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딸, 조선의 잔다르크 -(토지)에서
그 말 대꾸는 없이 인성은,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인성은 말을 계속할 듯했으나 그만둔다.
“그래 어떤 뜻에선 사회가 인실을 배신했지. 그러나 인실이도 피해망상이었어. 친일파나 할 일 없는 한량들의 입방아쯤 무시해도 좋았을 게야. 누가 뭐래도 인실은 조선의 딸이고 조선의 잔다르크야.”(박경리 , 『토지』 15권(4부 3권)152쪽)
<유인실>
항일의식이 강한 신여성으로 조국에 대한 자존심과 사랑이 크며 그만큼 실천력도 가진 인물이다. 계명회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며, 야간기예학교 수예 선생으로 일한다. 오카타와 민족을 떠난 사람으로 고뇌하며 결국 통영에서 오가타에게 순결을 바치고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임신한 인실은 동경에 사는 조찬하에게 도움을 부탁한다.
인간이란 무리를 지으면 바닥 없이 잔인해지고 무책임해지고, 그건 마치 무대를 보는 관객과도 같이 신랄하다는 걸 느꼈습니다.(중략) 무리란 상향(上向)과 하향(下向), 양면을 지는 것 같습니다. 무리가 사명으로 뭉쳐지면 지고선(至高善)으로, 협동과 사랑으로 가지만, 힘으로 뭉쳐지면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공격의 대상을 찾게 되고 가장 취약한 것을 골라잡아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며, 크게는 다른 민족을 침해하고, 작게는 골목대장식의 잔인성을 나타내는데……생각해보면 역사란 늘 그래왔다. 언제나 강자 편에 서 있었다. 조그마한 그룹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뭔지 살고 싶지 않는 기분이 들지요.
(박경리 , 『토지』 15권(4부 3권)156∼1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