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자료

청구야담(하)에서

가산바위 2021. 9. 25. 19:49

이강옥 옮김, 청구야담(), 문학동네,2019.8.6.

 

 

1. 부채 하나를 아끼는 선비의 인색함

 

먼 시골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인색하다고 고을에 소문이 났다.

어느 초여름, 선비가 짠 조기 한 마리를 샀다. 조기를 대들보 위에 걸어놓고는 끼니마다 집안사람들에게 딱 한 번만 쳐다보고 밥을 먹게 했다.

고기맛 참 좋다! 맨밥 먹는 것보다 훨씬 낫네!”

그 어린 자식이 아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밥을 먹으면서 조기를 두 번이나 보았다. 아비가 꾸짖었다.

짜지 않느냐? 무엇 때문에 두 번이나 보느냐?”

그뒤로 집안사람들은 조기를 감히 두 번 올려다보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이 부채 하나를 주자, 선비는 자식을 다 불러서 부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채는 정말로 좋은 물건이야. 몇 년이나 갈까?”

아들 중 큰아들만 아버지를 어느 정도 닮았을 뿐 다른 아들들은 아버지와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둘째 아들이 먼저 대답했다.

부채의 수명은 일 년이면 충분하지요.”

셋째 아들에게 물으니 둘째 아들과 똑같이 대답했다. 선비는 문득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집을 망하게 할 놈이 바로 네놈들이다!”

큰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한번 말해보아라!”

큰아들이 앞으로 나와 꿇어앉으며 말했다.

동생들은 아직 어리기에 아껴 쓰는 도리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부채는 이십 년은 부칠 수 있지요.”

선비가 그제야 화난 기색을 누그러뜨리고 조금 칭찬까지 하며 말했다.

그 도리는 어떤 것인고?”

큰아들이 대꾸했다.

부채는 펴고 접을 때 조금씩 상할 수밖에 없지요. 만약 부채를 펴서 기둥에 고정시켜 두는 대신 머리를 흔들면 어찌 이십 년만 가겠습니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한다.

! 저 부잣집 자제들이 사치를 지극히 숭상하고 주색에 빠져 선조의 업을 망치고는 하는데, 이는 차라리 그보다 낫지 않은가? 그러나 사치와 인색 둘 다 정도를 잃기는 한가지라, 중도의 행실을 생각해 행동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2. 이항복이 위기에 처하자 선조 이제현이 꿈에 나타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공이 태너난 지 돌도 안 되었을 때였다. 유모가 이항복을 안고 우물가에 갔는데 아이를 땅바닥에 내려두고 앉아서 졸고 있었다. 이항복이 기어다니다 우물 안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유모의 꿈에 훤칠하게 키가 큰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팡이로 유모의 정강이를 때리며 말했다.

어찌 아이를 돌보지 않는고!”

유모가 너무 아파 놀라 깨어나서 달려가 아이를 구했다. 정강이가 정말로 며칠 동안이나 아팠으므로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그뒤 집안의 제사가 있어 방계 조상인 익제 이제현 공의 영정을 사당에 걸어두었다. 유모가 영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전에 제 정강이를 때리신 분이 바로 이 영정 속 모습과 똑같습니다.”

익제는 전대 왕조의 어진 재상이다. 영명한 영()이 삼사백 년 뒤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가 자손이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 때 능히 구해주었다. 이것이 어찌 익재의 신령한 덕분이기만 하겠는가. 백사 또한 보통 아이와 달라 능히 신명의 도움을 불러온 것이다.

 

 

 

3. 병을 낫게 해 준 정상사에게 술이 저절로 생겨나는 주석을 주다

 

자하동(紫霞洞) () 상사는 고상한 사람이다. 일찍부터 기이한 재주를 가졌으니 거문고와 바둑, 글씨와 그림, 의술과 점술 등 꿰뚫어 알지 못하는 분야가 없었다. 술을 잘 마셨고 기묘한 꾀를 좋아했지만 집이 가난해 조용히 방에서 책 읽기만 즐길 따름이었다. (중략)--배를 타고 백화국(白華國)에 가서 백화국 왕의 병을 고침-

 

태자가 말했다.

선생의 은혜는 하해 같아 헤아릴 수 없어 갚을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상사가 다시 하루이틀 더 머무니 송별의 자리를 마련하고 보내주었다. 태자가 주석(酒石)을 이별 증표로 주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이걸 맏으시겠습니까? 이것은 바다 가운데서 난 지극한 보물이지요. 전날 선생께서 마신 술은 모두 이 돌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이것을 그릇에 넣어두면 좋은 술이 저절로 생겨나 천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답니다.”

정상사는 술을 매우 좋아하는지라 이렇게 대답했다.

떠나는 사람에게 예물을 주는 것은 옛날의 예의이니 어찌 마다하겠소?”

마침내 태자가 은합에 주석을 넣어 바쳤다.

며칠 뒤 정상사가 출발하니 풍경은 올 때와 똑같았다. 양화도에 도착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사람들은 보름 동안이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사람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고 비밀에 부치게 했다. 정상사는 주석으로 평생을 즐기다 생을 마무리했다 한다.

 

 

 

4. 개가한 여인이 책 읽는 것을 듣고 친정으로 돌아가다

 

동협(東峽 경기도 동쪽 지방과 강원도 지방)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남편의 상을 당하고 나서 개가했다. 부부가 서울로 이사해 산업을 힘써 경영하니 가계가 매우 부유해졌다. 또 아들 둘을 낳았으니 모두 준수하고 총명했다.

아홉 살 된 큰 아이가 서당 다니는 데 열중하여 공부하는데, 통감초권(初券)을 읽고 와서 집에서 익히다가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이르렀다. 그러자 옆에서 바르질을 하고 있던 어미가 바느질을 멈추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아들이 예의 바르게 그 뜻을 일러주자, 어미는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닫고 다음날 남편에게 이별을 고했다. 남편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일찍이 과부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다고 당신 집으로 와서 개가한 것은 궁벽한 산골에서 자란지라 의리가 어떤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오직 지아비를 잃으면 개가하는 것이 세상의 통례인 줄 알랐기 때문이지요. 내 잘못을 오늘 알았으니 어찌 잠시라도 이곳에 머물 수 있겠어요? 아들 둘을 낳아주어 당신도 유감은 없을 테니 정에 연연하지는 마세요.”

남편은 이 말을 듣고 억지로 그 뜻을 꺽을 수도 없을 것 같아 아내를 보내주었다. 그녀가 바로 그날 고향으로 돌아가 친척들에게 돌아온 사연을 설명해주자, 친척들은 어여삐 여겨 집을 지어주고 귀하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가까운 친족 중에서 양자를 얻어 그 뒤를 잇게 하니 시골 사람들이 칭찬을 했다.

이 일로 살펴보건데 남녀를 막론하고 배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969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