶”다고 하고 있다.
7. 조화와 순리의 길
억새에는 새가 있다
억새, 하고 부르면
바람 찬 들녘에 새들이 모여 섰다
바람의 유전자를 가져도
날지를 못하는 새
뿌리가 없어 바람은 억새를 키우고
날개가 없어 억새는 바람을 품는다
새처럼 깃털이 있다, 억새의 씨앗에는
바람이 방목하는 겨울 들녘의 억새들
마른 기침 서걱대며 모가지 길게 빼고
바람이 데려간 자식들 안부를 묻고 있다
-「바람과 억새」전문
이번 시집에서 가장 시적형상화가 뛰어난 작품으로 보인다. 진술과 묘사가 적절하기 때문이다. 시란 진술과 묘사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한 것인데 대체로 김병래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는 묘사보다는 진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이 작품은 진술과 묘사가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수에서는 ‘억새’를 ‘새’로 언어유희를 통하여 “바람의 유전자를 가져도/ 날지 못하는 새”라고 하였다. 둘째 수에서는 “뿌리가 없어 바람은 억새를 키우고/ 날개가 없어 억새는 바람을 품는다”라며 바람이 뿌리가 없어서 억새를 키우고 억새는 날기 위해서 바람을 품는다고 하였다. “바람”은 유동적, 무형적, 천상적, 순간적인 것을 상징하며 “뿌리”는 고정적, 유형적, 지상적, 지속적인 것을 상징한다. 이 둘은 “새처럼 깃털이 있다, 억새의 씨앗에는”이라며 변증법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화라는 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길이고, 자연의 순리이며 행복의 길이다. 셋째 수에서는 “바람이 데려간 자식들 안부를 묻고 있다.”라며 바람과 억새는 결국 자식을 떠나보낸 인간의 이야기임을 중의적으로 처리한 것이다. “모가지를 길게 빼고” 자식들을 기다리거나 안부를 알고자 하는 모습은 모든 부모의 심정일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여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순리와 섭리의 길임을 자연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사랑하여도 소유할 수 없고 놓는 것이 사랑이며 순리의 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움 속에도 아픔과 그리움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의 물결이 출렁거리면서도 그리움을 간직한 한 편의 절창이다.「자갈의 노래」에서 보여준 무위자연의 순리를 여기서는 더욱 이미지가 확장되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더욱 애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리움’이니 ‘사랑’이니 등의 관념어를 사용하지 않고 행간에 남김으로서 독자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주고 있다.
8. 성자의 길
이상으로「자갈의 노래」에 발표된 시조에는 김병래 시인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생명의 환희를 노래한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그것은 무소유를 지향하는 삶에서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적인 삶 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연과 일체가 되는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진정으로 순수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친 인위적인 것을 경계한다. 자연의 파괴는 결국 인간에게도 재앙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구 대부분이 대도시에 살고 있으며, 그것도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어 주택, 환경 등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농촌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을 노래한다면 현실과 거리가 먼 안빈낙도의 노래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봄, 가을은 물론이고 사계절 틈만 나면 자연을 찾아 떠나는 대도시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감성이란 자연을 통해서 순화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삭막한 도시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찾을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의 진정한 생명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자연을 소재로 인생의 의미를 해석하고 섭리를 깨닫고자 한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살면서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들은 많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번 김병래 시인의「자갈의 노래」는 바람이 나뭇잎 흔드는 소리처럼 작고 부드러울지라도 독자에게 다가오는 울림은 큰 것이다. 오늘날 TV 드라마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에서 ‘먹는 것’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르고 있다. 육체적인 건강이나 미감을 위한 음식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이번 시집은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는 감로수가 될 것이다. 대도시 위주의 시각만이 현대적인 것이라고만 우기는 것도 소유를 탐하는 작은 인간들의 자만의 소리일 것이다. 성자처럼 사유하면서 성자처럼 살아가는 김병래 시인의 시들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의 길이 무엇이며, 진정한 생명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생명의 환희가 넘치는 시들을 탄생시켜서 맑은 시의 강물이 멀리 멀리 흘러갈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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