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자료

안동문학 43호 에서(장두강 수필)

가산바위 2021. 4. 20. 12:29

안동문학 43(2020)

 

장두강 수필, 능인, 유일한 기념사업

 

능인能仁 스님은 의상대사의 제1대 제자다. 의상의 10대 제자로 오진, 지통, 표훈, 진정, 도융, 양원, 상원, 능인, 도신, 진장 스님이 있었으며 그중 한 사람이다. 능인은 의상, 원효와 동시대의 인물이지만 생몰년은 미상이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곧바로 서라벌에 들어가지 못하고 낙산사(671), 부석사(676) 등 신라 외곽에서 포교 활동을 하면서 힘을 비축하고 있을 때 능인을 제자로 맞았으리라 짐작된다. 봉황산 부석사와 학가산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다. 학가산과 능인과의 관련은 매우 깊다. 나는 안동지역에서 불교다운 불교를 전파한 사람이 능인으로부터 라고 생각한다. 학가산 정상에 있는 능인굴과 석탑리의 석탑 그리고 천등산의 천등굴과 개목사, 봉정사의 창건에 얽힌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설과 역사를 넘나드는 살아있는 이야기다. 으스스한 갈바람이 지나면서 옛사람 능인 스님이 더욱 그립니다. 그럴 때면 하얀 종이를 폋리고는 스님의 얼굴을 그려 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래기도 했다. 학가산 앞산인 천등산 남쪽 기슭에 처년고찰 봉정사가 있다. 오래전부터 봉정사는 신라 신문왕 2(682)에 의상대사가 청건했다고 알려져 왔지만, 1972년 극락전 해체 수리복원 때 극락전에서 발견된 1625년 극락전 상량문과 1726년 작성된 천등산봉정사기 그리고 1809년 양법당중수기에 의하면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하였다는 명문이 나왔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봉정사의 창건자는 능인이 확실시되어 그 후 봉정사 창건주를 능인으로 공식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높은 학가산에서 보면 종정사는 지척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능인은 학가산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서 수행과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학가산을 불교 성지로 개척한 개산조 인물이었다.(272273)

 

장두강 수필, 종이 봉황 날린 뜻

 

학가산은 안동의 산이다. 그도 안동의 대표 산이라면 안동 사람으로서 당연히 학가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일찍 학가산에 관련된 전설을 조사한 일이 있었다. 당시 35편의 전설을 수집하여 정이하여 두었다. 정리하다가 보니 매우 흥부로운 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전설은 보통 하나의 주인공으로 시작하여 단편적인 스토리로 끝맺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롭다는 전설은 연동형 전설이었다. 훌륭한 작가가 쓴 명문의 수필 속에는 분명히 기승전결이 숨어 있듯이 이 전설도 단계별 기승전결의 형식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 수집할 때는 낱낱의 개별 얘기로 수집되었는데, 정리단계에서 이것을 알아차리고는 마치 금광을 찾던 광부가 금맥 노두를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막 뛰었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종이 봉황[鳳凰 혹은 ]을 만들어 날렸다. 봉황은 높이 날아 부석사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학가산에 도착하였다. 종이 봉황이 처음으로 학가산에 내려앉는 곳은 학가산의 북록 음지쪽이었다. 그곳은 햇볕이 잘 들지 안흔 깊은 골짜기로 인적이라곤 하나 없는 곳이지만 발밑에는 맑은 내성천이 흐르고 멀리 소백산이 마주 보이는 매우 한적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봉황은 애써 둥지를 짓고 여러 개의 알을 낳았다. 봉황은 본능적으로 알을 지키며 먹지도 못하고 알을 품었다. 이웃한 범굴에 살고 있던 호랑이가 목숨을 위협해도 물러서지 않고 둥지를 지켰다. 달포가 지나 부화 시기가 다가왔다. 알 속의 움직임을 감지한 어미는 줄탁동시의 노력으로 껍질이 깨지면서 병아리들이 태어났다. 고난의 시간의 지나 한 알의 허실 없이 부화에 성공하였다. 후인들이 이 은밀하고 조용한 자리에 절을 지어 영봉사詠鳳寺라 불렀다. 영봉사는 금계포란형 길지의 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알을 깐 봉황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날짐승은 원래 알 깐 자리에서 살지 않으며 애써 지은 둥지를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는 습성 있단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영봉사의 사세는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고 전한다.

 

봉황은 병아리를 데리고 더 넓고 따뜻한 곳을 찾기 위하여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봉황은 학가산 동쪽 기슭 금계산 자락까지 날아가서 내려앉았다. 이곳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으로 숲 이 울창하여 병아리 기르기에 아주 안전한 서식지를 찾게 되었다. 그곳에서 새끼를 길렀다. 새끼들은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중병아리가 되었다. 먹어도 더 필요하고 새끼들이 마음대로 쏘다니며 놀아야 할 넓은 장소도 필요했다. 어미봉은 또다시 이사 갈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봉황 식구는 소리소문없이 이 터전을 버리고 떠났다. 사람들은 그래도 봉황이 깃들어 새끼를 키워낸 뜻 있는 자리라 그리워하였다. 이곳에 절을 짓고 봉이 새끼를 길렀다 하여 봉서사鳳棲寺라 이름하였다. 봉서사는 옹천마을 위쪽에 영주시 지곡마을 접경에 있다.

봉서사의 봉황이 오래 살지는 못하고 떠난 까닭은 좀 더 넓은 세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봉황 가족은 산세가 맑고 부드러우며 온 산이 울창한 솔숲으로, 아늑하면서도 주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천등산 남쪽의 따뜻한 기슭으로 갔다. 이곳 위치는 학사산의 바로 남쪽 천등산 중턱으로 누가 봐도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봉황은 오래오래 머무르며 행복하게 살 자리를 찾고 있었다. 언제나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걱정 하나 없는 곳 즉 샹글리라를 찾은 모양이다. 봉황의 식구들은 이곳에 내려앉아 오랜 세월 머물러 살았다. 봉황이 머문 곳이 바로 오늘날 봉정사鳳停寺라는 절이다. 사찰 이름에 머무를 정자를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무엇이 머물렀단 말인가? 물론 봉황을 이르는 말이다. 그 봉황이 오래 머물렀기에 사세가 번창하고 세상에 널리 이름을 얻었다며 민초들은 믿고 있다.

 

봉황은 예로부터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상상의 새다. 기린, 거북, 용과 함께 사령四靈 또는 사서四瑞로 불린다. 수컷은 ’, 암컷은 이다. 성스러운 천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징조로 나타난다고 한다. 앞 반몸은 기린, 뒤 반몸은 사슴이다. 목은 뱀이요, 꼬리는 물고기, 등은 거북, 턱은 제비이며 부리는 닭을 닮았다. 오색 무늬 깃털을 가졌고 소리는 오음에 맞고 우렁차다. 늘 오동나무에 깃들어 살며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영천靈泉의 물을 마시는 새다. 이런 영생의 능력을 지닌 듯한 봉황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죽음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죽을 수는 없다. 죽을 자리도 신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봉정사에 정착하였던 봉황은 마지막으로 하늘 높이 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백두대간이 유장하게 흐르는 예천 땅의 깊은 산골짜기까지 날아갔다. 봉황은 그곳에서 마지막 날숨을 토하듯 크게 한번 울고는 생을 마감했다. 그곳에 절을 짓고 명봉사鳴鳳寺라 했다. 명봉사는 875년에 두운杜雲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당시 산속에서 봉황이 울어서 명봉사로 명명하였다는 설화가 남아 있다. 명봉사에는 실제로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실이 봉안된 것으로 보아 결코 가벼운 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의상이 날린 종이 봉황이 영봉사-봉서사-봉정사-명봉사로 이어지는 절의 창건 순서와 모두 봉자를 돌림으로 하는 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생각할수록 신비롭고 오묘하다. 전설 속 봉황은 학가산을 중심에 두고 북에서 출발하여 동쪽과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진행한 비행경로는 치밀함과 완벽성을 갖춘 시리즈형 전설이었다. 따라서 네 개의 사찰은 학가선 전설에서 의미 있고 중요한 절이다. 학사산은 역시 종요와 문화를 품은 안동의 대표 산이었다. (전문 옮김)

 

 

 

까보다로카

 

권혁모

 

황혼은 눈이 부셔라

흩날리는 물보라여

 

어쩌면 겨자 냄새 서풍은 불어쌓고

 

첫사랑

헤어진 꿈을

몸부림치는 뭍과 바다

 

끝은 종점이 아니라 닷시 쓰는 필묵 연서

무 자르듯 잘라놓은 아득한 절벽 끝에서

 

상처로

남은 해안선

물보라로 지운다.

-(전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