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는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 극세필 붓을 사용하여 먹으로 쓴깨알 같은 글씨 1만 3,311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편지이다. 누구든 이 편지를 보면 내용은 둘째 치고 그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울산 대곡박물관에서는 ‘천주교의 큰 빛, 언양’이라는 기획전을 하면서 이 황사영 백서의 정밀 복제본을 전시했는데 박미연 곡예사의 말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그 내용보돠 깨알 같은 글씨를 보면서 울먹이며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황사영이 얼마나 걸려서 썼을까. 그가 토굴에 둘어온 것은 1801년 음력 2월이었다. 그는 여기서 각지의 천주교인 박해 상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토굴로 찾아온 교우 황심(黃沁)과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법을 상의한 끝에 백서를 썼다고 하는데 완성된 날이 음력 9월 22일이니 7개월 이상 걸렸다는 얘기다.
황사영이 흰 비단에 쓴 편지는 청나라 북경교규장인 구베아(Gouvea, 湯士選)에게 보내는 장문의 호소문이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주문모 신부의 처형과 신유박해의 실상,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 실태에 대한 고발이다.
아, 죽은 자들은 이미 목숨을 던져 진리를 증명했으나(…) 저희들은 양떼가 흩어져 달아난 것처럼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길에서 헤매며 눈물을 삼키고 숨죽이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백번 생각해보아도 살길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조선에서 천주교를 부흥하기 위한 방안의 제시인데 그는 서슴없이 외국 군대가 쳐들어와야만 구제될 수 있다고 했다.
그 방안으로서 그는 첫째로 교황이 청나라 황제게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도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둘째로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셋째로 서양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호소하여 군함 수백 척과 5, 6만 군대를 데리고 오거나, 그렇지 못하면 수십 척의 군함에 5, 6천 명의 군대라도 가능하다고 했다.
서양은곧 성교(聖敎)의 근본이 되는 땅으로 2,000년 이래로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해져 귀하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홀로 탄환만 한 작은 이 나라만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교화를 방해하고 성교를 잔혹하게 해치고 성직자를 학살하고 있습니다. (…) 성경에서 기독교의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죄는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무겁다고 했으니 비록 이 나라를 섬멸한다 하여도 성교의 명분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다급한 심정을 토로한 이 문장은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황사영 백서 개인의 신상와 사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천주학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게 되었다.
액면 그대로 본다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외세의 무력 진압을 요구한다는 것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분개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선 당시 20대였던 그가 1만명의 목숨이 위태롭고 자신도 죽음의 공포에 떠는 급박한 현실을 호소하고자 극단적인 표현을 쓴 것이며 사실상 실현 나능성 없는 호소였음을 감안해야 한다고 그를 이해해주려는 분도 있고, 오늘날과 같은 민족주의가 성립하기 이전의 생각이니 이를 오늘의 잣대로 무조건 반민족주의라고 몰아부칠 수만은 없다고 비호하는 분도 있다.(285~288쪽)
황사영 백서, 그후
황사영은 이 백서를 황심과 옥천희(玉千禧)에게 맡겨 1801년 10월에 북경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동짓날에 맞추어 정례적으로 중국에 보내던 사신) 일행 편에 끼워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관계자들의 혹심한 고문으로 토굴이 발각되어 음력 9월 29일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로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의 어머니․작은아버지․아내․아들은 모두 귀양 가게 되었다. 황사영의 아내 정명련은 제주 대정현의 관비가 되어 떠나는 길에 두 살 난 아들 황경한을 노비가 되지 않도록 추자도에 내려놓고 갔다고 한다.
한편 조정에서는 10월에 파견하는 동지사에 진주사(陳奏使, 중국에 보고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신)를 겸하게 하여 신유박해의 정당성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등에 관해 해명하는 내용을 담은 토사주문(討邪奏文)을 보냈다.
그때 조정에서는 황사영 백서 중에서 중국의 보호 감독을 요청하는 내용을 빼고 서양 선박과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멸망시키려고 한 부분을 강조하여 10분의 1도 안되는 923자로 축소해 만든 가짜 백서(假帛書)를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하며 천주교들이란 서양 군대를 끌어들여 나라를 멸망시켜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쁜 무리임을 물증으로 제시하는 데 사용했다.
황사영 백서는 백서의 원본은 압수된 후 의금부에 계속 보관되었다. 그러다 세월이 90여 년이 지난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인수했고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諡福式,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공식적으로 복자(福者)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행사) 때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288~289쪽)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편, 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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