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세계화의 길을 걷다
-최순향,『행복한 저녁』
김우연
1. 시조의 세계화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을 일으킨 지 약 100년이 되었다. 이제 한류 바람과 함께 시조의 세계화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하정(荷汀) 최순향의 제4시조집『행복한 저녁』(2020.6.)은 단시조 80편을 우형숙의 영역(英譯)과 함께 실어 세계화로 향한 길을 내딛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시조의 세계화의 첫 걸음과 마지막은 시조의 본령이라는 단시조가 그 핵심이 될 것이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정형시인 시조의 세계화가 되려면 우리말과 글로 표현하고 우리의 사상이 녹아야 진정한 세계화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시조를 번역해서라도 한국의 정형시가 700년 이상 이어온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행복한 저녁』에서는 시조의 생략과 응축, 비약과 참신한 비유, 정제와 절제미 등의 단시조의 미학을 잘 구현하고 있다. 또한 유한한 인생에서 누구나 큰 관심사인 사랑과 죽음, 그리고 여유로운 삶의 자세를 원숙한 경지에서 노래하고 있어 독자들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몇 작품을 통하여 이 시집에 나타난 단면을 엿보고자 한다.
2. 죽음의 승화
구순의 오라버니 옷이 자꾸 자랐다
기장도 길어지고 품도 점점 헐렁하고
마침내 옷 속에 숨으셨다 살구꽃이 곱던 날에
-「옷이 자랐다」
His Clothes Became Loosefitting
My elder bro, aged 90;
as he’s older, his clothes get looser.
Being longer than his body,
all his clothes are loosefitting.
Finally he hid in his clothes
when apricot trees were in blossom.
읽는 순간 독자들은 감동을 받게 된다. 그것은 먼저, 늙어서 몸이 줄어든 것을 옷이 자랐다고 표현한 데서 오는 충격일 것이다. 시인의 입장보다 사물의 편에서 묘사하거나, 시인이 보이는 것과 다르게 대상들을 바꾸어 묘사하는 것이 변형묘사의 특징이다. 흔히 ‘낯설게 하기’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 시편에서 이런 묘사들이 나타나고 있다. 가히 변형묘사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종장에 와서는 끝내 죽음을 맞이한 것도 “옷 속에 숨으셨다”라고 하였다. 추상적인 죽음을 변형해서 묘사함으로써 그 슬픈 감정을 절제하고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화자가 크게 슬픔을 드러내면 독자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어지고 슬픔은 반감되고 만다. 그런데 ‘살구꽃이 곱던 날에’라고 마무리하면서도 사후 세계에도 좋은 세상에 갔을 것이라 하며 화자는 스스로 위안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시조의 묘미를 최대한 살린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죽어도 끝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살아 있는 존재로 제의를 통하여 연결되어 왔다.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우리는 종교와 철학이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의 전통 사상에 녹아 있기 때문에 이런 평범한 내용들도 문화가 다른 서구인들에게는 참신하게 다가갈 것으로 보인다.
3. 슬픔의 승화
슬픔보다 더 높이, 높이 나는 새가 되다
까만 허공 향해 몸 던지는 비가 되다
꺾일 듯 휜 가슴으로 바람 안는 풀이 되다
-「슬픔이 차오를 때」
When Sorrow Comes Up
When I feel sad, I become a bird
that flies higher than my sorrow
I also become the rain
that throws itself into the black air.
Moreover, I become the grass
that lays a wind on its curved chest.
슬픔이 차오를 때 나는 ‘새’가 되고, ‘비’가 되고, ‘풀’이 된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새와 비와 풀의 나열로 보인다. 그러나 초장과 중장의 새와 비는 천상적인 것이라면 종장의 풀은 지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천상적인 것이 병렬이 되다가 종장에서는 비약이 되는 것이다. 천상과 지상의 2단 구성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살다보면 도저히 참기 어려운 슬픔을 맞이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 슬픔에 빠져버리기보다 “슬픔보다 더 높이, 높이 나는 새가 되다”는 것은 그 슬픔은 유한한 인간이기에 누구한테나 오는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혼자서 또는 가까운 이에게 말로, 또는 말없이 그 슬픔을 풀게 된다. 종교인은 기도로써, 혹은 깊은 명상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그리하여 종장에서는 “꺾일 듯 휜 가슴”이지만 쓰러질 듯한 슬픔을 은유한 것이다. “바람을 안는 풀이 되다”라며 슬픔의 시련이지만 그 슬픔을 간직하고 푸르게 자라는 풀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이기철은 “시는 특수한 감정의 무늬를 가질 때도 간혹 있기는 하나 그보다는 보편적인 감정과 정서를 노래할 때 오히려 좋은 시 혹은 감동적인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참인 것이다.”라는 말처럼 보편적인 정서인 슬픔을 ‘새’와 ‘비’와 ‘풀’로 승화시킨 능력은 참으로 놀랍다. 영역시에서는 종장의 “꺾일 듯 휜 가슴”은 영역시의 마지막에 “curved chest”에 놓인 것도 유심히 볼 일이다. 종장의 첫 음보를 더욱이 또는 게다가의 번역어인 부사 “moreover”를 사용함으로써 시조의 문맥도 살리고, 종장의 첫 음보의 특징도 살려낸 것은 역자의 고심이 보인다. 우리 시조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시조 번역인들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번역자들에 의해서 시조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등단 과정에서 시조 번역자들을 별도로 뽑아서 그 중요성을 시조시인들이 앞장서서 그들의 노고와 중요성을 칭송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단체적으로는 번역시들이 나오기는 하나, 개인시집에서도 이런 시집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나온다면 시조의 세계화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4. 사랑의 승화
봄비야 첫눈이야 눈물겨운 기다림이야
첫 번 눈길이라 벼랑 끝 황홀이야
한 줄기 바람결에도 가슴 뛰는 형벌이야
-「그대는」
You Are
You’re like spring rain or the first snow;
you’re like waiting so long in tears.
You’re like first glance from beloved ones;
you’re like a thrill on a steep cliff.
You must be a thrilling punishment
even in a puff of fresh wind.
이 시집에는 사랑을 제재로 한 작품들이 여러 편들이다. 공통점은 이루지 못하는 짝사랑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 애절하며 그리움의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그대는」에서는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을 다룬 듯하다. 사랑을 ‘봄비’, ‘첫눈’, ‘첫 번 눈길’처럼 신선하고 가슴 설레게 하는 심상에서 이루지 못한 아픔을 ‘형벌’이라고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형벌’이란 독자에게는 화자가 황홀감에 젖어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런 사랑은「돌石꽃」에서도 “눈 감고 흘러가는 강물이면 좋았을 걸/ 거침없이 제 길 찾는 바람이면 더욱 좋고/ 바위는 천 년을 두고 네게, 꽃이 되고 싶었다”라며 ‘꽃 모양이 있는 바위’의 ‘돌꽃’는 결국 화자의 객관적 상관물이며 그리움의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바위란 영원의 상징이 아닌가. 영원히 그대의 꽃이 되고 싶었음을 노래하고 있으나,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 더욱 애절함이 커고 여운이 남는다.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은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5. 인생의 달관
사랑할 것들이 이렇게 많은 것을
비켜서 호접란이 갸웃 고개 숙이고
고요가 그 옆에 서서 나를 보고 웃고 있네
-「이제야 보이네」
Now I See
Now I see there’re lots of things
that I should love with my whole heart.
Some orchids, tropical orchids,
stand aside, tilting their heads.
Beside them, there is serenity
giving me a big smile.
모파상의 장편소설「여자의 일생」에서는 주인공 잔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듯이 희로애락의 온갖 감정으로 살아가는 곳이 우리들의 삶이다. 그러나 좀 더 크게 깨닫고 보면 이 세상이 천국 또는 극락이라고 한다. 이번 시집에서도 사랑, 슬픔, 죽음 등 다양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결국 인생을 달관하여 초장에서 “사랑할 것들이 이렇게 많은 것을”이라며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호접란’은 변화한 화자를 “갸웃 고개를 숙이고”라며 반신반의 하는 모습 보이고 있다. ‘호접란’은 화자의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을 제유한 것이다. 그러나 종장에서 “고요가 그 옆에 서서 나를 보고 웃고 있네”라며 ‘고요’는 화자의 ‘참자아’이며 ‘웃고 있네’라는 것은 기쁨에 차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중장과 종장은 변형묘사이다.
이런 인생의 깨달음의 경지에 오기까지는「그림자를 눕혀 놓고」종장에서 “이 하루 고단한 넋이 들여다 본 거푸집”이라며 자아성찰을 하였으며,「허공을 그리다」종장에서 “또 한 잎 낙엽 지는 소리 내 가슴에 먼 우레”라고 하며 떨어지는 한 잎에서도 우주의 비밀을 품고 있음을 보았으며,「어디로 가늘 걸까」에서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질 목숨이면/ 내 안의 이 그리움 어디로 가는 걸까/ 이슬이 스러진 자라 바람이 지나간다”라며 결국 우리의 목숨은 영은 하늘로 돌아가고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며, 이승의 시간은 이슬과 바람처럼 찰나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종교적인 깨달음을 체득한 것 같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통한 이별도 여러 편에서 보이고 있다. 이리하여 이 시집의 표제시 「행복한 저녁」에서는 “사람보다 피곤이 먼저 와 앉습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잔치국구 한 그릇/ 육십 촉 전구 아래서 제일 환한 얼굴입니다”라며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 고단하지만 ‘막걸리’와 ‘잔치국수’의 소박한 음식으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행복한 저녁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섣달 그믐밤」에서는 지난날의 남루를 부끄러워 하면서 “하나님, 당신만 아소서 아니 당신만 모르소서”라며 신앙인으로서의 자아성찰을 진지하게 하게 된다. 이렇게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아봄으로써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그가 사는 집」에서는 “넓은 유리창엔 하늘이 가득하고/ 텅 빈 마루에는 햇살이 놀고 있네/ 함지에 수련 몇 송이 주인 대신 웃고 있고”라며 시인이 추구하는 무소유의 삶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가 사는 집’이란 시인이 추구하는 삶일 것이다.
6. 나오며
이상으로 하정(荷汀) 최순향의 시조집『행복한 저녁』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응축, 비약 등으로 단시조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 있으며, 살아가면서 사랑과 죽음, 슬픔 등의 감정을 변형묘사를 통하여 참신하게 표현함으로써 현대시조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우형숙의 영역시조를 통하여 세계화의 길로 내딛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시조의 세계화를 개인적으로 몸소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크게 박수를 보낸다. 달관한 삶의 경지에서 나온 시편들은 화자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생각할 공간을 주고 있어 울림이 더욱 크다.앞으로도 “불멸의 말씀 한 마디 품을 수만 있”(「파도」종장)기를 바라며, “내 안의 빼꼭한 숲속 자유하는 새의 노래”(「숲, 그 눈부심」)를 맘껏 부르시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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