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자료

피렌체 대성당 박물관

가산바위 2021. 3. 28. 15:17

찰스 핸디 지음/ 이종인 옮김, 코끼리와 벼룩, 생각의 나무, 2009 개정판 4(초판 2001,12)

 

나는 개인적으로 재해석을 이렇게 해본다. 내가 신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것 가령 ‘선(善)’과 ‘진(眞)’을 발견하는 것이다. 신은 우리들 내부에 있다, 라는 사상을 나는 이렇게 재해석한다. 우리의 내부에는 악도 있지만 선도 있다.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내부는 물론이고 남들의 내부에서 그 선을 현양하고 악을 억제하는 것이다. 나는 인생이 내 안에 있는 진리를 찾아가는 지속적인 추구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나의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나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어떤 존재를 실현하는 것이다.(362쪽)

 

 

이탈리아에 처음 갔을 대 나는 초기 르네상스의 미술과 건축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중략)

피렌체의 대성당 박물관에 있는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 나무 조각>을 한 번 보라. 또는 같은 장소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라. 그 조각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라 죽은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시각적 표현을 보았다. 그것은 신의 거부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통하여 역사(役事)한다는 분명한 예시였다. 신이 인간 내부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는 사상은 많은 종교에 공통되는 것이지만, 나는 이 조각에 그 사상이 절묘하게 구현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이론적 논증보다는 한결 직접적이고 한결 강렬한 것이었다. 그 강력한 이미지의 깊은 의미는 그후 늘 나와 함께 있었다. 이제 더 편안한 마음으로 내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내 유년 시절에 부모님이 믿던 그 신과는 약간 다른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메시지는 동일한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 내부에 있는 검증되지 않은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해야 한다. 당신은 그런 의무를 회피할 수 없다. 그럭저럭 살아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놓았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내부에 있는 가장 위대한 ‘그것’이다.”

피치노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불렀다.그의 모든 저작은 그 위대한 자아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282283)

 

우리는 주변 환경에 대하여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본다. 우리는 우리의 견해와 편견을 지지해 주는 신문을 읽고, 우리처럼 생긴 사람과 일하고 사귀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도시의 반대쪽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으며 지하철 속에서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를 봄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 뿐이다. 내가 회사의 구속을 완전히 털어버리기 전까지 나의 세계관이라는 것은 대체로 무조건적인 판박이식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나 공장 출근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286)

집안일의 보상은 감사와 사랑(하지만 겉으로 표현되지 않는), 가정의 창조와 유지, 소속감을 주는 곳, 혼란스러운 세계 속의 아늑한 섬 등의 형태로 다가온다. 이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상이지만,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290쪽)

 

정부는 우리 자신의 약점, 우리 자신과 이웃을 돌보지 못하는 약점을 시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344)

 

과거에 우리는 이런저런 공동체가 우리의 부담을 대신 져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직장, 가정, 이웃과 같은 공동체는 우리의 목전에서 변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그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책임이 없는 권리와 쾌락만을 추구하고 있다. 나도 남들과 다를 바가 없어서 도시의 익명성을 좋아한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무도 부과하지 않기 때문이다.(344)

 

나도 살고 너도 사는생활방식

 

경쟁적 개인주의 대신에 다양한 개인주의의 시대가 돌 수도 있다. 우리는 남들보다 뛰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는 다르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승자독식의 형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승자가 되는 그런 방식이다. 우리는 스스로 승자의 개념을 재정립할 수 있다. 그러려면 다양성은 인종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생활 스타일의 다양성이 되어야 한다.(350)

 

어쩌면 문제는 오늘날 신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철학자 겸 시인인 카를로스 에퍼슨(Carlos Efferson)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가 작성한 신들의 리스트 수위에는 아직도 성서와 성스러운 의식의 신들이 올라 있다. 하지만 이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늘날 더 중요하게 된 것은 권력의 신, 자부심의 신, 일의 신, ()의 신이다. 이런 신들은 인간을 합치시키기보다는 분열시킨다. 그 외에 명예의 신과 패션의 신도 있다. 이러 에퍼슨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늘 자기의 필요를 자기의 중심에다 놓고 있고, 자신의 생활방식이야말로 인생이 영위되어야 할 방식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보라고 생각한다.” 또한 부족(部族)의 신도 있다. 이 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잘못이 저질러졌으므로, “그들의 심장을 작동시키는 연료는 그들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신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나는 카를로스 에퍼슨이 서술하는 세계를 직접 목도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런 다양한 신들이 오늘날 하나의 종교적 가치로 통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복잡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고대 그리스인과 비슷하게 되었다. 모든 변덕과 계절을 관장하는 신, 서로 싸우는 신, 사람들을 합치시키기 보다는 분열시키는 신 등등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 종교는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다는 말인가?

사실대로 말해 보자면 종교는 사랑이 아니라 공포를 통해 사회를 결속시킨다. 종교는 계율을 정하고 기준을 내리고 징벌을 고안한다. 기독교의 경우, 그런 징벌은 이단재판소의 테러에서 성모 찬송기도를 외우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종교에는 권장 사항과 금기 사항과 징벌 사항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전제조건을 믿어주는 한, 종교는 돌아가고 또 사회는 그에 순응한다.

그러나 현대의 세속 사회에서는 그런 전제조건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략)그리하여 정부가 그 빈자리에 들어서서, 좋은 인생의 본질, 가정 구성 요소,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 흡연 가능 여부, 섹스를 할 수 있는 연령, 다른 종교, 종교, 젠더의 사람들에게 처신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간섭하는 정부의 등장을 거부하지만 그 자리에 대신 갖다놓을 대체물은 없는 상태이며 일련의 규범과 기준을 마련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359360)

우리 개개인인 해야 할 일은 자기 판단에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인생관에 입각하여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364쪽)

 

중국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행복은 할 일이 있는 것, 바라볼 희망이 있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이 세 가지이다.”

나는 그 행복을 계획하고 있다.(365). 책 마지막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